천 년 전, 뱀을 봉인했던 무기.
동시에 사지로 몰렸던 천사 미할리나가 전황의 반전을 꾀하기 위하여 아끼던 백룡의 등뼈를 뽑아 만든 검.
복잡한 눈으로 검날을 응시하던 예후르가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언제 깨어났지?”
“알면, 기억이라도 날까 싶어서?”
대단히 재미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뱀이 실실거렸다.
“아서라.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너를 지켜봐 왔으니.”
예후르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뱀은 앳된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오래전?”
“그래, 오래전.”
“…….”
“이를테면 네가 그 어린 몸을 하고 성궁에 들어왔던 그 시절부터.”
예후르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마저 아주 즐겁다는 듯 뱀은 눈을 반으로 접었다.
“무엇이 못 미더운가.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널 지켜봐 왔다는 사실이? 아니면 그리 가까운 곳에 숨어 있던 날 지금까지 알아채지 못했던 네 자신이?”
“…….”
“자만하지 마라. 너는 불과 몇 달 전 마귀가 들끓어 오르기 전까진 내 봉인이 풀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지 않은가.”
라발의 남서부 모게리니산에 봉인되어 있었던 뱀은 약 반백 년 전 멀리 떨어진 베론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최소 반백 년 이상 아무도 모르게 활개를 치고 다닌 셈이었다.
“이해는 간다. 천 년의 세월은 너희의 무한한 생에 있어 찰나와도 같겠으나, 투쟁하지 않는 천 년은 너희의 강고한 정신마저 무뎌지게 만들었을 터.”
뱀은 온화하게 빈정거렸다.
“나는 쇠약해졌기에 더욱 기민해졌다. 반대로 너희는 강했기에 둔해졌지. 살아남아야 한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진화한 나와 달리, 너희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미할리나여, 먼 지평선에 걸친 새 떼도 알아본다는 너의 밝은 눈이 나만은 가려내지 못한다는 것을 진정 내가 모를 줄 알았나?”
웃음기 띤 목소리에 날카로운 가시가 수북했다. 침묵하는 예후르를 뚫어져라 응시하던 뱀이 작게 코웃음을 쳤다.
“밝은 눈은 너의 축복이나 한편으론 저주구나. 그 눈에 의지하는 이상, 너는 앞으로도 숨어 있는 날 알아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예전처럼 다른 천사들이 철통같이 너를 호위한다면 모를까….”
“…….”
“하지만 평화로운 관성에 젖은 너희들이 다시 예전의 기개를 되찾을 일은 없겠지. 보아라. 다른 천사들은 방심했고, 너는 나를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어찌 보면 천 년 전, 나를 완전히 죽이지 못한 그 순간부터 오늘 이날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을 것이다.”
“내가 너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돌연 예후르가 예민하게 반응했다. 깎아 놓은 조각 같던 얼굴이 확연하게 찌푸려져 있었다.
그러자 의아하게 눈만 껌벅거리던 뱀이 도리어 기가 차다는 듯 야트막한 헛숨을 내뱉었다.
“설마 나를 꿰뚫어 보고 있노라 여긴 것인가?”
“…….”
“그야말로 놀라운 일이군.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모르는 존재를 하나 뽑자면 바로 너일 텐데. 우둔한 미할리나여, 그 지독한 예리엘도 너보다는 나를 잘 알 것이다.”
마치 하늘을 우러르듯 뱀이 양팔을 위로 뻗었다.
“나의 빛, 나의 진리.”
“…….”
“너는 온 세상을 비추는 광명이요, 세상의 단 하나 기준이 되어 주는 질서이지만 ‘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다. 아니, 네가 언제 ‘우리’에 대해 무엇 하나 제대로 알던 것이 있던가. 너는 계절이 순환하고 밤하늘 별이 떨어지는 이유는 알지만, 자식 잃은 부모가 애통해하는 이유는 모른다. 날아갈 듯한 행복과 생살이 찢기는 듯한 슬픔을 네가 아느냐.”
가슴을 울리는 격정적인 목소리였으나, 예후르의 표정에는 한 점 미동도 없었다. 여전히 무심하고 시큰둥했다.
허탈해진 뱀이 양팔을 다시 축 늘어트렸다.
“너는 모르겠지. 내가 왜 아직도 너를 벗이라 칭하는지.”
“…….”
“너는 수많은 ‘우리’를 죽였고, 끝내 ‘우리’를 패배시켜 ‘나’를 봉인한 장본인이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벗이라고 부른다. 내가 언제 예리엘이나 무식한 마그누스를 벗이라 부른 적이 있더냐.”
계속 해보라는 듯 예후르가 나른하게 팔짱을 꼈다. 그의 오만한 눈빛을 받으며 뱀은 서글프게 읊조렸다.
“다 네가 불쌍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사이를 바쁘게 오가던 페기의 시선이 우뚝 멈추었다. 마치 마음속에 오래 담아 왔던 죄를 고백하기라도 하듯 뱀은 담담하게 넋두리를 이어 갔다.
“아끼던 벗을 잃어 분노가 치미는데도 분노할 줄 모르는 네가 불쌍했다. 질서에 얽매여 수많은 ‘우리’를 베어 넘기는 네가 원망스러우면서도, 스스로 벌인 짓에 얽매여 번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네가 안타까웠다. 너는 알면서도 스스럼없이 자행한 예리엘이나 마그누스와는 달랐다. 모르기에 행했고, 행했기에 아파하는 너를 어찌 미워할 수만 있었겠나.”
“…….”
“미할리나. 너는 너의 마음이 누구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아는가.”
뜬금없는 소리에 예후르가 설핏 눈썹을 찌푸렸다.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뱀이 나지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모를 줄 알았다. 아니, 알면서도 외면하는 것인가. 상관없다. 네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음은 분명하니.”
느닷없이 뱀이 무릎을 짚으며 일어났다. 예후르가 그 즉시 성검으로 겨누자, 뱀은 양손을 들어 올리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튼짓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뱀은 그러면서 뒤돌아 무언가를 찾기 시작했다.
“이 지하수로는 말만 수로일 뿐, 실은 아주 오래전에 수맥이 끊겼지. 안전을 이유로 폐쇄되기 전에는 중죄인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는데… 아, 여기 있군.”
어두운 벽을 더듬어 나아가던 뱀이 갑자기 반색하며 짤그랑거리는 쇠붙이를 찾아 들었다. 페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여기저기 녹슬었지만 아직은 제법 쓸 만해 보이는 수갑이 벽에 걸린 쇠사슬과 연결되어 있었다.
뱀은 예후르의 의심 가득한 눈길을 받으면서도 여유롭게 손을 움직였다. 수갑을 이리저리 돌려 보며 이음새를 찾는 듯하더니, 이내 자신의 발목에 수갑을 채웠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예후르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짓이지?”
“이래야 네가 안심하고 떠날 것이 아닌가.”
“내가?”
도로 제자리를 찾아 정좌한 뱀이 고요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만히 그 시선을 마주하던 예후르가 불현듯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무슨 짓을 했지?”
“그거야 가 보면 알 일이지.”
“그보단 네 목을 치는 것이 빠르겠군.”
검을 고쳐 쥔 예후르가 저벅저벅 다가왔다. 그러나 흉흉한 기세에도 개의치 않으며 뱀은 빙긋 웃었다.
“어차피 난 여기서 벗어날 수도 없다. 이 수갑은 열쇠도 없고, 녹이 슬어 내 힘으론 풀 수조차 없지.”
어느새 뱀의 발치로 다가온 예후르가 흘끗 눈을 내려 수갑을 보았다. 뱀의 말대로 수갑에는 녹이 잔뜩 슬어 있었다. 성직자의 가느다란 팔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나, 그럼에도 뱀은 뱀이었다.
짧은 고민을 끝마친 예후르가 곧장 양손으로 성검을 치켜들었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 뱀의 허벅지로 찔러 넣었다.
“커헉!”
불시에 당한 뱀이 등을 둥글게 말며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흘렸다. 그럼에도 예후르는 계속 힘을 주어 검을 깊숙이 쑤셔 넣었다. 질긴 허벅지 근육과 뼈가 우둑우둑 끊어지고, 시뻘건 핏물이 야금야금 돌바닥을 덮어 나갔다. 페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코를 틀어막았다. 피비린내가 확 끼쳐 왔다.
예후르는 성검이 뱀의 허벅지를 완전히 관통하고서야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곧았던 정좌는 허물어지고 없다. 뱀은 이제 거의 바닥을 기고 있었다. 숨넘어가는 소리, 고통을 참기 위하여 까득 이를 악무는 소리, 돌바닥을 손톱으로 긁어내리는 섬뜩한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예후르는 그런 뱀의 턱을 발끝으로 살짝 들어 올렸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뱀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져 있자, 그제야 일견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이만하면 운신은 어렵겠군.”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린 예후르가 몸을 돌렸다. 페기는 불빛 너머 어둠 속으로 잦아드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멀거니 지켜보기만 했다. 그는 때로 누구보다 잔인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저렇듯 비인간적인 모습을 볼 때마다 그녀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곤 했다.
그런데 별안간 등 뒤에서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뒤를 돌아보았다.
손톱이 반쯤 벗겨진 손으로 연달아 바닥을 긁어내리던 뱀이 짐승처럼 신음하고 있었다. 둥글게 굽어진 마른 등에는 오돌토돌한 등뼈가 적나라하게 비치고, 슬쩍 드러난 목덜미에는 시뻘건 핏대가 서 있었다.
하기야 엔간한 부상이 아니다. 다리가 관통당한 고통을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겠는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려던 페기는, 그러나 뒤잇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흐흐….”
그는 웃고 있었다.
우는 듯 웃는 듯, 흐느끼는 듯 폭소하는 듯 기괴한 소리가 석벽 안을 스산하게 몰아치기 시작했다. 페기는 얼어붙은 채로 격하게 흔들리는 뱀의 고개를 보았다.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배를 움켜쥐고 꺽꺽거리는 소리만 토해 내던 뱀이 별안간 목을 훤히 내보이며 고개를 꺾어 올렸다.
“으흐흐, 하하! 하하하!”
그것은 광소였다. 돌아버린 미치광이처럼 온몸으로 폭소하고 있었다. 까뒤집힌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흐르고, 모자란 숨을 자꾸만 헐떡거렸으나 그럼에도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마치 켜켜이 쌓인 울분을 그렇게라도 토해 내려는 사람처럼 필사적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만, 그만해! 그만하라고!”
갑자기 웃다 말고 고성을 내지른다. 겨우 잦아드는 웃음소리 사이로 거칠게 숨을 헐떡이던 뱀이 잘게 물결치는 자신의 그림자를 노려보며 씹어 뱉듯 뇌까렸다.
“그만해. 나도 알고 있으니까.”
“…….”
“돌아온다고. 돌아와. 오, 그는 돌아올 수밖에 없어. 달리 방법이 없을 테니까.”
또다시 그림자가 흔들린다. 잠시 멈칫한 뱀이 곧 얼굴에서 힘을 풀며 흐리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나 오랫동안 그를 봐 오고도 확신하지 못하는구나. 그는 사랑에 빠졌어. 본인만이 모르고 있지. 저 상태라면 앞으로도 영영 깨닫지 못하겠으나… 이미 성도에서 일을 벌이고 왔지 않아.”
뱀의 눈이 곤하게 감긴다.
“그래, 도박이지. 하지만 우리에게 남은 길이 얼마 없다. 게다가 나는 제법 확신하고 있어. 이번만은 다르리라고.”
“…….”
“걱정하지 마라. 내 반드시 ‘우리’의 복수를 완수할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