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328)

펠릭스의 얼굴이 시뻘겋게 일그러졌다. 안간힘을 다해 몸부림쳐도 부질없었다. 그는 목이 졸린 채 허공으로 들려지고 있었다. 발끝이 디딜 땅을 찾아 동동거리고, 숨통을 옥죄는 만달의 손을 손톱으로 박박 긁어내린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확장된 두 눈에는 굵은 핏줄이 가닥가닥 섰다.

만달은 그대로 펠릭스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숨이 넘어가는 소리.

온몸의 뼈가 덜그럭거리는 소리.

여린 피부가 뜯기고 송곳니가 꽂히는 소리.

어둠 속의 살인은 그저 소리로만 들려왔다. 페기는 귀를 틀어막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겹쳐진 그림자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잦아드는 경련, 늘어지는 손발, 점차 고요해지는 사위….

살아 움직이는 것은 펠릭스였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매끄러운 손길로 축 늘어진 만달의 몸을 밀어냈다. 만달이 맥없이 우물 속으로 고꾸라지자, 풍덩, 하는 둔중한 소리가 잠시 울렸다.

펠릭스는 그러고도 한참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흐트러진 수도복을 탁탁 털고, 풀린 단추를 다시 목 끝까지 채워 잠그며. 물어 뜯겼던 목덜미의 흔적은 순식간에 검은 수도복 속으로 사라지고, 격렬했던 몸싸움의 흔적은 흐릿해졌다.

마침내 우아하게 돌아서는 그의 눈이 금빛이었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파충류의 눈알처럼 세로로 찢어진 동공. 징그럽다 못해 토악질이 나올 지경이다. 또다시 저렇게 남의 몸을 갈취한 도둑이 두 발 멀쩡하게 성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야는 다시금 가장자리부터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

말을 타고 벌판을 내달리는 뱀의 뒤로 성도는 발칵 뒤집혔다. 레오폴트는 분노했고, 과거의 그녀는 어찌할 줄을 몰라 했으며, 다른 세력들은 사태를 관망하며 어떤 노선을 잡아야 할지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모두 그녀가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녀가 모르던 시간의 단면들도 있었다.

“누가 보낸 서신이냐.”

“그게, 이번에도 적혀 있질 않습니다.”

“또?”

신경질적으로 서신을 잡아 뜯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아나클레토였다. 살이 뒤룩뒤룩 오른 얼굴을 인상 쓰고 지켜보던 페기는 뒤이어 들려오는 청아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제가 가 보는 게 좋겠어요.”

눈부신 금발을 늘어트린 미인이 우아하게 소파에 걸터앉아 있었다. 페기는 뒤늦게야 그녀의 이름을 떠올렸다.

세도파 바도비체.

“거기가 어디라고 네가 간단 말이냐.”

“베론이라면 성도에서 그다지 먼 거리도 아니에요. 게다가 위스누아도 근처에 있잖아요.”

세도파가 음울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누가 보낸 건진 몰라도 그 서신의 내용이 옳아요. 지금 성도는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진 일로 시끄러운데, 정작 이 심각한 상황을 엘피도 공작 전하만이 모르고 계시죠. 이 국면을 잘만 이용하면 탐보프와 엘피도 공작 전하 사이의 불균형한 관계를 단숨에 뒤집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위험이 너무 커. 공작이 나중에라도 이 사달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도저히 예상할 수가 없구나. 게다가 세도파, 너는 공작의 약혼녀가 아니더냐. 널 생각해서라도 그만한 위험을 감수할 수는 없어.”

“그래 봤자 허울뿐인 약혼녀죠.”

세도파가 냉소적으로 웃었다.

“차일피일 결혼이 미루어지는 것이 벌써 수년째예요. 숙부님, 전하께선 저와 결혼하실 생각이 있는 걸까요?”

“…….”

“전 잘 모르겠어요. 못된 생각인 걸 알지만… 전 차라리 이번 일로 카타리나 공작이 잘못되길 바라요. 그러면 전하께서도 저를 돌아봐 주시지 않겠어요?”

유리처럼 매끄럽던 세도파의 얼굴이 한순간 서럽게 무너져 내렸다. 늘 고고하고 의연해 보이던 그녀가 저토록 나약하게 구는 것은 아나클레토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던지, 그는 드물게 당혹한 기색으로 손을 내젓기 시작했다.

“세, 세도파, 네가 못된 것이 아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공작이 나쁜 것이지. 황제 폐하께서도 갈수록 애매모호해지는 공작의 노선을 우려하고 계신단다.”

저 당시 예후르는 점점 심해지는 탐보프의 개입을 견제하기 위해 오랫동안 교회와 척을 졌던 라발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결국에 그의 버릇을 들이기 위하여 페기의 죽음을 사주했다는 아나클레토의 증언과도 일맥상통했다.

“숙부님, 저희는 선택해야 돼요. 만일 카타리나 공작이 빈 성화대에 불을 붙이지 못한다면, 그녀의 처결 문제는 원탁으로 이관되겠죠. 그때 숙부님께서 여론에 떠밀려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리시느냐, 아니면 우리가 주도적으로 판을 이끌어 이득을 챙기느냐는 지금 우리에게 달려 있어요.”

거듭된 설득에 아나클레토에게서 엿보이던 주저하는 기색도 점점 옅어져 갔다. 그는 곧 결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베론에는 네가 가도록 해라. 이 서신에서 말하는 공작의 반지란 것이 훗날에 정말로 필요해질지 모르니까.”

“숙부님께선 어찌하시겠어요?”

“오늘 못 피우는 불을 내일이라고 피울 수 있겠느냐.”

아나클레토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카타리나 공작이 끝내 불을 피우지 못한다면 보나벤투라가 앞장서서 그녀의 처결을 논할 것이다. 나는 적당히 얹혀 가면 그만이야.”

“보나벤투라 추기경…. 늘 성가시던 작자였는데 이번만은 고맙군요.”

“그러게나 말이다. 그 완고한 성정이 도움이 될 때도 다 있군.”

한껏 빈정거린 아나클레토가 영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서신을 주워들었다.

“그나저나 이건 도대체 누가 보낸 건지….”

시야의 가장자리부터 서서히 검은 물이 들기 시작했다.

페기는 가물거리며 사라지는 그들의 모습에서 무심히 시선을 떼어 냈다. 그들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파편들이었다. 마땅한 벌을 받았으니,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할 터. 새삼스럽게 분노를 되새길 가치조차 없었다.

이어지는 장면을 찾아 헤매던 그녀의 눈앞으로 별안간 말 한 필이 급하게 스쳐 지나갔다.

페기는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달 홀로 외로이 뜬 야심한 밤. 남몰래 베론으로 돌아온 뱀이 교회로 들어가고 있었다.

페기는 조용히 그를 따라갔다.

어둠에 휩싸인 엄숙한 교회당, 가장자리 소성당에 숨겨져 있던 문, 지하 수로의 암흑… 그리고 막다른 길.

뱀은 촛대를 내려놓고 곧게 정좌했다. 영롱한 불빛이 그를 감싸듯 주위를 둥글게 비추었다.

어둠 속에서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살며시 다가가 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뱀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바람 저문 사위에 촛불은 흔들림 없이 그를 비추니, 불그스름한 빛이 감도는 얼굴은 지나치리만큼 말갛고 평화로워 보였다. 불과 며칠 전에 사람을 죽여 그 몸을 빼앗은 도둑이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너는 어디서 온 존재일까.

이 세상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에는 기원이 있다. 하물며 천사마저 그러했다.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가 빛에서 태어났고, 잇따른 일곱 천사가 그의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듯 이 기이한 존재에게도 최초의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태곳적에도 이렇듯 악한 존재였으리라곤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물을 수만 있다면 묻고 싶다.

왜 하필 나였느냐고.

다른 사도들의 불을 훔쳐 먹었어야 했다는 못된 소리는 당연히 아니다. 다만 이자로 인하여 겪은 고통이 너무나도 지대하여 어찌할 수 없는 원망이 생겨났을 뿐이었다.

세도파는 예후르를 사랑하여 그녀를 미워했고, 아나클레토는 순수하게 권력만을 쫓아 그녀를 해하였지만 뱀은 아니다. 그에겐 달리 이유가 없었다.

페기는 손을 살짝 들어 뱀의 얼굴 앞으로 가져갔다.

눈앞에 있는 이자는 과거의 존재.

닿을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닿고 싶었다. 인간적인 혐오감과 노여움에 몸서리쳤던 아나클레토나 본시오와는 사뭇 달랐다.

그녀에게 뱀은 미지의 존재였다. 마음속의 원한을 모조리 풀어놓기엔 아는 바가 너무 적었다. 무작정 원망만 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대하고 막연한, 이른바 재해나 다름이 없다.

“무얼 그리 보고만 있나.”

불시에 뱀이 말을 걸어 왔다.

깜짝 놀란 페기가 균형을 잃고 뒤로 자빠졌다. 요란하게 달음박질하는 고동 소리에 정신을 못 차리던 그녀는 곧 뱀의 시선이 미묘하게 자신을 비껴 난 것을 알아챘다.

페기는 멀거니 뒤를 돌아보았다.

불빛이 닿지 못하는 저 아득한 어둠 속.

“오랜만인데 얼굴도 보여 주지 않을 겐가.”

뱀의 눈이 미끄럽게 휘어진다.

“친애하는 나의 벗.”

“…….”

“미할리나.”

쿵.

심장이 떨어지는 듯했다.

페기는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멍하니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팽배한 가운데, 멀리서부터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모르던, 그래서 알고 싶었던 진실이 느닷없이 닥쳐왔다. 요동치는 마음을 다스릴 잠깐의 말미라도 주어지길 바랐으나, 애석하게도 가죽 장화를 신은 긴 다리가 성큼 불빛을 넘어왔다.

페기는 발작적으로 짧은 숨을 토해 냈다.

…예후르.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페기는 차마 그를 올려다보지 못하고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두었다. 이곳은 과거. 영문 모를 방법으로 시간의 흐름에 휩쓸린 그녀를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으나, 그녀는 행여 제 존재가 드러나기도 할까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불현듯이 예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약해졌군.”

페기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퍼뜩 들어 올렸다. 불빛의 가장자리에 선 예후르가 물끄러미 뱀을 응시하고 있었다.

잠자코 그의 첫 말만을 기다리던 뱀이 비로소 빙긋 웃었다.

“그러는 너는 여전히 강대하고.”

“봉인의 여파인가.”

“그럴 수밖에.”

뱀이 느긋하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그의 등 뒤로 길게 뻗친 그림자 속에서 검은 가죽으로 뒤덮인 흉측한 손이 튀어나와 검 한 자루를 쥐여 주었다.

뱀은 그 검을 미련 없이 예후르의 발치로 내던졌다. 쇠붙이가 깡깡거리며 벽돌과 부딪히는 소음이 날카롭게 울렸다.

“너의 것이니 돌려주겠다.”

예후르는 천천히 허리를 굽혀 검을 주워 들었다. 티 없이 멀끔한 순백의 검. 페기는 그것이 재회한 이후로 예후르가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모게리니 산의 성검임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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