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328)

그림자가 꿈틀거렸다.

“가 보거라.”

“…….”

“거기는 성화가 있으니 조심하고.”

급류가 굽이치듯 한 차례 일렁거린 그림자가 다시 잠잠해졌다. 만달은 지팡이를 쥐고 힘겹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절뚝절뚝 방을 가로질러 가더니, 창을 가리던 커튼을 홱 젖혔다.

저 멀리 앙겔리카 성궁의 백색 성벽이 보였다.

한 줌 달빛 아래 더욱 시리게 빛나는 성벽. 성 미할리나 대성당처럼 티 없이 새하얀 순백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성벽 위로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페기는 저 날이 언제인지 비로소 깨달았다.

그녀의 성인식을 축하하기 위해 아그리피나 홀에서 펼쳐졌던 연회.

새로운 카타리나 공작을 보기 위하여 백방에서 몰려온 귀족들과 고위 성직자들이 한 자리에 모일 기회였으나, 정작 연회의 주인공이었던 페기는 그날 얼굴 한 번 내비치지 못했다.

마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페기는 창틀을 쥐고 낄낄거리며 음험하게 웃는 만달의 뒷모습을 찬 눈으로 응시했다. 다 잊은 줄 알았던 복수심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그녀의 지난 삶을 엉망진창으로 망쳐 놓은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시야가 다시금 흔들렸다.

뱀을 잡기 위해 떠나는 예후르, 쓰러지는 레오폴트, 두 사람의 빈자리를 힘겹게 지키던 그녀…. 클레멘스의 질 낮은 술수에 걸려들어 한바탕 곤욕을 치렀던 그녀는 기어이 레오폴트와 함께 성궁을 떠날 결심을 했었다. 그때껏 누렸던 모든 부귀와 영화를 내려놓을 자신이 있었으나.

다시 찾아온 어두운 밤.

성 나르세스 광장의 하얀 대리석 바닥으로 달빛이 기울어지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퍼진다.

달빛 아래, 인적 없는 광장을 거니는 이는 만달이었다. 마치 산책을 하듯 지팡이를 짚으며 한가로운 걸음을 옮기던 그가 아주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한 성당에 든다. 페기는 가만히 그 성당을 올려다보았다. 광장을 둘러싼 여덟 성당 중 하필이면, 성 예리엘 대성당이었다.

열린 문을 따라 퍼런 달빛이 성당 내부로 드리워지니, 만달의 그림자도 갈대처럼 길쭉하게 늘어졌다. 그는 한없이 느긋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절뚝절뚝. 지팡이를 짚는 소리와 여유로운 발소리가 엇박자로 겹쳐진다. 동시에 그녀의 심장 고동도 쿵쿵, 불안하게 튀기 시작했다.

만달은 이제 계단을 오른다. 지팡이가 먼저, 오른발이 그다음, 왼발이 마지막. 차근차근 단상으로 올라서니, 이제 그의 눈앞에는 단 하나만이 존재했다.

타오르는 성화.

다가서는 발걸음이 전에 없이 흔들린다. 불빛 속으로 드는 얼굴은 무언가에 단단히 홀린 것처럼 넋이 빠져 있고, 깜빡임도 잊은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다 늙은 얼굴에서 탐욕의 악취가 질질 흘렀다.

만달은 천천히 손을 뻗었다.

일렁이는 열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이 타들어 가는 고통도 개의치 않으며.

그러고는 힘껏 성화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덜컥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페기는 얼음처럼 굳어선 만달의 손에 갇힌 성화를 바라보았다. 흐느끼듯 기괴한 웃음소리가 쭉 찢어진 만달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낄낄, 낄낄낄. 가시처럼 돋아나는 소름이 등골을 내달린다.

“드디어….”

손아귀에 잡힌 성화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만달이 한입에 불을 삼켰다.

페기는 숨을 멈추었다.

암흑이 찾아왔다.

하루아침에 비어 버린 성화대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을까.

새로운 사도의 각성과 함께 타오르며, 사도의 죽음과 함께 꺼져 버리는 불. 성화는 그 자체로 사도의 존속을 의미했다. 사도가 멀쩡히 살아 있는데 성화만 꺼지는 경우는 교회 천 년 역사를 통틀어 봐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의혹의 눈길은 그녀를 향했다.

얌전한 줄 알았는데.

천사께서 얼마나 진노하셨으면.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 성화가 꺼진 거야.

죽고 싶지 않아 필사적으로 부정하고 변호하였으나, 그 시절 이미 그녀 자신조차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었다.

혹 내가 나도 모르는 큰 죄를 저지른 걸까.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동심원 아래 무릎 꿇고 앉아 하염없이 눈물로 읍소했다. 만약 자신이 무언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라면 그 죄목만이라도 알려 주시길 바랐다. 그러면 행여 죽는다 하더라도 아무런 원망 없이 속죄하는 마음으로 눈 감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종국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고 죽었다.

살아 돌아온 그녀를 보며 사람들은 천사께서 내리신 기적이라 칭송했으나, 한편으로는 못내 꺼림칙한 눈길로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를 돌아보곤 했다.

그녀가 천사의 사랑을 받는 진정한 사도라면 4년 전엔 어찌해 성화가 꺼졌었단 말인가. 성화는 한낱 인간의 힘으로 꺼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여전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페기 역시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했다. 무덤에서 기어 올라온 뒤로 너무나 많은 일들을 겪으며 무뎌지고 다소 흐릿해졌을지언정, 그럼에도 의문은 가시질 않았다.

성화는 왜 꺼졌을까.

아나클레토는 예후르의 기를 꺾기 위하여 그녀를 죽였다고 고백했지만, 그가 나설 수 있는 기회는 결국에 성화가 꺼지면서 마련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나클레토와 본시오는 그녀의 죽음에 직접적인 원흉이 될 수는 있어도 근본적인 이유는 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누가.

어떻게.

“한 명이 더 있어.”

예후르.

“나중에 알려 줄게.”

너도 알고 있었을까.

몸의 떨림이 그치지 않았다. 페기는 벌겋게 핏발이 선 눈으로 만달의 옆모습을 노려보았다. 저자가 바로 비극의 발단이었다. 장대비 속에서 자신이 그토록 무의미하게 죽어 갔던 이유가 바로 저자 때문이다.

“…추기경 예하?”

불현듯 등 뒤에서 의아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웬 수도사가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만달 추기경 예하시지요…?”

평범한 수도복 차림의 젊은이였다. 그는 어안이 벙벙하던 표정에 곧 반가운 기색을 띠며 황급히 만달에게 다가갔다.

“예하! 지금까지 어디 계셨던 겁니까! 다들 예하를 찾아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만달이 둥글게 굽어 있던 등을 폈다.

“자네는 누군가.”

“저는 베론에서 보좌 사제직을 맡고 있는 펠릭스라고 합니다. 오래전에 예하께서 미나그로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 길잡이 역할을 맡았던 신학생이 바로 접니다!”

“그래….”

지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던 만달이 불현듯 손을 내밀었다.

“잡아 주겠나.”

“여, 영광입니다!”

펠릭스 보좌 사제는 기다렸다는 듯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갔다. 만달의 손을 잡고 부축하는 손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워, 원래는 주임 사제님께서 오셔야 했는데 지병으로 먼 길 떠나시기가 힘들어 부족하지만 제가 대신 오게 되었습니다. 이참에 예하를 꼭 직접 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는데 이, 이런 식으로 만나 뵙게 될 줄은….”

페기는 땀을 뻘뻘 흘리며 스쳐 지나가는 펠릭스의 모습을 천천히 지켜보았다.

달리 직감이라 할 것도 없었다.

저자는 곧 죽는다.

만달의 비대한 몸을 짊어진 말라깽이 보좌 사제가 힘겹게 중앙 통로를 가로지른다. 열린 문으로 쏟아지는 푸른 달빛이 그들의 발꿈치 뒤로 길고 긴 그림자를 드리우자, 기괴하게 요동치던 만달의 그림자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펠릭스의 그림자를 노리기 시작했다.

페기는 발걸음을 뗐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보좌 사제는 계속해 만달에 대한 예찬론을 떠들고 있었다.

신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새파란 젊은이.

송장의 이름으로 처음 접했던 그가 이렇듯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절로 착잡해졌지만, 그녀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다만 미궁 속에 빠져 있던 그의 최후를 지켜보며 진실을 밝혀내는 것만이 지금 그녀에게 쥐어진 사명이었다.

두 사람은 성 나르세스 광장을 벗어나 더욱 인적 없는 곳으로 들어갔다.

장막처럼 내리깔린 밤의 어둠. 달은 밝고 공기는 맑았다. 밀회하는 연인들이 사랑을 속삭이기 좋은 시각이었으나, 정작 이곳에서 펼쳐질 무대는 감미로운 애정극이 아닌 살인극이다.

“저기가 좋겠군.”

만달이 숨을 헐떡이며 우물을 가리켰다. 펠릭스가 땀을 뚝뚝 흘리며 그쪽으로 부축하자, 겨우 우물을 짚고 선 만달이 뒤돌아 등을 기대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한눈에도 피로가 역력해 보이는 모습에 펠릭스가 자진하여 나섰다.

“물을 길어 올리겠습니다!”

펠릭스는 여윈 팔을 바들바들 떨며 도르래의 손잡이를 힘겹게 당겼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었던 쇠사슬은 끼익 소리만 낼 뿐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으나, 이 악문 펠릭스의 노력으로 조금씩 돌아가기 시작했다.

끼긱, 끼긱.

연이은 쇳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자네 이름이 무어라고 했었지?”

별안간 만달이 물어 왔다.

“페, 펠릭스라고 합니다!”

“베론의 수습 사제라고?”

“보좌 사제입니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긴 하지만….”

우물거리는 펠릭스의 말을 흘려들으며 만달은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베론이라….”

“…….”

“갈 길이 멀군.”

“멀긴요. 그래 봤자 위스누아와 비슷한 것을요.”

펠릭스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목덜미가 달빛 아래 푸르게 빛났다. 노쇠한 몸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젊은 혈기를 가만히 지켜보던 만달이 슬그머니 우물에서 등을 떼어 냈다.

“거의 다 끌어 올렸습니다! 시원한 물 한 모금이면 다시 원기를 회복하실 수 있을….”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펠릭스는 의아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만달이 우두커니 서서 그를 굽어보고 있었다.

“예하…?”

달을 등진 만달은 시커먼 그림자로만 보였다. 펠릭스가 주저하며 허리를 폈다.

“예하, 대체….”

“사람이 어디에서 왔는지 아는가.”

기묘한 음성이었다. 눈앞의 존재는 만달이지만 만달이 아닌 것 같았다. 펠릭스는 본능적으로 몸을 떨었다.

“무,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어머니의 어머니.”

“…….”

“아버지의 아버지.”

그림자의 손이 음산하게 그의 어깨로 내려앉는다.

“걱정하지 말게.”

그러고는 미끄러져서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자네는 태초로 돌아가는 것이니.”

끼이익!

펠릭스의 손에서 풀려난 도르래가 다시 역방향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겨우 끌어 올렸던 쇠사슬이 날카롭게 울고, 두레박은 맥없이 추락했다. 평화롭던 밤이 쇳소리에 사정없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컥… 커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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