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8화 (278/328)

물끄러미 문을 바라보던 페기가 홈에 닿아 있던 손끝을 살짝 내렸다. 그 찰나의 접촉에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약간의 틈새로 엿보이는 암흑은 감히 손톱만 한 불빛으로 몰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페기는 손끝에 힘을 주어 문을 더 밀었다. 그러자 눈앞으로 펼쳐지는 까마득한 어둠.

그녀는 망설임 없이 암흑 속으로 발을 내디뎠다. 촛대를 든 뒷모습이 곧 새카만 지하로 먹혀 들어갔다.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알겠으니까 이거나 먹어.”

시큰둥하게 턱을 괸 안드레아가 사제의 입에 빵을 쑤셔 넣었다. 졸지에 말문이 막힌 사제가 컥컥대며 양팔을 허우적거렸으나, 안타깝게도 그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다.

부질없이 반항하는 사제를 다소 한심스럽게 지켜보던 차라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추적거리는 빗소리가 그치지 않는 창밖은 어느새 한 치 앞도 가리기 어려운 암흑으로 휩싸여 있었다. 저 어두운 광경이 마치 그의 어지러운 심경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게 베론은 오고 싶지 않았다.

페기의 고집이 하도 완고하여 따라오긴 했으나,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 도시를 뜨고 싶었다. 다만 지하 수로로 혼자 내려가겠다는 페기가 걱정되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연거푸 한숨을 내쉬던 차라는 문득 창밖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인상을 찌푸리며 유리창으로 얼굴을 붙여 보았지만, 암암한 어둠 속은 여전히 맨눈으로 잘 구분되지 않았다. 잘못 보았나. 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고개를 뒤로 물리려는데, 별안간 오싹한 기운이 등뼈를 타고 올랐다.

마치 보이지 않는 갈고리에 시선이 꿰인 것만 같았다.

움직일 수도, 목을 열어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다만 저 아스라한 어둠 속에 박힌 한 쌍의 안광이 그의 사지를 얽매고 있었다.

도대체 ‘저것’은 무엇이길래.

가까스로 쥐어 짜낸 의문조차 본능적인 공포심에 야금야금 먹혀 사라질 즈음, 갑자기 어둠 속 수풀이 흔들리더니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차라는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쉴 수 있었다. 한바탕 끔찍한 악몽에서 깨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왜 그래?”

졸린 눈을 비비며 하품을 하던 요슈아가 의아하단 얼굴로 물어 왔다. 차라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그게….”

멍하니 대답하려던 차라가 불현듯 입을 다물고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저 비 내리는 야밤.

섬뜩한 안광이 사라진 어둠 속을 가만히 응시하던 차라가 영 자신 없는 기색으로 목을 긁적였다.

분명 어딘가 익숙한 감각이었는데….

양초가 뜨겁게 타들어 갔다.

어디선가 새어드는 바람결에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벽으로 비스듬히 드리워진 페기의 그림자도 함께 춤을 추었다. 무섭도록 적막한 사위. 오래전에 물이 말라붙은 수로에는 퀴퀴한 물비린내 대신 까닭 모를 악취만이 맴돌고 있었다.

페기는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을 계속해 걸어 나갔다. 지하로 내려온 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이젠 가늠할 수 없었다. 어둡고 습한 곳이면 으레 들끓곤 하는 쥐 떼나 박쥐조차 없으니, 마치 세상과 단절된 것만 같았다.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던 수로라고 했다.

그러나 내심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벽에 균열이 일지도 않았고 침수된 부분도 없었다. 대체로는 외길이었으나 종종 갈림길이 나왔는데, 다행히 중앙에서 내려와 펠릭스 보좌 사제의 송장을 치웠다는 이들의 발자국이 남아 있어 어렵지 않게 길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길은 대체 어디로 이어지는지.

눈앞의 어둠은 막연한데, 양초는 시시각각 짧아진다.

길이 끝없이 이어질수록 돌아갈 길은 계속해 요원해지기만 했다. 페기는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과 약간의 망설임을 끌어안고 발을 놀렸다. 평생을 연마해 왔던 침착함이 금방이라도 거품처럼 터져 나올 것 같은 감정들을 간신히 짓누르고 있었다.

예후르.

너는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던 걸까.

뱀의 흔적을 쫓아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그런데 죽은 그녀의 시신도 보지 않고 돌아온 곳이 또다시 여기였다.

도대체 이곳에 무엇이 있었길래.

어떤 진실이 튀어나올지 몰라 차마 알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제 손으로 진실을 파헤쳐야 하는 현실이 못내 원망스러웠다. 이제 겨우 둘이서 행복할 수 있었다. 숨겨진 진실 따위 상관하지 않고 그와 영원토록 행복할 자신이 그녀에겐 있었다.

준비된 미래를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버린 사람은 다름 아닌 예후르였다. 페기는 바로 그 사실을 가장 견딜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었다면 못 들은 체 외면하고 모른 척할 수라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그러지도 못한다.

저를 이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그가 미웠다. 행여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이 밀려오기라도 할까 두렵다. 차라리 4년 전 심장이 꿰뚫렸던 그대로 죽어 있길 그랬다고, 무덤에서 그렇게 아득바득 기어 올라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후회하게 될까 봐 무서웠다.

내가 어떻게 되살아났는데.

끔찍한 죽음의 혹한을 견디고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그녀는 으득, 이를 갈며 시커먼 어둠 속으로 발을 크게 내디뎠다.

한탄하고 원망하며 하염없이 흐느낄 단계는 지나갔다. 지친 몸에 동력이 되는 것은 어느덧 분노였다. 그녀는 정신력마저 고갈된 밑바닥에서부터 악바리처럼 남은 힘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빨라지는 발걸음을 따라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페기는 거의 뛸 듯이 걸었다. 두꺼운 석벽에 가로막힌 발소리가 요란하게 공명하고, 귓가에선 심장 고동 소리가 쿵쿵 날뛰었다. 차오르는 숨이 혀끝에서 터져 나갈 때마다 흐느낌처럼 소리가 새었다. 그녀는 입술을 힘껏 앙다물며 끝모르는 어둠 속으로 무작정 손을 내뻗었다.

그때, 주변의 공기가 달라졌다.

페기는 멈칫 발걸음을 물렸다.

살갗으로 와닿는 온도가 확연히 낮아져 있었다. 그녀는 소름이 오소소 올라오는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조심스레 촛대를 앞으로 내밀었다. 서서히 뻗어 나가는 반원의 불빛 속으로 곧 텅 빈 공간이 나타났다.

막다른 곳이었다.

어안이 벙벙하여 입술만 벙긋대는데, 문득 그녀의 발 앞으로 계속 이어지는 발자국들이 눈에 띄었다. 페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천천히 발자국을 따라갔다. 오래지 않아 긴 타원형의 자국이 불빛 안으로 들어왔다.

페기는 자국 앞에 살짝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타원형의 물체가 오랫동안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 유독 이 부분만 먼지가 쌓이지 않고 깨끗했다. 자국 주변을 불빛으로 비추어 보니 발자국들도 이 주변을 특히 맴돌고 있었다.

짐작이 맞다면, 죽은 펠릭스 보좌 사제의 송장이 있었던 자리이리라.

페기는 무릎을 짚으며 느릿하게 일어났다.

펠릭스 보좌 사제는 4년 전에 이미 죽어 있었다.

왜?

그녀는 발걸음을 옮기며 근방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막다른 벽, 먼지 쌓인 구석…. 그러나 시신의 흔적 말고는 특별히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애당초 먼저 왔다 간 자들의 발자국이 하도 어지럽게 찍혀 있어서, 시신이 놓여 있던 자리를 제외하면 엉망으로 훼손된 상태였다.

다시 돌아온 시신의 흔적 앞에서 페기는 허탈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곳이라면 분명 무언가 단서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베론조차 막다른 길이었다면 이제 그녀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내가 뱀이야, 페기.”

“그는 땅으로 내려온 천사야.”

심적으로 지쳐 가는 것이 확연하게 느껴졌다. 이제는 정말 그만하고 싶었다. 뱀인 예후르는 용서할 수 없겠지만, 천사인 예후르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저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며 현실에 안주하고 싶었다. 이대로 돌아가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간다면, 그는 또 무어라 할까.

페기는 그가 두려웠다. 그가 내뱉을 말들이 무서웠다. 난데없이 스스로 뱀이라 했던 것처럼 또다시 그녀의 마음을 난도질할까, 그것이 끔찍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예후르는 이미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되어 가고 있었다. 도대체 무얼 바라 그녀를 내보냈는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돌아가지도, 그렇다고 여기 머무르지도 못하여 망설이기만 하는 사이, 바닥을 보이는 촛대에 아슬아슬 맺혀 있던 촛농이 그녀의 손가락으로 뚝 떨어졌다.

“아!”

화끈거리는 감각에 놀란 페기가 저도 모르게 촛대를 떨어트렸다. 그러고는 촛농에 벌겋게 덴 손가락을 매만지며 울상을 짓다가 흘끗 시선을 돌렸다. 촛대와 분리된 양초가 데굴데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다행히 촛불은 꺼지지 않았지만, 눈에 띄게 줄어든 양초의 크기가 마음에 걸렸다.

발치를 뒹굴던 촛대를 쥐고 나머지 양초를 줍기 위해 몸을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그녀가 지나왔던 저 시커먼 어둠 속에서 한 쌍의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잘못 보았나 싶어 더듬더듬 눈을 비벼 보았지만 시야는 그대로였다. 당혹스럽다 못해 황망할 지경이었다. 찬물을 맞은 것처럼 얼어붙어 있는데, 갑자기 먼 곳에서 퍼드덕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대처할 틈도 없이, 어둠 속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튀어나왔다.

기겁할 듯 놀란 페기가 저도 모르게 촛대를 내동댕이치며 주저앉았다. 그러다 퍼뜩 스스로를 보호할 무기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바닥을 더듬으며 촛대를 찾기 시작했다. 촛대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지만, 미처 틀어쥐기도 전에 사위가 암흑으로 물들었다.

…탄내 섞인 연기가 미미하게 흘러왔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달달 떨리는 입술을 애써 힘주어 물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암흑,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그 끔찍한 암흑을 지나 마침내 목전으로 닥친 올빼미의 눈과 맞닿았다.

일순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열병이라도 도진 것처럼 시야가 돌고 머릿속이 회전했다. 빙글빙글 도는 모든 것이 올빼미의 눈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마치 그 눈이 세상 모든 것을 담아내는 우물이라도 되는 양.

거대한 파도에 휩쓸리듯 페기는 어찌할 도리 없이 올빼미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빙글빙글, 계속해 빙글빙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끝없이 돌기만 하던 그녀는 불현듯이 따사로운 온기를 느꼈다. 싱그러운 꽃향기가 맡아지고, 나지막한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어안이 벙벙할 새도 없이 눈앞의 암흑이 걷혔다.

봄철 평화로운 풀밭이었다.

페기는 황망히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내리쬐는 햇볕, 푸릇푸릇 녹음을 뿜어내는 잎사귀, 날아다니는 벌들과 졸졸 흘러가는 시냇물…. 어딜 보나 시골 한적한 풍경이었다. 너무나 당혹스러워 생각조차 더디게 흘러가는데, 멀지 않은 풀밭에 누워 있는 웬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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