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가 적은 리누스 도시 연맹은 자위(自衛)가 어렵다.
그렇기에 보통은 바스토뉴의 용병단을 고용하여 대신 국방을 맡기는데, 이미 승기를 잡은 교회와 대적하여 부질없는 희생을 내고 싶지 않았던 용병들이 위스누아와의 계약을 파투 내고 돌아가면서 방위 태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 버렸다. 짐작하건대 연맹 서부의 강자인 프라가는 지금도 호시탐탐 위스누아를 노리고 있을 것이었다.
당연히 위스누아의 간접 지배를 받는 베론의 분위기도 흉흉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위스누아의 상황을 이렇듯 어렵게 만든 교국의 방문자가 불편한 것은 당연한 일이겠고.
“…우리 정체는 숨기는 게 좋겠어.”
나지막하게 건네는 말에 안드레아와 차라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페기는 시름 가득한 눈을 돌렸다. 잿빛 땅거미가 몰려드는 창밖의 거리 위로 교회의 높다란 첨탑이 보이기 시작했다.
교회의 주임 사제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그들을 반겼다.
“성도에서 오셨다고요…?”
사제는 통행증을 곧이곧대로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하기야 페기와 안드레아, 차라, 요슈아, 게다가 척 보기에도 사막의 이교도인 라만까지. 중앙 교회의 고루한 인사들이라기엔 지나칠 정도로 개성적인 면면이었다.
사제가 좀처럼 의심을 거두지 못하자, 안드레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사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내가 이거까진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예?”
“너, 마가 공작 전하 알지?”
사제의 얼굴이 순식간에 핼쑥해졌다. 교회의 탕아, 망나니 사도. 그녀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이 변방까지도 종종 들려오곤 했다.
“내가 실은 그분의 명을 받고 온 거거든.”
“마, 마가 공작 전하요?”
“그래. 너도 여기 새로 부임했으면 알 거 아니야. 너의 전임자들이 무슨 악독한 짓을 꾸몄는지.”
사제의 어깨가 흠칫 튀었다. 수년 전 병사한 전 주임 사제와 얼마 전 전출된 보좌 사제의 일은 이 베론에서 거의 금기시되는 화제였다
“어디 보자…. 그 보좌 사제가 어디로 쫓겨났다고 했지?”
“다그마르 산맥의 수도원.”
“오, 공기 좋고 물 좋은 곳이지.”
사제의 떨림이 더욱 심해졌다. 다그마르 산맥은 바스토뉴 야만족들의 본거지였다. 대단한 사명감이 있지 않고서야 그딴 산간벽지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안드레아가 흐뭇하게 웃으며 사제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어때. 너도 거기로 갈래?”
사제는 당장에 교회의 문을 열었다.
어두운 교회당 안으로 지는 해의 석양빛이 길게 드리워졌다. 페기는 사제를 따라 천천히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온기 없는 적막. 교회에는 응당 존재해야 할 거룩함보다는 영문 모를 써늘한 긴장감만이 감돌고 있었다.
“…사제님은 이 교회에 대해 얼마나 아시나요?”
“저도 갓 부임한 터라 자세히는 모릅니다. 그저 돌아가신 전 주임 사제님께서 수십 년 동안 이 교회를 돌보셨다는 것과 제가 부임하기 직전까지 테오둘로 보좌 사제가 주임 사제직을 임시로 맡고 있었다는 것 정도….”
우물거리며 대답하던 사제가 퍼뜩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그러고 보니 만달 추기경께서 젊은 시절 이 교회의 주임 사제셨다고 하더군요.”
“만달 추기경께서요?”
뜻밖의 인물이 언급되자 페기는 조금 놀랐다. 그녀의 표정을 어찌 해석하였는지, 사제가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젊으신 분이면 잘 모르실 수도 있겠습니다. 최고령 원탁 추기경이요, 위스누아의 대주교셨는데 4년 전이었나… 아, 그래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셨을 때 말입니다. 그때 만달 추기경께서도 의문의 죽음을 당하셨지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아마 우물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고….”
페기는 가만히 안드레아와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안드레아도 몰랐던 사실인지 어깨만 으쓱할 뿐이었다.
“수십 년 동안 그 흔한 살인 사건 한번 없었던 곳입니다. 솔브리오 자작님의 말씀으론 지루할 정도로 평화로운 도시였다는데, 4년 전 펠릭스 보좌 사제의 실종을 계기로… 큼.”
사제가 아차 싶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페기는 짐짓 무심해 보이는 표정으로 그를 떠보았다.
“펠릭스 보좌 사제라면 뱀의 허물과 함께 지하 수로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그분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배, 뱀의 허물이라니요!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사제가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베론 교회의 지하 수로에서 발견되었던 거대한 뱀의 허물과 썩어 들어가던 펠릭스 보좌 사제의 송장. 모두 엘피도 공작에게 뒤집어씌우려 했던 혐의이나, 이제 와선 퀴테리아 추기경의 조작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질문을 이어 갔다.
“펠릭스 보좌 사제가 지하 수로에서 죽은 것은 확실한가요?”
“저, 전 불과 한 달 전에야 겨우 이곳으로 부임했을 뿐입니다. 자세한 사정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럼 같이 지하로 내려가 보실까요?”
“글쎄, 거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중앙에서 내려온 수사관들이 진작 송장을 치웠….”
사제가 황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페기는 작게 코웃음을 쳤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안절부절못하던 사제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말을 이어 나갔다.
“모, 모른다는 건 정말입니다. 전 원래 세잔 출신이고 지금껏 세잔의 교회들만 돌던 사람이에요. 이곳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무, 무슨 연유로 여길 찾으신 건진 모르겠지만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자자, 진정해. 누가 보면 우리가 잡아먹는 줄 알겠어.”
안드레아가 눈치껏 끼어들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지.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아.”
“그러니까 전 드릴 말씀이 없다고….”
“그거야 까 보면 알 일이지. 그나저나 먼 데서 손님이 오셨는데 이렇게 세워 두기만 하려고?”
사제의 어깨에 팔을 턱 하니 올려놓은 안드레아가 사제의 목을 거의 조르는 듯한 모양새로 질질 끌고 갔다. 안 가려고 버티려던 사제의 다리를 라만이 훌쩍 들어 옮기고, 마지막으로 페기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차라가 그들을 뒤따랐다.
네 사람이 어두운 복도 너머로 사라지자, 교회당에는 엄숙한 정적만이 흘렀다.
페기는 그제야 느릿하게 사위를 둘러보았다.
비 내리는 늦겨울의 저녁은 어느덧 한밤중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색색의 유리를 끼워 넣은 스테인드글라스는 찬란한 성화를 내보이는 대신 검게 가라앉았고, 간간이 켜져 있는 촛불들만이 간혹 휘청거리면서도 아스라한 빛으로 교회를 밝혀 나갔다.
하늘이 유독 흐린 날이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환복하고 교회로 나오니, 며칠 전 새로 들어온 보좌 사제가 어느 소성당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처음 보는 문이 열려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