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궁의 절대 권력자인 레오폴트가 두려웠던 페기는 그의 조언대로 세례가 끝날 때까지는 예후르를 조금 멀리했지만, 그 뒤로는 다시 예후르를 따라다녔다. 부쩍 가까워지는 둘의 사이를 레오폴트가 대놓고 만류하거나 방해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눈에 뻔히 보이는 페기의 마음을 응원해 주었느냐 하면, 그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탐보프와의 관계를 위하여 예후르에게 세도파 바도비체와의 약혼을 제안한 사람은 레오폴트였다.
예후르를 성도에 남겨 두고 목가적인 자연 속으로 떠나자 했던 것도 레오폴트였으며, 모를 리 없는 페기의 마음을 부러 입에 올리지 않은 사람 역시 레오폴트였다.
페기는 자신을 아끼는 레오폴트의 마음이 예후르를 아끼는 마음보다 덜하다곤 생각하지 않았다. 예후르에 비하면 그녀는 부족한 점투성이지만, 적어도 레오폴트의 눈에는 그리 비치지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예후르를 향한 그녀의 오랜 연정을 오직 그만이 외면해 왔던 까닭.
아마도 그 역시 예후르의 특별함을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던 것은 아닐지.
레오폴트와 예후르의 유대는 오래되었다.
페기나 차라보다 일찍 성궁으로 들어왔던 안드레아조차 그 두 사람의 관계를 완벽하게 파악하진 못했다. 어느 고아원에서 안드레아를 찾아 데려왔던 무용담을 곧잘 자랑하곤 했던 레오폴트도 먼 사막에서 예후르를 만났던 일만은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꼈다. 두 사람만이 알고 있는 시간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예후르에게서 느껴 왔던 이질감을 레오폴트라고 모를 리 없다.
차라가 예후르에게만 의심을 접고, 사이 나쁜 안드레아마저 그에 대한 근본적인 믿음을 저버리지 못하는 것처럼.
더 나아간다면 ‘특별함’에 가려진 예후르의 ‘결핍’을 레오폴트는 알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연륜과 현명함으로 능숙하게 감추어 왔지만, 그는 결코 도달할 수 없었던 감정적 공감. 슬픔을 이해하고 기쁨을 인식하면서도 정작 그 다채로운 감정들을 뚜렷하게 느끼지 못했던 그의 감정적인 결핍.
사랑만으로 그런 사람과 한평생 행복할 리 없다.
레오폴트가 부러 그녀의 마음을 묵살해 왔던 연유도 아마 거기에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리 말해 주어도 절대 수긍하지 않았겠으나, 이제 와 인정하건대 4년 전 아무것도 모르던 그녀였다면 결국에 지쳐서 예후르의 곁을 떠났으리라.
그 시절 레오폴트의 결정은 온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죽음이란 큰 고비를 넘긴 페기는 이제 예후르의 결핍까지 끌어안을 수 있게 되었으며, 한 차례 그녀를 잃어 보았던 예후르는 어딘지 예전과는 달라졌다.
그는 이전보다 불안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더욱 완벽해졌다. 페기는 그의 감정적 결핍이 옅어지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되살아날 수 없는 그녀의 존재를 예후르가 받아들였을 리 없다. 예전의 그였다면 페기는 살기 위해 달아났던 북방의 안개 속에서 화살에 관통당해 두 번째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었다.
그녀는 달라졌고, 그도 달라졌다.
이렇게 달라지기 위하여 그들은 너무나도 많은 것을 겪었다. 그렇게나 많은 것을 희생하여 거머쥔 관계였다.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억울해서라도 그렇게는 안 되었다.
페기는 결심했다.
“지하 수로에는 나 혼자 들어갈게.”
강가에 쭈그려 앉아 세수를 하던 안드레아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는 차분하게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안드레아가 결국 어렵사리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못 미덥냐.”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뭔데.”
무릎을 짚으며 일어난 안드레아가 첨벙거리며 다가왔다. 페기는 머뭇거리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천사인 예후르는 괜찮아도, 뱀인 예후르는 괜찮지 않을 것이다.
“난 가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안드레아가 푸념하며 페기의 발치에 쭈그려 앉았다. 투명한 강물 속에는 페기의 흰 발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불쑥 페기의 왼발을 들어 올렸다.
안드레아는 페기의 맨발을 본 기억이 없었다.
페기는 늘 단정한 차림새에 신경을 썼고, 같이 목욕이나 하자는 안드레아의 짓궂은 농담에는 질색하며 도망가던 부류였다. 안드레아의 불량한 차림에는 별말 없던 레오폴트마저 알게 모르게 페기의 정돈된 차림새에는 흡족해하는 기색을 보였으니, 혹 몸에 큰 상처라도 있나 싶긴 했다.
하지만 그래 봤자 험하고 궂은일은 전혀 모르던 사도.
백색 성벽으로 겹겹이 에워싸인 성궁에서 화초처럼 자라난 아가씨의 발이 이렇듯 엉망일 리 없다.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잔뜩 박여 있었으며, 발꿈치는 보기만 해도 아플 정도로 갈라져 있었다. 여러 차례 피멍이 들어 빠져 버린 것처럼 발톱은 길이가 일정치 못했고, 무엇보다도 제때 치료하지 못하여 남은 흉터들이 빼곡했다.
무덤에서 되살아나고 보낸 1년이 그녀에게 새긴 상처였다.
안드레아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상처투성이 발등을 쓸어내렸다.
제정신이 아니던 예후르의 곁에서 페기가 어떤 고초를 겪어 왔는지 안드레아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다만 한눈에도 녹록지 않아 보이는 이 상처들을 껴안고 끝끝내 예후르를 놓지 못하는 페기의 심경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는가.
애써 복잡한 마음을 다스리던 안드레아는 문득 페기의 발목 부근에 새겨진 점을 발견했다. 가느다란 발목 아래, 힘줄이 두드러지는 부분을 중심으로 두 개의 점이 일직선으로 박혀 있었다.
멀뚱하게 그것을 들여다보던 안드레아가 느닷없이 피식거리며 웃었다.
“내 고향에서 발목에 점이 있는 여자를 두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
“사마귀.”
뜬금없는 소리에 페기의 미간이 좁혀들었다. 안드레아는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사마귀는 교미 중에 암컷이 수컷을 잡아먹잖아. 발목에 점이 있는 여자는 꼭 그렇게 남편을 휘어잡고 산다고….”
“안드레아!”
“농담이야, 농담.”
페기가 왈칵 화를 내자, 안드레아는 낄낄거리며 페기의 발을 놓고 일어섰다. 재빨리 발을 모은 페기가 새침하게 눈매를 세우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어깨를 돌리며 모른 척하던 안드레아가 갑자기 기습적으로 팔을 뻗어 페기의 곱슬머리를 마구 흩트려 놓았다.
“아, 안드레아! 하지 말라니까!”
페기가 반항하거나 말거나, 마음껏 머리를 헝클어트린 안드레아가 비로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페기와 시선을 맞추었다.
“명심해, 페기. 난 언제까지나 네 편이야.”
“…….”
“예후르의 편이 아니라 네 편이라고.”
페기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안드레아의 입가에 걸려 있던 장난기 가득한 미소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러니까 너도 내 소원을 하나 들어줘야 해.”
안드레아의 입술이 움직였다.
바람이 나뭇잎 사이로 우수수 지나가고, 오후의 볕이 물결 위에서 잘게 흔들린다.
말을 끝마친 안드레아는 대답을 요하듯 강렬한 눈빛을 보내왔다. 생각에 잠긴 듯 내리깔려 있던 페기의 보랏빛 눈이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이윽고 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
수일간의 여정 끝에 도착한 베론은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낡은 성문을 지키던 문지기는 초저녁이 다 되어 당도한 낯선 마차를 보고 제법 경계심을 드러냈는데, 교국의 인장이 찍힌 통행증을 내보이자 이번에는 잔뜩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 시작했다. 크게 환영받진 않을지언정 어딜 가든 배척은 당하지 않는 것이 교국의 통행증임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베론은 간접적으로 위스누아의 지배를 받는 곳이니까.”
안드레아는 그렇게 말하며 묘하게 긴장감이 감도는 성벽을 눈짓했다.
“퀴테리아와 비올라가 추락한 뒤로 위스누아는 급속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어. 사실 드디어 무너지고 있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동안 내제되어 있던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버티게 해 주었던 퀴테리아 자매를 잃으면서 풍비박산 나고 있는 실정이니까.”
위스누아는 라발과 탐보프 중간에 위치한 지리적 이점을 무기 삼아 중개 무역을 꽃피운 도시.
세잔의 소년 왕 요앙 오귀스트가 라발의 황위를 겸하게 되면서 실질적으로 라발과 탐보프 양국 사이에서 중립적으로 무역을 펼칠 곳이 리누스 도시 연맹밖에 없게 되자, 자연스레 연맹의 맹주인 위스누아의 세가 강해진 것이었다.
하지만 위스누아가 탐보프에서 거점으로 삼았던 동부가 전란에 휩싸이면서 혼란스러워졌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라발에선 통행세 문제가 불거져 중개 무역에 커다란 차질이 빚어졌다. 심지어는 혜성같이 나타난 엘피도 공작의 상단도 있었다.
신진 세력으로 부상하여 빠르게 치고 들어온 엘피도 공작의 상단은 비교적 저렴한 중개료와 엘피도 공작 본인의 영웅적인 입지를 무기로 나날이 성장하고 있었다. 세간의 사람들은 이미 위스누아 상단을 거의 고리대금업자 수준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뱀을 죽인 영웅의 상단을 반길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위스누아.
드넓은 농토도, 힘 좋은 일꾼도, 하다못해 훌륭한 기술도 없는 도시.
가진 것 없는 땅을 지금의 위치로 부상시킨 것은 오롯한 상단의 힘이었으나, 상단이 무너진다면 그간의 노고가 모두 물거품이 되는 수가 있었다. 현재 탐보프와 라발, 앞뒤로 꽉 막힌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안은 오직 단 하나였다.
바로 교국의 실권을 잡는 것.
천운으로 교회에는 위스누아 출신의 사도가 있었다. 더욱이 교황 레오폴트는 그녀를 아주 예뻐하여 그녀의 친자매인 퀴테리아를 추기경으로 올려 전권을 맡기기에 이르렀다. 교황과 엘피도 공작의 관계가 악화된 틈을 파고들어 차기 교황의 자리를 확정지을 수만 있다면, 그깟 엘피도 공작의 상단 따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것이었다.
생각해 보라.
위스누아를 다스리는 만포르차 가문의 두 자매가 지배하는 교회의 모습을.
누군가 부상하면 다른 누군가 추락하는 것이 자연의 이치였다. 알비야 공작이 교황이 되어 전권을 거머쥔다면, 역으로 엘피도 공작은 실권을 잃고 나락으로 떨어질 터. 그때 가서 상권을 회복하는 일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하여 위스누아는 정말이지 퀴테리아 추기경과 알비야 공작을 지원하는 데에 사활을 걸었다. 당장에 돈을 융통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임에도 막대한 거금을 투자하여 청백회의 세를 불려 주었고, 한편으로는 바스토뉴의 용병들을 추가 고용하여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가 버렸으니, 지나치게 무리했던 반동이 이제야 몰려오고 있으리라.
페기는 성도를 떠나기 직전 들었던 위스누아의 자금 사정을 떠올렸다. 또한 교국의 국경을 넘어 베론까지 오는 내내 느꼈던 살벌한 분위기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