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4화 (274/328)

막시모는 처음으로 통곡했다.

그 순간에 느꼈던 숨 막히는 위압감, 스스로 버러지만도 못하게 느껴지던 수치심, 위대한 존재를 만난 경이로움…. 도저히 한마디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었으나, 단 하나 확실한 것은 그를 비롯한 살수들의 남은 생이 그 찰나에 속박되었다는 것이다.

“따르겠습니다.”

혹자는 회개라고 할 것이다. 온갖 더러운 짓을 일삼던 자들이 마침내 위대한 사도를 만나 마음을 고쳐먹은 것이라고.

하지만 막시모는 그리 대단한 단어를 갖다 붙이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그날의 맹세는 본능이었다. 이를테면 죽은 동물의 사체를 헤집고 다니던 살쾡이 몇 마리가 사자를 맞닥뜨리고 꼬리를 마는 것처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복종.

막시모는 씁쓸한 기분으로 멀어지는 게일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게일은 돌아올 것이다.

서글픈 사실은 그가 게일의 입장이었어도 결국에 돌아오고야 말 것이라는 자각이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새끼가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인식하듯, 빛을 흘리며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던 소년의 모습은 눈감는 날까지 그들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을 것이었다.

막시모는 발걸음을 돌렸다.

메마른 들판의 가장자리에는 예후르와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막시모는 조용히 그에게로 다가가 고개를 조아렸다.

“게일은 떠났습니다.”

예후르는 손짓으로 기사들을 물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무심한 표정을 조용히 바라보던 막시모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성도가 다시 조용해지면 돌아오겠다고 하더군요.”

한 번도 그의 정체를 의심한 적 없다.

그가 선한 존재임을 확신했다기보단, 그의 정체가 무엇이든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신을 비롯한 살수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음을 알고도 그랬다.

그는 인간을 초월한 존재니까. 우리가 땅을 기는 벌레들을 예뻐하지 않듯, 그 역시 그러할 뿐이라고.

하지만 한낱 인간을 사랑하는 지금의 그는 어떠한가.

막시모는 문득 그를 시험하고 싶어졌다. 당신이 내리는 명령에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사지로 들어갔던 게일을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카타리나 공작에게 그러하듯 하염없이 우리에게 매달려 주길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의 맹목적인 충정을 당신 하나만은 알아주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다행히 게일은 얼굴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재판장에서도 얼굴이 많이 망가진 상태로 등장했었지요. 내년쯤 퀴테리아 추기경과 알비야 공작이 세간에서 잊힌다면, 이름과 신분을 바꾸어 돌아오면 될 것입니다.”

게일은 당신을 위해 고문을 견뎠다.

베스는 당신을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아타니는 당신을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들었으며, 나는….

“전하?”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비껴 있었다. 막시모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꺾었다.

어둡게 그늘진 숲의 초입에서 올빼미 한 마리가 음산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아직 어두워지지도 않았는데 웬 올빼미가….”

멍하니 중얼거리던 막시모는 예후르를 돌아보았다가 그만 말문을 닫고 말았다. 올빼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지독한 그리움이 서려 있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

거듭된 부름에도 그는 좀처럼 입술을 열지 않았다. 막시모는 별안간 온종일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온몸이 무거워졌다. 그냥 어디라도 드러누워 이 모든 번민과 피로감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왜 그러십니까. 저 올빼미도 비둘기처럼 쏘아 죽이라고 할까요?”

비둘기를 향한 엘피도 공작의 집착은 여전히 가시질 않고 있었다. 카타리나 공작이 모종의 이유로 자리를 비우자, 도리어 보란 듯이 사냥터를 쏘다니며 애꿎은 비둘기들을 쏘아 맞히고 있었다.

하지만 금방이라도 그러라 할 것 같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이유를 알 수 없는 서글픔이었다. 막시모는 부질없는 추측을 접고 다시 고개를 돌려 숲을 들여다보았다. 나무 그늘 속에 몸을 반쯤 숨긴 올빼미는 여전히 뚫어져라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낱 새라기엔 당혹스러울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였다.

참다못한 막시모가 재차 입술을 달싹이려던 찰나, 갑자기 올빼미가 퍼드덕거리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슬픔에 젖은 예후르의 눈이 올빼미의 뒤꽁무니로 따라붙었다. 잿빛 먹구름으로 꽉 짜인 하늘 아래, 올빼미 한 마리가 점점이 멀어져 갔다.

***

“…그러니까.”

안드레아가 어렵사리 침묵을 깼다.

“요약하자면 이런 거잖아. 사도와 뱀이 전쟁을 벌였다고 알려진 신성 시대가 사실은 땅으로 내려온 천사들과 뱀이 다툼을 벌였던 시기고, 여기 이 비석에 추도문을 새긴 것도 사도가 아닌 천사라고.”

“…….”

“왜 이런 중요한 사실들이 지금까지 묻혀 있었던 거야?”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에게 천사란 이교의 신이나 다름없는 개념이었기에.

멀리 아득한 곳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는 분들. 당연히 실존을 믿지만, 그 실존감을 느끼기엔 지나칠 정도로 요원한 존재.

“의도적으로 묻었겠지.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방랑을 시작한 진짜 이유를 지워 버린 것처럼.”

차라는 고개를 돌려 페기를 보았다.

“이제 알겠지? 내가 왜 이 비석을 바로 보여 주지 않고, 샤를로망 프리울리에 대한 기록을 읽게 했는지.”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기 위해 방랑을 떠났다.

현존하는 신성 시대의 비석들 역시 전우를 추모하는 내용이다.

비석을 새긴 존재는 인간이 아닌 천사다.

“…설마 샤를로망 프리울리도 천사였다는 소리를 하고 싶은 거야?”

페기가 황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자, 차라는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왜?”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방랑한 이유와 팔라브르 유적 모두 교회가 작정하고 묻으려 했다는 것, 뱀과의 전쟁에서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기 위함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비석에 추도문을 새긴 정체불명의 존재를 천사로 가정하는 것과 그 정체불명의 존재를 익히 알려진 천 년 전의 사도, 더 나아가 천사와도 동일시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페기가 좀처럼 말을 잇지 못하자, 차라는 미간을 살짝 구기며 다다다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단순한 억측이 아니야. 천사들도 죽이지 못한 뱀을 봉인한 게 천 년 전의 사도들이잖아. 천사가 못한 걸 사도가 어떻게 해? 신성 시대에 이미 천사들이 지상으로 내려와 뱀과 전쟁을 벌였다며.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신성 시대의 사도들이 실은 천사라면, 뱀을 봉인했다고 알려진 천 년 전의 사도들도 당연히 천사라고 추측해야 하는 거 아니야?”

“…….”

“게다가 예후르도 있잖아.”

차라가 보란 듯이 비석을 가리켰다.

“저 비석에서 언급되는 ‘빛’은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야. 아마도 예후르 역시 우리와 같은 사도가 아니라 천사….”

“그러니까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고!”

갑자기 안드레아가 성질을 부렸다.

“신성 시대야 그렇다 쳐. 워낙 오래전의 얘기니까. 하지만 옛날 옛적에 천사가 땅으로 내려왔다고 예후르까지 천사인 건 아니지!”

안드레아의 고함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마주 선 차라와 페기 모두 그녀의 고집스러운 시선을 외면할 뿐이었다. 황당한 기색으로 입술만 벙긋거리던 안드레아가 페기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그 새끼가 별난 점이 좀 많긴 해도 천사는 아니잖아!”

“…….”

“페기!”

“예후르가 다친 걸 본 적 있어?”

뜬금없는 소리였다. 안드레아는 왈칵 인상을 구겼다.

“뭐?”

“예후르가 다친 걸 본 적 있냐고.”

어둑하게 가라앉은 보랏빛 눈이 가만히 시선을 맞춰 왔다. 안드레아는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더듬었다.

“그게 지금 무슨 소리야?”

“생각해 봐. 예후르의 몸에 상처가 난 걸 본 적 있는지.”

안드레아가 사도로 각성하여 성궁으로 들어온 시기는 예후르와 비교해도 불과 1년밖에 차이 나지 않았다. 호기심에 사술을 부리던 것을 들키기 전까지는 으레 다른 남매들이 그러하듯 아웅다웅하면서도 제법 친밀하게 지냈는데, 애당초 주변에 또래가 서로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기억을 털어 보아도 예후르의 다친 모습은 없었다. 분명 둘이서 칼싸움도 종종 벌이고, 높다란 담장을 뛰어넘기도 했는데 어린 날의 상처는 오직 그녀에게만 있었다. 이상한 일이다. 뒤늦은 충격이라도 닥쳐온 것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왔다.

“그거야… 걔가 하도 몸을 사리니까….”

더듬더듬 말하면서도 안드레아는 그것이 거짓임을 알았다. 예후르는 몸을 사린 적이 없었다. 어렸던 그녀가 객기를 부려 위험한 장난을 치려 하면, 몇 번 말리다가 결국 본인도 뛰어들곤 했으므로.

안드레아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자, 페기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말간 옆얼굴에 어둡게 침잠된 기색이 먹구름처럼 몰려들었다.

“난 본 적 있어.”

칼바람이 몰아치던 북방의 어느 성.

부지불식간에 날아왔던 독화살.

페기는 이어지는 악몽을 끊어 내듯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상처에서 빛이 흘러나오더라.”

“…뭐?”

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안드레아는 아예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예후르는 상처를 입어도 금세 나아. 맹독도 통하지 않지. 사실상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해.”

“역시 천사가 맞잖아! 세상의 어떤 인간이 그러냐고!”

차라가 환해진 얼굴로 방방 뛰었다. 페기의 증언으로 본인의 추측에 확신을 가지는 듯했지만, 정작 페기의 표정은 어둡기 그지없었다.

천사.

과연 그럴까.

차라가 예후르를 천사라고 추측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팔라브르 유적의 비석으로 알 수 있는 천사의 존재, 둘째는 사도로서 그가 예후르에게서 쭉 느껴 왔던 이질감.

하지만 그것은 차라가 ‘인간이 아닌 특별한 존재’로 가정할 수 있는 것이 천사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도 천사도 아닌 제3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불행히도 페기는 그 존재를 알고 있었다.

“내가 뱀이야.”

거짓이다.

그가 뱀일 리 없다.

그녀는 오기에 가까운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사에 비견될 만한 그의 특별함만으로는 반증을 내세울 수 없었다.

뱀, 땅으로 떨어진 불씨의 절반을 훔쳐 먹은 도둑.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되었기로, 뱀은 아주 오래전 천사들과 결전을 벌이고도 살아남아 전 대륙을 집어삼킨 전적이 있었다고 한다. 예후르의 비인간적인 특징들은 그가 천사라는 증거가 될 수 있지만, 반대로 뱀이라는 증거 또한 될 수 있었다.

“…베론에 가 봐아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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