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모는 메마른 들판에 섰다.
눈도 비도 그친 지 오래인 늦겨울이었다.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버석하게 말라 갈라지고, 산천의 초목은 누런빛으로 비틀어져 갔다. 농부들의 우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지만, 먼 길 떠나야 하는 여객에겐 이보다 좋을 때가 없었다.
“몸은 어때. 많이 회복됐나?”
마지막으로 짐 가방을 확인하던 게일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잔잔하게 번지는 미소를 확인한 막시모가 골치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무리 좀 하지 마. 의사한테 보고 받았다. 청백회 놈들이 네 몸을 아주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았다며.”
“의사가 과장이 심하군요. 그래 봤자 일개 성직자들이었을 뿐입니다.”
일개 성직자라기엔 어딜 때리고 어딜 쑤셔야 아픈지 구석구석 잘 아는 고행자들이긴 했다. 하지만 막시모는 그것을 지적해 주는 대신 조용히 한숨만 내쉬었다.
게일은 전문적인 고문 기술자였다. 암살과 첩보를 겸하긴 해도 어디까지나 주 종목은 고문인지라, 청백회에 잡혀 들어가 거짓 증거를 제공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었다.
“한적한 곳에서 몸조리 잘하고 있어. 거 노잣돈도 많이 챙겼으니까 궁상맞게 지내지 말고.”
“…….”
“뭐, 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멋쩍게 머리를 긁적인 막시모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돌아올 거냐?”
게일은 제 역할을 다 했다. 일부러 그럴듯한 단서를 흘려서 청백회에게 꼬리를 잡혔으며, 진정성을 의심받지 않을 정도로만 고문을 견딘 후 뱀의 사술이 적힌 금서를 제공했다. 퀴테리아와 청백회에게 거짓된 희망을 심어 폭로를 유도한 데는 그의 공이 컸다.
그렇기에 엘피도 공작도 거금을 내린 것이리라.
단순히 자릿수로만 따져도 평생을 놀고먹어도 되는 금액이었다. 아무리 막중한 임무였다곤 해도 일개 부하에게 내리는 상이라기엔 액수가 너무 컸다. 게다가 오랜 시간 세작으로 활동했던 게일은 신분을 바꾸고 자신의 흔적을 지우는 데 아주 능숙하므로,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이대로 교국을 떠 버릴 가능성도 충분했다.
실상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였다.
“질문의 저의를 모르겠습니다.”
“이대로 새 삶을 살아도 쫓지 않겠다는 뜻이야.”
게일이 멀뚱멀뚱 눈을 끔벅였다.
막시모는 조금은 새삼스럽고, 또 조금은 생소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간 동료의 시신을 거두고 장례를 치르며 이별한 적은 많았어도, 이렇듯 멀쩡하게 살아 숨 쉬는 동료와 담담히 작별 인사를 나눈 적은 없었다.
“…성도가 조용해지면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게일. 넌 아직 젊어. 과거는 여기 묻고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저는 맹세했습니다. 이 숨이 다할 때까지 그분을 따르겠다고.”
막시모는 그만 말문이 턱 막혔다. 물끄러미 자신을 주시하는 게일의 말간 눈이 마치 너는 그날의 맹세를 저버렸느냐고 책망하는 것만 같았다.
오래된 기억은 순식간에 머리 꼭대기까지 차올랐다.
그의 이름이 막시모 리소단테가 아니고, 그의 고향이 교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이 아니었던 시절.
세잔 발루아 왕가의 살수로 왕의 은밀한 명을 받아 온갖 비밀스럽고 잔혹한 짓을 자행하던 그는 어느 날 낯설고도 새로운 명을 내리받았다.
“교황을 죽여라.”
당시 그의 주인이던 요앙 오귀스트는 발루아 왕가의 적손으로 어린 나이에 세잔의 왕위를 이어받았으나, 모계로 이어지는 라발의 살레르티나 황가의 대가 끊어지면서 천운으로 라발의 황위를 겸하게 된 인물이었다.
라발은 전 대륙을 통틀어 가장 역사가 긴 나라이며, 오랜 시간 교회의 수호자 노릇을 자처해 온 신성 제국. 그 강대한 국력은 감히 세잔에 비할 바가 못 되므로, 요앙 오귀스트가 이미 실권을 휘어잡은 세잔보다 라발의 국정에 관심을 쏟을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그러나 콧대 높은 천년 제국의 귀족들은 살레르티나 황가의 마지막 황녀였던 디안드라 섭정에겐 고분고분했어도, 그녀의 외아들이자 낙후된 세잔의 소년 왕이었던 요앙 오귀스트에겐 꾸준히 비협조적이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국정을 운영할 수 없었던 요앙 오귀스트는 자연스레 보다 은밀한 방식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막시모를 비롯한 발루아의 살수들이 음지에서 암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시절, 막시모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공공연히 황제를 무시하던 정적을 암살하여 사고사로 위장하기도 했고, 반란을 꾀하던 지방 군벌 세력에 첩자로 들어가 기밀 정보들을 빼 오기도 했다. 실체 없는 살수들의 괴담은 알게 모르게 라발의 귀족 사회를 강타하여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자들을 조심하라’는 말이 누미디아 길거리에 파다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리 숙련된 암살자에게도 교황을 죽이라는 명은 영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되어 다른 사람들의 피로 흥건하게 손을 적신 마당에 이제 와 교회의 동심원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알량한 도덕심이 문제였다. 교황은 천사의 선택을 받은 숭고한 사도이며, 만민의 정신적인 지도자. 타인의 손에 죽는 것이라면 몰라도 사도의 피로 제 손을 적시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러나 요앙 오귀스트는 맘껏 부리는 종복의 심경 따위를 헤아려 줄 정도로 자비로운 군주가 아니었다. 막시모는 하릴없이 교국으로 향했고, 천 년 전 전설적인 여덟 사도가 세웠다는 순백의 궁전으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 소년을 만났다.
“돌아가렴.”
고작 말 한마디.
고작 그 한마디에 그는 발길을 돌렸다.
분노한 요앙 오귀스트는 다른 살수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검 한 번 제대로 휘둘러 보지 못하고 돌아온 그들은 차마 ‘그분’을 해할 수는 없었노라 고백했다.
길길이 날뛰기만 하던 요앙 오귀스트도 그쯤 되자 상황이 그의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무서울 정도로 차분해진 황제는 고심 끝에 명령했다. 너희 모두가 가라.
교황의 권세가 진창을 뒹굴던 시절이었다.
비천한 용병들을 고용하여 교국 침공을 명했던 디안드라 섭정은 이미 수년 전에 죽어 석관에 묻혔고, 새로이 실권을 잡은 요앙 오귀스트 황제는 젊고 유능한 클레멘스 추기경을 앞세워 교국을 쥐락펴락하고 있었다.
라발의 용병대에 무참히 짓밟혔던 십수 년 전의 참극을 잊지 못한 성도의 시민들은 여전히 라발에 이를 갈고 있었다. 클레멘스 추기경에 대항하여 교국의 주권을 되찾으려 했던 교황 레오폴트만이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나, 그마저 나날이 심해지는 병세로 국정에서 거의 손을 뗀 상황이었다.
가여우신 분, 곧 돌아가시겠지.
성도의 시민들은 음지에서 수군거리며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교황 레오폴트가 짤막한 편지 한 장 남기고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중앙 교회는 요양을 핑계 대었지만,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 교황의 실종을 알고 있었다. 물밑에선 나병으로 썩어 들어가는 제 살을 보다 못한 교황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흉문까지 나돌았다.
하지만 레오폴트는 1년 만에 돌아오고야 말았다. 낡은 옷을 기워 입은 추레한 순례자의 행색으로.
그리고 그의 곁에는 왼쪽 눈에 성흔이 찍힌 사막의 아이가 있었다.
레오폴트는 그 아이가 새로운 사도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그러고는 죽어 가던 사람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정력적으로 국정에 임하기 시작했다. 교황은 목숨이 경각에 달하던 시점에도 라발에 대한 복수심을 놓지 못했던 사람이니, 자연스레 클레멘스 추기경을 위시한 라발의 세력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교황을 암살하란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천성적으로 잔인무도한 냉혈한인 요앙 오귀스트는 살인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위대한 사도라 한들, 자신의 앞날에 걸림돌이 된다면 눈 깜짝하지 않고 칼을 휘두를 사내였다. 이미 선대 교황 제네로사 5세마저 그보다 더 치욕적일 수 없는 방식으로 죽은 마당에 나병에 걸린 병자 하나 죽는다고 세상이 요동칠 것 같지도 않았다.
“병자가 죽으면 어린 사도가 새로운 교황이 될 것이다.”
요앙 오귀스트는 포도주를 마시며 흔흔하게 웃었다.
사막에서 온 이교도.
당연히 교황을 제외하면 교국에 이렇다 할 연줄도 없으며, 도리어 그의 이국적인 피부색으로 말미암아 부정적인 인식만 팽배한 상황이었다. 그런 와중에 버팀목이 되어 줄 레오폴트마저 죽어 버린다면, 교회 역사상 다시 없을 허수아비 교황으로 전락할 터.
요앙 오귀스트가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용병대를 통제하지 못하여 교황 살해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어머니와 달리, 본인은 뒤로 빠진 채 모든 것을 막후에서 조종할 심산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암투 끝에 제좌를 지켜 냈던 황제의 저 집념이 과연 ‘그분’께도 통할까.
막시모는 혀끝을 맴도는 속엣말을 삼키며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달 뜨지 않은 야심한 밤.
살수들은 또다시 앙겔리카 성궁으로 향했다. 사위는 무덤처럼 적막했고, 은밀하게 조여드는 살수들의 그림자마저 묻힐 만치 어두웠다.
그날도 소년은 교황의 침실을 지키고 있었다.
“포기를 모르는구나.”
아스라한 어둠 속에서 소년의 금빛 눈이 유연하게 휘어졌다.
“좋은 자세다.”
무기를 뽑아 든 살수들이 단숨에 달려들었다. 그러나 불가해한 힘에 가로막혀 나머지는 모조리 튕겨 나가고, 오직 막시모의 검만이 소년의 어깨를 푹 파고들었다.
그 감각.
지금도 그는 잊을 수가 없다.
막시모는 불에 덴 것처럼 화들짝 검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제 어깨에 박힌 칼날을 무심히 응시하던 소년이 힘껏 검을 뽑아냈다. 허공으로 뿜어져 나오는 핏물이 아찔하도록 붉었다.
분출되는 핏물을 따라 무수히 흩어지던 살수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불현듯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빛이었다.
살수들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상처 입어 벌어진 소년의 어깨에서 새하얀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나는 이런 것으로 죽지 않는단다.”
자박자박 막시모에게로 걸어온 소년이 상냥하게 검을 돌려주었다.
“계속하겠느냐?”
막시모는 우두커니 주저앉아 소년을 올려다보았다.
고대의 조각상처럼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 어린 얼굴에 그야말로 세상 모든 것을 초월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지평선까지 내달리는 광막한 평원이고, 또한 세차게 파도치는 바다였다. 까마득한 세월을 견뎌 낸 자연의 아득함이 저 작은 몸에 가득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