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271/328)

차라의 기세등등한 말에 안드레아가 콧방귀를 뀌었다.

“퍽이나 그렇겠다. 신성 시대 쪽이면 안 그래도 연구할 게 없어서 맨날 똑같은 사료만 파는데, 발견된 지 반백 년이면 이미 물고 빨고 다 했을 시간이야.”

“…아니거든. 중앙 교회에서 철저하게 막고 있거든.”

차라가 뚜하게 반론했다. 페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안드레아를 째려보았다. 동생들의 흘김에 안드레아는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앙 교회에서 왜 유적 연구를 막고 있는 거야?”

“완전히 차단한 건 아니고, 중앙 교회에서 엄선한 신학자들에게만 유적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는 건데….”

비밀을 이야기하듯 차라의 목소리가 작게 잦아들었다.

“알아보니까 교회에서 엄선한 신학자들이 없대.”

“뭐?”

“교회는 이미 몇몇 신학자들을 엄선해서 유적을 연구 중이라고 발표했는데, 보통 그러면 소문이 돌잖아. 유적지로 연구하러 떠났을 테니 자리도 비웠을 테고, 뭐, 딱히 중요한 기밀도 아니니 여기저기서 말이 나올 거고. 그런데 학계의 그 누구도 교회에서 엄선한 학자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야.”

페기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신성 시대에 대해 파고드는 걸 교회가 꺼려 하는 걸까?”

“아무래도. 지그룬 유적이나 말리첼로 유적은 엄연히 타국의 유적지니 관여할 수 없었다만, 교국의 유적만큼은 어떻게든 비밀로 엄수하겠다는 거지.”

차라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내듯 콧등을 씰룩였다. 페기는 어쩐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어느 선에서 내려온 명령일까.

팔라브르 유적이 발견된 지 고작 반백 년. 가능성 있는 사람은 죽은 선대 교황 제네로사 5세와 현 교황인 레오폴트, 혹은 라발 점령기와 그 이후로 계속해 영향력을 행사해 왔던 클레멘스 추기경 정도였다.

하지만 누구의 명령인지 알아내는 것보다 더 시급한 문제는 구태여 유적 연구를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신성 시대의 역사를 묻으려는 교회의 시도는 아주 오래되었다. 함께 묻힌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일부 기록을 들어 페기는 그 시초가 사도 로살레다이리라 짐작하지만 설령 그가 아니라 한들 까마득한 옛날부터 자행되어 왔던 짓이다. 현시대의 성직자들은 그저 오래된 강령을 섬기듯 관성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페기는 다시 생각의 방향을 바꾸었다.

신성 시대의 유물은 아직도 대륙 곳곳에서 출토되고 있지만, 지그룬 유적과 말리첼로 유적 그리고 팔라브르 유적이 유독 각광받는 이유는 사어로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신성 시대에 사용되었던 항아리의 깨진 조각보다야 바위에 새겨진 당대 기록의 가치가 높은 것은 당연지사.

안타깝게도 말리첼로 유적은 발견되었을 때 이미 절반으로 동강 나 있어서 전문을 확인할 수 없었지만, 지그룬 유적은 오랜 시간 비바람에 노출되어 있던 것을 감안하면 상태가 꽤 좋은 축에 속했다.

분명 그 내용이….

페기의 손끝이 멈칫했다. 어떤 깨달음이 머리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기분을 애써 숨기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차라, 혹시 팔라브르 유적지의 비문도 추도문이니?”

차라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페기는 그의 침묵에서 긍정의 대답을 읽었다. 어쩐지 벌레가 등골을 타고 오르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피어올랐다.

팔라브르 유적지는 멀지 않았다.

마차를 타고 만 하루를 꼬박 달려 도착한 곳은 이름 없는 울창한 수림이었다. 세잔과 라발에 동시에 접한 지역적 특성상 양국의 관계가 좋지 않았던 때에는 타국의 군사적 충돌에 휘말리지 않기 위하여, 그 이후로는 교국과 라발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으며 인근 주민들도 기피하던 곳이었다.

하지만 세잔의 발루아 왕가가 라발의 황가를 겸하기 시작하면서 양국의 관계는 크게 개선되었고, 탐보프와 붙어 라발을 견제하던 알비야 공작과 퀴테리아 추기경이 추락하면서 교국과 라발의 관계도 다시 안정세로 접어들었다. 수백 년 만에 평화를 되찾은 숲은 일견 전설 속에나 나올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숲의 입구에는 중앙 교회에서 파견한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여기부턴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돌아가십시…. 사, 사도님?!”

차라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이 허둥지둥했다.

“아니, 돌아가신 지가 언젠데 여길 또 오십니까! 이러다 교황 성하께서 경을 치실지도 모릅니다!”

“내가 장담하는데, 성하께선 본인이 이런 명령을 내렸는지도 까맣게 잊고 계실걸요. 애당초 성하의 직속 명령이 맞긴 해요?”

병사들은 우물쭈물 입을 다물었다. 윗선에서 까라면 까는 그네들이 중앙 교회의 번잡스러운 행정 명령 체계를 알 리가 없었다.

“사, 사도님. 잘 아시겠지만, 그게, 저희는….”

“알아요. 혹시라도 들키면 이건 모두 내 죄고, 당신들은 내 협박에 어쩔 수 없이 길을 비켜 줬을 뿐이라고요.”

차라가 시큰둥하게 요슈아를 가리켰다.

“대신 그때 가면 칼 들이밀고 협박한 건 얘라고 말해야 돼요?”

“뭐? 난 왜!”

“힘든 짐은 같이 나눠 드는 게 친구지.”

“와, 이럴 때만 친구래.”

투덜거리는 요슈아의 입꼬리가 한껏 씰룩거렸다. 간단하게 친구를 제압한 차라는 손을 팔랑거리며 병사들에게 인사하곤 마부를 재촉했다. 채찍을 맞은 말이 히이잉, 울며 숲속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병사들이 감시를 서는 숲답게 인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주둔하는 부대가 정기적으로 사냥을 하는지 날짐승의 자취도 딱히 눈에 띄지 않았으며, 이상하게도 하늘을 나는 새 한 마리 볼 수 없었다.

모두들 숲의 묘한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마차는 곧 끝없는 침묵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페기는 유리창을 번갈아 스치는 햇볕의 조각들과 나뭇잎 그림자들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불현듯 숲이 풍기는 기묘한 느낌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그것은 사람의 손길이 최소한으로 닿은 자연 그대로의 날것이 내는 냄새였다.

한참을 깊은 숲속으로 들어가던 마차는 어느 순간 차라가 벽을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멈추어 섰다. 기다렸다는 듯 차라와 요슈아가 폴짝 마차에서 뛰어내리자, 좁은 좌석에 긴 팔다리를 구겨 넣고 있었던 안드레아가 앓는 소리를 내며 삐거덕 움직였다.

“허리 아파 뒈지겠네….”

안드레아가 끙끙대며 내리자, 마지막으로 페기가 조심스레 계단을 밟아 마차에서 내려왔다. 그때, 바람이 불어오며 그녀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나뭇가지가 하늘하늘 흔들렸다.

나뭇가지가 흔들리자 깃털처럼 매달린 나뭇잎들이 흔들리고,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일 듯 무성하게 깔려 있던 나뭇잎 그림자들이 흔들렸다. 동시에 그 사이로 눈부신 햇빛의 조각들이 스며들었다.

페기는 손차양을 하며 눈을 시리게 찔러 오는 볕 사이를 가만히 가늠해 보았다. 하얗게 번지던 시야가 곧 선명해지며 눈앞의 전경이 닥쳐왔다. 페기는 어안이 조금 벙벙해진 표정으로 눈가를 가리던 손을 내렸다. 마찬가지로 우두커니 서 있던 안드레아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러니까 수백 년 동안 발견을 못 했지….”

마차가 멈춘 곳은 숲 한가운데 솟아난 절벽 앞이었다.

고개를 꺾어 올려다봐야 할 만큼 제법 높다란 절벽에는 그간의 세월을 내보이듯 덩굴 식물들이 어지럽게 휘감겨 있었다. 심지어 인접한 미루나무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는 가늘고 긴 가지들이 마치 담요처럼 절벽을 뒤덮고 있었다.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는 절벽의 후미진 구석. 차라와 요슈아가 빨랫감을 걷듯 미루나무 가지들과 덩굴 식물들을 헤쳐 나가는 곳에 비로소 수천 년 묵은 비석이 모습을 드러냈다.

“후.”

차라가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으며 비석을 올려다보았다. 페기와 안드레아 그리고 마부를 도와 말에게 물을 먹이던 라만이 다가와 비석의 신비로운 위용에 감탄했다.

“이 정도면 발견이 된 게 신기한데?”

안드레아가 건들거리며 휘파람을 불었다. 낑낑거리며 붙잡고 있던 덩굴과 나뭇가지를 라만에게 넘긴 차라가 겨우 한숨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지. 이런 곳에 비석이 숨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비석을 이런 데 세운 거지?”

안드레아는 비석을 차는 시늉을 했다가, 차라에게 들켜 비석에서 열 발자국 너머로 추방당했다. 장난이었다는 둥, 그래도 위험하다는 둥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가만히 비석 위로 손을 올렸다.

“팔라브르 유적만 이런 건 아니야.”

유치하게 말씨름을 하던 차라와 안드레아가 멀뚱히 그녀를 돌아보았다.

“지그룬 유적도 지금은 터만 남아서 그렇지, 거대한 궁성이나 무덤이 세워졌던 곳일 거라고 배웠어. 모종의 이유로 그것들이 무너지면서 비석의 존재가 드러난 거고.”

“말리첼로 유적은?”

“말리첼로 유적은 사갈 늪지대 근방에 있잖아. 게다가 북쪽으로는 험준한 다그마르 산맥을 접하고 있지. 당연히 일반인들은 얼씬도 안 하는 곳이야.”

“그럼 일부러 그런 곳만 골라서 비석을 세웠다는 거야? 왜?”

안드레아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물었다. 페기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비석을 세운 사람에게 적이 많았거나….”

“…….”

“아니면 추모하면 안 되는 사람을 추모했거나.”

그러자 누구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대관절 언제 세워졌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비석이었다. 까마득한 과거의 일을 두고 이런저런 말을 얹기에 그들은 아는 바가 너무나도 적었다.

“우선… 비석의 내용부터 들어보는 게 어때?”

차라가 용기 내어 나섰다.

“그러려고 온 거잖아. 비석의 내용을 알아가다 보면 무언가 짐작 가는 바가 생길지도 모르고….”

“그래.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들어나 보자.”

안드레아가 털썩 이끼를 깔고 앉았다. 차라는 타박타박 비석의 앞으로 걸어와 페기와 눈을 맞추었다.

“혹시 지그룬 유적의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기억해?”

“대강. 추도문이라는 것 정도.”

차라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내밀었다.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지그룬 유적의 해석본이야. 기억도 되새길 겸 오랜만에 다시 읽어 봐.”

페기는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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