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이 봉인되고 얼마 되지 않아 야누비타 1세는 세상을 등졌어.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오랜 벗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끝없는 방랑길에 올랐지.”
전해지길, 정해진 목적지 없이 발 닿는 데로 돌아다녔다는 사도.
방랑자 샤를로망 프리울리와 얽힌 일화는 교국은 물론이요, 라발이나 세잔, 하물며 북방의 탐보프에도 수두룩하게 널려 있었다.
“하지만 거기부터 거짓이었어. 샤를로망 프리울리에겐 목적이 있었으니까.”
페기는 악필로 대중없이 나열되어 있었던 지명들을 떠올렸다. 파르마, 준, 에비소, 톨레소프, 아타나시오스…. 그녀는 기울인 촛대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촛농을 맞아 가며 지도를 찾아 헤맸고, 그 지명들이 모두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흔적이 남겨진 곳임을 깨달았다.
“그분은 뱀과의 전쟁에서 유명을 달리한 옛 동료들을 추모하기 위해 방랑길에 올랐던 거야.”
전우를 추모.
악필로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다.
“그러면 이단 심문관들이 왜 그 내용을 삭제했다고 생각해? 전쟁이 끝난 뒤, 자비로운 사도께서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러 다녔다는 건 후세에도 널리 알려야 하는 미담이잖아.”
차라의 지적은 타당했다. 페기 역시 그 지점에서 깊은 고민에 잠겼었다. 늘 선전에 목이 말라 있는 교회가 다른 누구도 아닌 저명한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미담을 까닭 없이 묻었을 리 없으므로.
“…아마도 로살레다와의 반목이 이유겠지.”
모든 기록을 빼앗긴 상태에서 의지할 만한 곳은 정체불명의 악필 메모밖에 없었다. 그리고 메모에서 찾을 수 있는 해답은 단 하나였다.
로살레다와 샤를로망 프리울리.
제각기 소명의 천사 예리엘과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현신이었던 두 사람은 야누비타 1세의 벗으로서 뱀과의 기나긴 전쟁을 끝내는 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야누비타 1세 사후 로살레다는 홀로 교회에 남아 기틀을 다졌으며,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방랑길에 올라 다시는 교회로 돌아오지 않았다.
“야누비타 1세가 죽은 뒤 교회의 방향성에 대해 이견이 있었던 걸까?”
“그럴지도….”
페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사도 로살레다는 직접적으로 성좌에 오르지 않았을 뿐, 사실상 야누비타 1세를 잇는 당대 최고의 권력가로 여겨진다.
섣부른 추측일지도 모르지만, 페기는 뱀과 샤를로망 프리울리에 대한 일부 기록들이 사라진 것에 로살레다의 의지가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짐작을 했다. 로살레다의 비밀 칙령쯤이 아니고서야 이렇게나 조직적으로, 이렇게나 오랫동안 기록 말살이 이루어질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단순한 의견 대립은 아니었을 거야. 그랬다면 샤를로망 프리울리에게 악감정이 남아 그의 기록을 일부 삭제했다는 건데, 굳이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러 다녔다는 내용만 지워 버렸다는 건 아무래도 이상해.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남긴 시와 노래들은 지금도 숱하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잖아.”
전해진다 뿐일까, 여전히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제일의 시인이요, 제일의 예술가로 많은 이들에게 각광받고 있었다. 만일 로살레다가 샤를로망 프리울리에게 악감정이 남아 그에 대한 기록을 말살시키고자 했다면, 그가 지은 시와 노래부터 찾아 불태웠을 것이었다.
하지만 로살레다는 그러지 않았다. 설사 샤를로망 프리울리와 반목이 있었다 한들, 그에 대한 기록 일부를 삭제한 것은 악감정이 남아서라기보단 삭제된 기록 내용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즉, 로살레다는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죽은 전우들을 추모하러 다닌 것’이 못마땅했음이다.
“그러고 보면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남긴 수많은 시들 중에 추모시만 없는 것도 이상해.”
페기가 아랫입술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방랑의 목적이 추모였다면, 당연히 추모시를 남겼을 텐데…. 지금 남아 있는 시들은 죄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거나 방랑 중에 겪었던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각색한 것들이잖아.”
“그럼 로살레다가 추모시도 찾아 없앴다는 거야?”
“아마도….”
대답을 이어 가려던 페기가 멈칫했다. 차라가 뜻밖에 깊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직도 대련이 한창인지 안드레아와 라만의 기합 소리가 들려오고, 선명한 아침볕이 두 사람의 발치로 드리워졌다. 숨죽인 고요가 그들을 은밀하게 감싸 안았다. 페기는 남몰래 치맛자락을 꽉 부여잡으며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잘… 모르겠어.”
말끝이 조금 흔들린 것도 같았다.
“지금까지 내가 말했던 건 모두 메모에 한정된 내용이니까…. 메모에 기반을 두어서 얼기설기 짜 맞춘 것뿐이야. 메모의 사실 여부도 불확실하고, 무엇보다 메모의 내용 자체가 너무 단편적이라 논리의 비약이 심할 수밖에 없어.”
차라는 여전히 별말이 없었다. 페기는 용기를 내어 말을 이어 갔다.
“아까부터 묻고 싶었는데, 대체 그 메모를 쓴 사람은 누구야? 혹시 저 방의 주인이었다는 죽은 수도원장이야?”
“랄프 수도원장은 그저 고서 수집가였을 뿐이야. 나는 그 메모를 쫓아 여기까지 찾아온 거고.”
“그럼 누군데. 이미 죽은 사람이니?”
“왜 죽었다고 생각해?”
도리어 날아든 질문에 페기는 대답을 조금 더듬었다.
“그거야 이단 심문관들이 검열하기 전에 그 책들을 모두 읽은 사람이니까…. 이단 심문관들이 맡은 직무에 얼마나 광적으로 충실한지는 너도 잘 알잖아. 금서를 읽은 사람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으니 아마 목숨으로 사실을 은폐하려 들었겠지.”
“목숨으로 은폐…. 그럴듯해.”
혼자서 중얼거린 차라가 엉덩이를 탁탁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메모를 쓴 사람이 누군지는 나도 몰라.”
“뭐?”
페기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차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씩 웃고 있었다.
“말했잖아. 네 부활에 대해 찾다가 우연히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알려지지 않은 시를 발견했다고. 이어지는 시구가 이단 심문관들에 의해 뜯겨 나간 걸 발견하고 의구심이 들어서 계속 파헤치다가, 그 메모를 발견한 거야.”
“그럼….”
“그 메모가 우릴 여기까지 이끈 거지.”
결국에 차라의 결론도 그녀와 다르지 않다는 뜻이었다. 페기는 어처구니없는 심정에 헛숨을 삼켰다. 차라에게 놀아난 기분이었다.
“나와 같은 생각이었다면 아까는 왜 그렇게 쳐다본 거야? 꼭 날 시험하려는 것처럼….”
“네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길 바랐어. 정체불명의 메모밖에 가진 게 없는 지금의 우리에겐 의심만이 유일한 무기니까.”
“말로 하면 되잖아.”
“남이 하나하나 짚어 주면 그게 무슨 의미야?”
차라가 양손을 허리에 올리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래서, 그게 끝이야?”
그를 흘겨본 페기가 새침하게 종이를 한 장 내밀었다. 종이를 받아 든 차라가 빙그레 웃으며 악필로 적힌 메모 부분을 손가락으로 튕겼다.
“그래, 여기가 남았지.”
팔라브르 유적.
페기는 다른 메모들과 완전히 동떨어져 있던 메모를 떠올렸다.
팔라브르 유적이라 함은 지그룬 유적, 말리첼로 유적과 함께 기록된 역사로 남은 신성시대의 몇 안 되는 흔적들 중 하나였다. 또한 탐보프 북부에 위치한 지그룬 유적, 라발 서부에 위치한 말리첼로 유적과 달리 교국에 위치하여 그들이 직접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유적지기도 했다.
“거기엔 뭐가 있는데.”
“…….”
“이번에도 말 안 해 줄 거야?”
“별로 멀지도 않잖아. 가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페기는 옅은 한숨을 지으며 피로가 덕지덕지 묻은 얼굴을 문질렀다.
“차라, 솔직히 말해서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메모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분이야. 나는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고 정말로 괜찮은 건 아니었다.
성궁에서 이 데르모트 수도원으로 오는 내내 페기는 끔찍한 악몽에 시달렸다. 선잠이라도 들려 하면 마지막으로 보았던 예후르의 얼굴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고, 그럼에도 무시하고 잠을 청하려 하면 뱀이라 고백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전을 울려 왔다.
그럴 리가 없는데.
그가 뱀일 리가 없는데.
아무리 목 놓아 외친들 덧없이 사그라지기만 하는 부정에 힘을 싣고자 여기까지 왔다. 그녀는 그가 뱀이 아니라는 확신을 되새겨야만 했다. 그는 모종의 이유로 거짓을 말하고 있으므로, 이 여정에서 그의 거짓을 깨부술 논리를 가져가야만 했다.
하지만 기대했던 목적지에서 건진 것은 뱀과 관련된 아주 고릿적의 역사 몇 줄과 뜬금없는 천 년 전의 사도들의 이야기였다. 그녀는 허탈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쯤 되면 잠 못 들고 아득바득 버텨 왔던 오기에서도 힘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앞이 안 보일 정도로 어두운 동굴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 같지. 나도 그랬어.”
차라가 그녀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내가 먼저 걸어가 본 길이야. 잘못된 길이었으면 널 여기로 이끌었겠어?”
페기는 고개를 살짝 들고 서러움이 묻어 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차라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메모를 믿을 수 없다면 나를 믿어. 내가 무사히 해답이 있는 곳으로 데려다줄게.”
그의 목소리에는 신비로운 힘이 있다.
예후르는 천사의 권능이 그의 입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 설명했지만, 페기는 온전히 그런 이유에서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차라의 말에 힘이 있는 것은 그가 옳기 때문이다. 그가 바르기 때문이고 그가 선하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정의롭기 때문이었다.
“후, 오랜만에 운동했더니 몸이 좀 풀리네. 페기, 넌 다 끝내고 나온 거야?”
라만과 대련을 끝마친 안드레아가 어깨를 크게 돌리며 다가왔다. 어느새 어슴푸레한 새벽이 가시고 눈부신 아침이 밝아 오고 있었다. 새 지저귀는 소리 사이로 새벽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수도사들의 발소리가 엄숙하게 울려 온다.
가만히 차라와 시선을 맞추고 있던 페기가 살며시 그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가자.”
***
팔라브르 유적.
교국의 알비야 지방 외곽에 위치한 고대 유적지로, 세잔과 라발 양국에 동시에 맞닿아 있는 접경 지대였다. 이미 수백 년 전에 그 존재가 드러났던 지그룬 유적, 말리첼로 유적과는 달리 고작 반백 년 전에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장본이기도 했다.
“그 말인즉, 지그룬 유적이나 말리첼로 유적과 달리 연구가 많이 진척되지 못했다는 뜻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