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9화 (269/328)

아연하게 중얼거린 페기가 황급히 악필이 적힌 페이지를 읽어 보았다.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현존하는 시구들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담겨 있었는데, 정작 결론으로 이어지는 다음 장이 뜯겨 나가 있었다.

페기는 책장을 빠르게 넘겨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똑같은 악필로 적힌 메모가 등장했다.

로살레다와의 반목

그리고 역시나 뜯겨 나간 다음 장.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페기는 입술을 감쳐물곤 애써 차분하게 책을 덮었다.

모두 다 살펴보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듯했다.

***

어느 날 불이 있었다.

불에서 일어난 아지랑이가 어둠을 몰아내니, 그것이 바로 빛이었다. 빛은 사방으로 퍼져 곳곳에 고였다. 빛이 고인 곳에서 새로운 빛이 날개를 펼쳤는데, 훗날에 이름 붙여지길 광휘의 천사 미할리나였다.

빛 한가운데 천사가 우뚝 섰다. 그의 눈은 세상의 끝을 내다보았지만 정작 자신의 발치는 보지 못했다. 천사의 유일한 사각지대를 멀리 달아났던 어둠이 탐냈다. 천사가 그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 어둠은 이미 천사의 발뒤꿈치를 잡고 늘어져 기나긴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분노한 천사가 발목을 자르려 칼을 높이 쳐들었다. 그런데 그때, 그림자 속에서 새로운 천사가 날개를 펼쳤다. 새로운 천사는 미할리나와 똑 닮았지만, 발뒤꿈치에 어둠을 매달고 있었다. 그림자는 계속해 또 다른 천사를 잉태했다.

그렇게 천사의 그림자 속에서 다른 천사가 태어나길 여러 번 반복하니, 총 여덟의 천사가 있었다. 여덟 천사는 생명의 불을 지키겠노라 맹세했다. 그들의 가호 속에 불은 비로소 완전했다.

어느 날 불씨가 떨어졌다.

겹겹이 싸인 어둠을 거쳐 마침내 불씨가 나뒹군 곳은 땅이었다. 하늘의 불을 지키던 천사들은 떨어져 나간 불씨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무도 모르게 땅으로 떨어진 불씨는 모래 먼지 속을 뒹굴며 조금씩 빛을 잃어 갔다.

어느 날 도둑이 있었다.

도둑은 땅으로 떨어진 불씨를 최초로 인지한 존재였다. 외따로 떨어진 불씨를 안타깝게 여겼던 그는 점차 다른 마음을 먹기 시작했다. 불은 어둠으로 가득하던 이 세상을 갈라 비로소 완전해진 존재. 그 티끌 같은 조각이나마 품게 된다면 얼마나 무궁무진한 힘을 얻게 될 것인가.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음험한 목소리를 이기지 못한 도둑은 땅으로 내려가 불씨를 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도둑의 역량이 미진하여 모두를 삼키지는 못하였으니. 토해 낸 것이 절반이요, 훔쳐먹은 것이 절반이었다.

하늘의 천사들이 모래 먼지 뒤덮인 땅의 변고를 알아차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삿된 도둑이로다.”

분노한 천사들의 창검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산을 가르고 바다를 뒤엎을 기세였으나, 절반의 불씨를 삼킨 도둑의 힘도 그에 못지않았다. 치열하고 치열한 싸움이 아주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나 위대한 존재들에게도 한계가 있는 법. 천사들은 결국 도둑을 잡아 죽이지 못했고, 도둑은 천사들을 이기지 못했다. 승리 없이 막을 내린 전투는 뜻밖에 세상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뒤집혀진 세상에 어느 날, 인간이 있었다.

땅을 기는 미물과 같이 조금씩 움트던 그들은 눈 깜짝할 새 지상을 뒤덮어 나갔다. 조악한 문명이 꽃을 피우고, 그들의 자손들이 계속해 터전을 넓혔다. 그에 하늘의 천사들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땅을 지배하는 것은 인간이었다.

“하늘에서 그러했듯 불은 시작을 잉태하리니, 지상에도 불을 수호하는 자들이 있어야 마땅하다.”

하여 어느 밤, 새로 분한 천사들이 성흔을 남기고 간 자들은 천사들과 같은 사명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천사의 권능을 이어받아 신비로운 이적을 다루었으므로, 지상의 인간들은 두려운 마음으로 그들을 우러러보았다.

“당신들도 뱀과 같은 존재입니까?”

그 당시 도둑은 이미 ‘뱀’으로 불리며 세를 확장하고 있었다. 뱀에게 점령당한 땅의 원주민들은 으레 노예처럼 부려졌고, 뱀의 공세를 피해 험지로 달아난 인간들은 풍문으로 들려오는 뱀의 잔혹함에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그는 간악한 도둑이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우리는 도둑을 벌하러 온 사자이니라.”

사도들은 온 험지를 쏘다니며 뱀을 피해 달아난 인간들을 규합하기 시작했다.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인간들이 하나둘 모이자, 뱀도 더 이상은 그들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렇게 뱀과 사도들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뱀은 삿된 요술을 부려 ‘마귀’라는 잔혹한 괴물을 부렸는데, 사도가 아니면 감히 당해 낼 자가 없었다. 산천을 뒤덮는 마귀 부대에 비한다면 사도의 세력은 지극히 미력했으므로, 대부분의 충돌에서 그들은 승기를 잡지 못했다. 세상은 그리 순조롭게 뱀의 손아귀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흐름이 뒤바뀌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까마득한 시간 속에서 기록조차 풍화되어 버린 전란의 시대.

그 마침표를 찍은 사람은 어느 날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나타난 한 명의 사도였다.

빛나는 광휘.

야누비타 1세.

페기는 창밖으로 번져 오는 오늘의 첫 서광을 심란하게 지켜보았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찬란하게 나타나 지는 해처럼 덧없이 사라져 버린 야누비타 1세와 마찬가지로, 옛 신성 시대의 위용은 막연하고 허황된 수사로만 전해져 내려왔다.

사어 연구는 여전히 활발하게 진행 중이었지만, 워낙에 남겨진 기록이 적고 그마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된 부분이 많아 사실상 교회가 세워지기 이전 시대의 역사는 상상 속에만 남겨졌다는 의견이 주류였다.

그러나 남겨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남겨지지 못한 것임을.

아주 오래전부터 교회가 의도적으로 옛 시대의 기록을 삭제해 왔음을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페기는 하릴없이 책상을 바라보았다. 한바탕 뒤엎기라도 한 것처럼 활짝 펼쳐진 서적들과 종이 서류에는 똑같은 악필로 구석구석 메모가 되어 있었다. 복잡한 눈으로 악필을 응시하던 그녀는 이내 잘 떼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방을 나섰다.

어스름한 복도에는 새벽의 차갑고 신선한 공기가 감돌았다. 새벽 미사가 시작되었는지 멀리서 찬송가 소리가 들려오고, 일찍 깨어난 새들이 명랑하게 지저귀며 합창을 했다. 페기는 어깨를 감싼 숄을 여미며 빠르게 종종걸음을 쳤다.

외길로 이어지던 복도는 곧 한쪽 벽면이 뚫리면서 아담한 중정을 내보였다. 중정은 바위와 이끼, 키 낮은 수목들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져 있었는데, 어울리지 않게도 때아닌 칼싸움이 한창이었다.

“고작 이것밖에 안 돼? 더 해 봐!”

이를 사납게 드러낸 안드레아가 손가락을 까딱이며 도발했다. 울컥한 라만이 이국적인 대검을 꽉 움켜쥐고 달려들자, 칼날끼리 맞부딪치는 쇳소리가 날카롭게 공명했다.

복도 끄트머리에는 구겨진 종이 조각처럼 차라가 주저앉아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간 페기가 그의 옆자리에 무릎을 모으고 앉았다.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어?”

“…해 뜨기 전부터.”

밤새 제대로 쉬질 못했는지, 차라의 눈 밑에는 검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날아드는 칼날을 피해 땅을 구르고, 헐떡이며 검을 휘두르는 두 사람의 모습과는 대조적이었다.

“다 읽어 봤어?”

챙챙! 맑은 쇳소리 사이로 차라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려왔다. 페기는 무릎을 감싸 안은 양팔에 힘을 주며 말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어때?”

“놀라웠어. 내가 모르던 신성 시대의 기록이 그렇게나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에서. 특히….”

뱀.

페기는 일순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여 연신 마른침만 넘기고 있자, 차라가 다소 시큰둥한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그래. 지금까진 뱀에 대한 기록이 거의 전무하다고만 배웠으니까. 설마 이단 심문관들이 거기까지 손을 뻗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

뱀은 간악한 도둑이요, 사특한 모리배라. 너희는 그가 속삭이는 유혹을 경계하라.

경전에서 언급되는 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이 두 마디가 전부였다. 굳이 더하자면 천 년 전 뱀이 봉인된 후 교회 설립의 과정을 다룬 로살레다서에서 지나가듯 언급된 ‘뱀의 왕궁’이 있었다.

…우리는 이튿날에 다시 모였다.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뱀이 사라진 시대를 어찌 꾸려 나가야 하는지였다. 추종자 중 하나가 용기 있게 무대로 나가 말하길, 뱀의 왕궁이었던 이곳에 우리를 섬기는 신전을 지어 새로운 시대의 주춧돌로 삼자 하였다.

나는 그 말이 온당하다 여겼기에 기꺼이 찬동했다. 하지만 반론이 만만치 않았다. 여러 갑론을박이 오갔으나 가장 공격적인 의혹은 이것이었다.

‘뱀이 군림한 뒤로 사치와 향락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지나친 숭배는 독입니다.’

‘뱀의 전철을 밟자 주장하는 저자는 뱀의 하수인이 분명합니다.’

의견을 내었던 추종자는 한순간에 궁지로 몰렸다. 나는 답답해진 마음에 야누비타를 채근했다. 뱀을 봉인한 이후로 그녀는 세상 모든 일을 관망하였으나, 뱀의 하수인이라는 의심을 풀기엔 그녀만 한 적임자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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