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시각.
페란 지방의 산골에 위치한 데르모트 수도원은 한창 밤을 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린 수도사들은 종종걸음으로 불을 끄러 다니고, 보다 나이가 많은 수도사들은 연로하여 거동이 힘든 선배 수도사들을 부축해 침실로 들여보냈다. 광명의 천사 미할리나께서 한 줌 달빛으로 돌보시는 밤은 삿된 것들이 번성하는 시간인 만큼, 신속히 잠들어 새벽을 맞이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리 분주한 수도원으로 낯선 마차 한 대가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다.
지축을 울리듯 진동하는 말발굽 소리에 수도사들은 깜짝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슥한 어둠 속, 말이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투레질하는 소리가 음산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 수도사가 늙은 선배들의 손에 떠밀려 문밖으로 나갔다.
“누구… 십니까?”
마차에서 내리던 불청객들이 일시에 그를 돌아보는 기척이 느껴졌다. 수도사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등불을 든 손을 앞으로 더 내밀었다. 멀리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싶더니, 곧 불빛 속으로 누군가 얼굴을 쑥 내밀었다.
수도사는 얼떨결에 입술을 달싹였다.
“사도님…?”
정리되지 않은 잿빛 머리칼에 선명한 녹색 눈.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어린 사도가 퉁퉁 부은 얼굴로 퉁명스럽게 물었다.
“돌아가신 수도원장님 방, 아직 정리 안 했죠?”
“예, 예에….”
“다행이네. 빨리 들어가자.”
뒤를 돌아보며 팔을 크게 휘두른 차라가 수도원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말릴 새도 없이, 차라와 동행한 서너 명의 불청객들이 수도사를 스쳐 지나갔다. 어버버하던 수도사가 황급히 그들을 뒤따라 들어갔다.
지어진 지 벌써 500년 가까이 된 수도원은 퀴퀴한 냄새가 깊숙이 배었을 만큼 낡고 누추했다. 차라는 어둠에 휩싸인 복도를 거침없이 걸어 나갔다. 그의 뒤를 밟으며 수도사가 소심하게 만류하는데, 별안간 반대편 복도에서 한 늙은이가 촛대를 들고 튀어나왔다.
“도련님!”
“예, 안녕하세요. 새로운 수도원장님.”
차라는 성의 없이 대답하며 그대로 수도원장을 지나쳤다. 주름진 눈가에 잔뜩 힘을 준 수도원장이 열심히 지팡이를 짚으며 차라의 뒤를 따라붙었다.
“오늘은 또 어쩐 일이십니까!”
“확인할 게 있어서요.”
“도대체 무엇을 또 확인하시겠다는…. 서, 설마 또 돌아가신 랄프 수도원장님의 방을 훔쳐보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훔쳐보다니. 나이는 어려도 명색이 사도이신데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느긋하게 뒤따라오던 요슈아가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죽일 듯이 그를 노려본 수도원장이 다시 차라 쪽으로 고개를 쭉 뺐다.
“도대체 돌아가신 분의 방에서 무엇을 뒤지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부디 망자에 대한 예의를 지켜 주십시오! 데르모트 수도원의 새로운 수도원장으로서 더 이상의 무례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차라가 앵앵거리는 파리를 내쫓듯 신경질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울컥한 수도원장이 재차 목청을 지르려던 찰나, 나란히 걷고 있던 또 다른 불청객의 얼굴이 불현듯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수도원장의 낯에 시퍼런 경악이 비껴갔다.
“사, 사막의 이교도…?”
그러자 라만이 작게 혀를 차며 로브를 더욱 깊숙이 눌러 썼다. 수도원장이 졸도할 것처럼 뒤통수를 부여잡았다.
“도련님, 지금 더러운 이교도를 들이신 겁니까? 예?!”
귀신 들린 듯한 수도원장의 노성이 복도의 석벽을 꽝꽝 울렸다. 그 바람에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오던 안드레아가 욕설을 작게 뇌까리고, 요슈아는 대놓고 인상을 썼다. 그러나 늙은 수도원장이 말라비틀어진 목에 핏대를 세우든 말든, 정작 차라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미로처럼 복잡한 수도원 복도를 속속들이 다 아는 것처럼 모퉁이를 수없이 꺾어 들어가던 그는 마침내 어느 방문 앞에 도착했다. 문에는 육중한 자물쇠가 매달려 있었는데, 고리 부근에 강제로 잠금을 풀려고 한 흔적이 역력했다.
품속에서 열쇠를 꺼내든 차라가 시큰둥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반년 남은 거 알아요?”
“예?”
“내 생일. 반년 남았다고요.”
차라의 손에 들린 열쇠를 탐욕적으로 훔쳐보던 수도원장이 뒤늦게야 눈을 껌벅였다. 느긋하게 자물쇠에 열쇠를 끼워 맞춘 차라가 단조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은 즉, 반년만 지나면 내가 페란 공작이 된다는 거고.”
비로소 그의 저의를 깨달은 수도원장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얼굴을 굳혔다. 사도의 수가 줄어든 이래, 페란 공작의 자리는 수백 년 가까이 비어 있었다. 그 긴 세월, 페란 지방의 수도사들은 헐거워진 중앙의 감시 속에서 적당한 자유와 방종을 누렸다.
차라가 코웃음을 치며 열쇠를 돌렸다.
“기대되네요. 반년 뒤에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자물쇠가 철컥, 풀렸다.
차라가 안으로 들어가자, 다른 동행인들도 속속들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기탱천하여 그들을 뒤따르려던 수도원장의 면전 앞으로 방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문이 잠기는 쇳소리가 잇따랐다.
“도련님! 도련님!”
수도원장이 문을 두들기며 마구 외쳤다. 지긋지긋하다는 듯 문 앞에서 떨어진 차라가 그제야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늙은이는 언제 죽나 몰라.”
“팔팔하신 거 보면 아직 먼 것 같은데.”
요슈아가 실실거리며 먼지 쌓인 의자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차라는 불퉁하게 표정을 구겼다.
“내가 페란 공작이 되면 저 늙은이 자리부터 갈아 치울 거야.”
“언제는 공작 같은 거 하기 싫다며?”
“하기 싫으면, 뭐. 너처럼 도망치라고?”
차라와 요슈아가 티격태격하는 사이, 그때껏 문가에 얌전히 서 있던 페기가 느릿하게 로브를 벗어 내렸다.
낡은 방이었다. 죽은 수도원장의 방이라던 설명대로 먼지가 텁텁하게 쌓여 있었으며, 사람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일부러 어질러 놓은 것처럼 각종 서적이며 문서가 너절하게 펼쳐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여긴 왜 온 거야?”
어디서부터 찾아야 할지 막막하던 그녀에게 길을 알려 주리라 단언하던 차라.
그가 마부를 재촉하여 밤낮없이 달려온 곳이 바로 이 이름도 들어 본 적 없는 시골의 수도원이었다.
시작이 이곳이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터.
“샤를로망 프리울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
그러나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페기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천 년 전의 사도시잖아. 갑자기 그건 왜?”
“거기서부터 시작해야 되니까.”
책상에 어지럽게 펼쳐진 서적들을 심란하게 훑어본 차라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가 부활한 이유를 찾아 주고 싶었어.”
그에게로 다가서던 페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분명 네 부활을 의심할 사람들이 있을 테니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고서를 뒤지다가 발견한 게 이거야.”
차라가 낡은 서적을 펼쳐서 내밀었다. 페기는 조심스레 촛불을 비추어 보았다.
빛이여.
그대는 나의 진리, 나의 이상.
멀리 가지 마시오.
그대는 하나뿐인 나의 등불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