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 (267/328)

클레멘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말을 덧붙였다.

“전하의 고민을 더하는 문제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알비야 공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로 말들이 많더군요.”

“종교 재판소에 넘기세요.”

페기는 서신을 봉한 실링을 잡아 뜯으며 선뜻 대꾸했다. 클레멘스가 놀란 듯이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원탁에 맡기지 않으실 겁니까?”

죄를 범한 성직자들은 다양한 경로로 처벌된다. 그중에는 모든 교회 기관의 우두머리인 원탁도 있었지만, 그렇잖아도 논의할 일이 많은 원탁에선 보통 성직자 개개인에 대한 처벌을 하부 기관에 넘기는 것이 관례였다.

한마디로 4년 전, 원탁이 페기에게 화형을 선고했던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알비야 공작에게 복수하자는 것이 아니잖아요. 굳이 원탁에 맡겨서 4년 전 상황을 상기시킬 필요는 없어요.”

“퀴테리아에 이어 알비야 공작까지…. 종교 재판소의 늙은이들은 아주 죽을 맛이겠습니다.”

클레멘스가 킬킬거렸다. 한때 같은 배를 탔던 이들끼리 죽고 죽이는 상황에 직면하였으니, 당분간 성도 오스피나는 이 일로 한동안 떠들썩할 것이었다.

조용히 서신을 읽어 내리던 페기가 클레멘스에게 서신을 건넸다.

“바스토뉴의 족장이 보낸 거예요. 위스누아에 주둔해 있던 용병들을 물리겠다는군요.”

“예?”

황급히 서신을 받아 든 클레멘스가 빠르게 내용을 훑었다.

“바스토뉴에서 일방적으로 위스누아와의 계약을 파기하다니…. 퀴테리아에 이어 알비야 공작까지 무너지는 꼴을 보니 다급하긴 했나 봅니다.”

용병단을 꾸려 먹고 사는 바스토뉴에선 그 무엇보다도 계약의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런 바스토뉴에서 이리 강경하게 나올 정도면, 이제 와 그녀에게 맞서 봤자 아무런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을 터.

“당분간 위스누아를 주시하겠습니다. 가문을 이을 장남은 피살되었고, 장녀와 차녀마저 저 지경이 되었으니 만포르차 가문도 오래가진 못하겠죠.”

“자금줄을 잘 파악하세요. 예후르의 상단이 중계 무역에 개입하면서 위스누아 상단의 수익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다는데, 정작 바스토뉴 용병단과 계약할 땐 상당한 거금을 들였더군요. 아마 필사적으로 자금을 융통하고 있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마차는 곧 클레멘스의 사저 앞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리려던 그가 문득 페기를 돌아보았다.

“미란테 경이 다시 근위대장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네.”

자격을 박탈당한 기존의 근위대를 대신해, 미란테와 그녀가 길러 낸 장미 수도회의 수습 기사들이 새로이 근위대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미란테는 고령의 나이임에도 기쁘게 직무를 받아들였다.

“근위대가 바뀌고, 원탁의 공석에도 곧 새 사람들이 들어오겠군요.”

어쩐지 뜬구름 잡는 목소리였다. 페기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요, 클레멘스 추기경?”

“혹 저와의 약조를 잊으신 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늘진 곳에서 클레멘스의 하나 남은 눈이 번뜩였다. 잠자코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설핏 미소를 흘렸다.

“잊었을 리가요.”

예후르가 교황이 되거든, 모든 권력을 원탁에 이양하고 그저 천사의 증거로서 숭배받을 것.

그것이 사도를 너무나도 우러른 나머지, 사도들에게서 영원히 권력을 빼앗아 그들을 보호하고 싶었던 클레멘스의 요구였다.

“하지만 알잖아요, 클레멘스. 교황 성하께서 아직 성좌를 지키고 계시다는 것.”

페기는 시선을 살짝 내리깔았다.

비올라가 성화를 지피는 데 실패하여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로 레오폴트는 시름시름 앓고 있다고 했다. 그렇잖아도 심신이 미약한 사람에게서 강제로 권력을 빼앗으려 들었다간,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관계마저 완전히 파탄 난 것이었다.

“이해합니다, 전하.”

클레멘스가 미간을 찌푸리며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페기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어차피 성하께서 뒤로 물러나신 지 오래이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원탁에서 중요한 일을 도맡게 될 거예요. 부디 바라시던 대로 조금씩 뜻을 펼쳐 보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마차에서 내린 클레멘스가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멀어지는 그의 등을 창밖으로 지켜보던 페기가 묵직하게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차라리 클레멘스와 각을 세울 정도로 욕심이라도 부리면 좋으련만.

정작 후일에 교황이 되어 원탁에 모든 권력을 이양해야 하는 예후르는 당장 직면한 사안들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얼떨결에 페기가 그를 대신해 일을 도맡고는 있지만, 아무 욕심도 없어 보이는 그의 태도에는 못내 화가 났다.

그만한 능력, 그만한 수완이 아깝지도 않을까.

늘 그가 역사에 남을 훌륭한 교황이 되리라 자부해 왔던 페기는 돌연 변심한 듯한 그의 태도에 속이 갑갑했다. 만일 그가 저를 복권시키기 위해 클레멘스의 그런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라면, 평생토록 그에 대한 미안함을 지우지 못할 것이었다.

거듭되는 고민에 애태우는 사이, 마차가 예고도 없이 멈추었다.

무심결에 창밖을 내다본 페기는 얼굴을 찌푸렸다. 성문을 넘긴커녕, 청백회의 소굴로 이용되던 퀴테리아의 저택 앞에 도착해 있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이리로 모시라 하셨습니다.”

마차의 문을 열어 준 호위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아뢰었다. 그에 페기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마차에서 내렸다.

매일 산으로 들로 쏘다니며 사냥에만 열중하던 치가 갑자기 웬일이람?

속으론 투덜대면서도 못내 웃음이 감추어지질 않았다.

페기는 호위 기사의 안내를 받아 저택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미로처럼 얽힌 저택 내부는 공기의 흐름조차 멈춘 것처럼 고요했다.

“저쪽으로 쭉 가시면 됩니다.”

호위가 일직선으로 이어진 복도를 가리켰다. 페기는 순순히 그의 손짓에 따라 움직였다. 복도의 끝에서 흐린 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페기는 살짝 열려 있던 문을 어깨로 밀며 숨겨진 정원으로 발을 내디뎠다.

그곳은 거대한 중정이었다.

지붕 없이 뚫려 있는 하늘에서 눈부신 볕이 쏟아져 내려오고, 그 아래 우산처럼 펼쳐진 나뭇잎들이 밝은 연둣빛으로 흩날렸다. 페기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중정의 한가운데 자라난 굵다란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그저 문턱을 넘었을 뿐이건만, 완전히 다른 세상에 온 것만 같은 생경함이 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고목을 올려다보던 페기는 불현듯 그 아래 서 있는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주변 경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정.

페기는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살금살금 다가가기로 했다. 그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런데 문득, 싸한 냄새가 콧속을 파고들었다.

페기는 얼결에 멈춰 섰다. 생전 처음 맡아 보는 이상한 냄새였다.

“왔구나.”

뒤늦게 그의 목소리를 인지한 페기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느새 예후르가 그녀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예후르.”

페기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예후르가 가만히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자, 페기는 순순히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뭐 했어?”

“그냥.”

“…이상한 냄새가 나.”

“약초를 태우던 냄새야.”

“약초?”

예후르는 발치에 반쯤 재로 남은 잎사귀들을 가리켰다. 잠시 그것들을 응시하던 페기가 다시 고개를 들어 연한 그늘을 드리운 고목을 올려다보았다.

연두색 나뭇잎 사이로 조각조각 떨어지는 눈부신 햇살.

새 지저귀는 소리조차 저문 사위는 평화롭도록 고요했다. 한동안 밀려드는 업무에 치여 살았던 페기는 인적 없는 자연 속에 들어와 비로소 숨통이 시원하게 트이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이런 평온한 분위기 속에 그와 단둘만 남겨진 것이 도대체 얼마 만의 일이던가.

그녀는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예후르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장인이 공들여 깎아 놓은 석상처럼 비율이 완벽하게 들어맞는 그의 얼굴에는 일상적으로 흔히 드러나곤 하는 감정의 잔재조차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뭇 사람들은 흔히들 그에게서 인간성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며 수군거린다. 어떻게 그리 친밀하게 지낼 수 있느냐. 자주 듣던 질문이지만, 까마득한 어린 시절부터 그와 함께였던 페기에겐 달리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예후르는 그저 그런 사람이었다. 페기는 그런 예후르를 온전히 받아들였을 뿐.

하지만 그런 그녀도 가끔은 묻고 싶을 때가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해?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어?

그 속에 숨기고 있는 것이 대체 뭐야?

“왜 하필 뱀이었어?”

페기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나 스스로 입을 열어 목소리를 냈다는 것조차 한동안은 자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 전의 질문들이 그러하듯 제 속에서 메아리친 소리인 줄만 알았다.

“뱀?”

예후르가 그렇게 되묻기 전까진.

페기는 잔잔한 미소가 올라온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할 곳에 단둘이 남은 우리.

어쩌면 당분간은 찾아오지 못할 기회인지도 모른다. 수많은 의문점들을 굳이 파헤치려 하지 않던 그녀에게 캐물을 변덕이 찾아왔단 점에서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인지도 몰랐다.

망설이던 페기가 용기를 냈다. 속에 담고만 있었던 말들을 조심스레 풀어내기 시작했다.

“뱀 숭배니, 배교자니…. 하필이면 왜 그런 죄를 엮은 건지 모르겠어.”

“그러면 안 돼?”

그는 선선히 반문했다. 페기는 못내 원망스러운 눈으로 그를 흘겨보았다.

“넌 장차 교황이 될 사람이잖아. 안 그래도 네 진심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그 죄목을 뒤집어쓸 필요는 없었어.”

퀴테리아의 위증이 밝혀지며 민심은 다시 급변하였지만, 그에 대한 의혹의 시선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행여 완벽한 그에게 해라도 될까, 페기는 그것이 너무나도 저어되었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나랑 미리 상의를 했어야지. 도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거야? 죽은 사제의 일기나 마부로 위장했던 네 수하도 그렇고….”

불퉁하게 따지던 페기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사제가 죽기 전 세르난도 만포르차에게 서신을 보내 예후르의 비밀에 대해 언급했던 것은 탐보프에서 내전이 벌어지기 직전.

그때 예후르는 사술로 외형을 바꾼 그녀가 페기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직 죽은 그녀의 복수에만 매달렸던 그가 어째서 스스로를 배교자로 조작하는 일을 꾸몄단 말인가.

시기상 맞지 않는다. 불가능하다. 당시의 그에게는 그런 짓을 할 이유가….

“그리고?”

불현듯 예후르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페기는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는 변함없이 입가에 뜻 모를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말을 이어 나갔다.

“뱀의 허물도 그래. 그런 흉측한 걸 어디서 구했길래….”

“그건 진짜야.”

페기는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뭐?”

“진짜 ‘뱀’의 허물이라고.”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노란 볕을 받은 금안이 유독 비늘처럼 번들거렸다. 위기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그의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매혹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뱀’이야, 페기.”

페기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부릅뜬 눈에 흐드러지도록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비쳐 왔다. 숨이 위태롭게 떨려 왔다.

“장난… 치지 마.”

“장난 아니야.”

“재미없어.”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도 아니고.”

그럼 뭔데.

하고픈 말이 덜컥 목 끝에 걸렸다. 페기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뒷걸음질했다. 그의 손 안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손이 스르르 빠져나갔다.

“아니잖아.”

“…….”

“너 아니잖아, 네가 그럴 리가 없잖아. 어떻게 네가….”

정신없이 말을 잇던 페기가 멈칫했다.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마치 발악하는 미물을 지켜보듯, 내리깔린 두 눈에는 짙은 권태와 무료함만이 가득하다.

순간 페기는 솟구쳐 오르는 격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네가 어떻게 그래!”

그녀는 맨몸으로 달려들었다. 우악스럽게 그의 멱살을 잡아 쥐며 악을 썼다.

“네가 어떻게 그러냐고! 네가, 네가 어떻게!”

“페기.”

“나, 날 사랑하잖아!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래! 네가 뱀이면, 나는, 나는 도대체 왜….”

죽어야 했나.

일순 세상이 노랗게 변했다. 안간힘을 다해 그를 밀어낸 페기가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토악질을 했다. 줄줄이 쏟아지는 노란 위액 속에 뼈에 박힌 4년 전의 악몽이 함께 흘러내렸다.

“성화가 꺼졌다!”

“저건 뱀이야! 사특한 뱀을 죽여!”

나는 뱀으로 몰려 죽었다.

너는 그때 무얼 했나.

“…페기.”

그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페기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허공으로 손을 뻗은 그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가만히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문득 페기는 견딜 수 없이 그가 두려워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뱀이라 말하는 것도, 더는 파헤치고 싶지 않은 4년 전의 진실도, 또 무슨 말을 내뱉을지 모르는 그의 입도.

페기는 본능적으로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엔 그에게서 멀어져야 한다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가득했다. 당황한 호위 기사를 지나쳐 정신없이 달리던 그녀는 어느새 저택을 빠져나와 성도의 시가지를 달리고 있었다.

사방에 눈부신 겨울 햇빛이 만개하고,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가득했다.

전부 그녀와는 유리된 것들. 같은 공간에 있으나, 같은 공간에 있지 않았다. 페기는 넘치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 내며 자꾸만 벗겨지려는 로브의 모자를 깊숙이 끌어내렸다. 그녀는 한 군데 머무를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흔들리는 마음이 지친 발을 계속 재촉했다.

그렇게 숨이 턱에 닿도록 달리던 중에 별안간 돌부리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형편없이 나뒹군 페기가 신음을 흘리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이 로브를 풍성하게 부풀리며 숨겨져 있던 은빛 머리칼을 드러냈다.

어느새 그녀는 성문을 넘어 있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광막하도록 드넓은 들판과 저 멀리 지평선에 걸친 오래된 석조 저택.

페기는 간헐적으로 흐느끼며 먼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는 새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세상은 변한 것이 없는데, 그녀를 둘러싼 모든 것이 바뀐 것만 같았다. 지금껏 악착같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이 실은 죄다 무의미하다는 선고라도 내려진 것처럼.

페기는 차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가만히 눈을 내리감았다.

바람은 끊임없이 불어왔다.

들판은 끊임없이 물결치고, 그녀는 들판 한가운데 의지할 곳 없는 잡초처럼 흔들린다.

맥없이, 속절없이, 부질없이….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페기는 뻐근하게 아파 오는 몸을 간신히 일으켜 세웠다. 그사이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힘없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이곳이 그녀의 침실임을 깨닫는다.

누가, 어떻게, 하는 의문은 소용없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 되는 대로 옷을 껴입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침대맡에 잠들어 있던 마샤를 지나쳐 소리 없이 침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라만의 숙소였다.

“어딜 가시겠다고요?”

자다 깬 라만이 까치집이 된 머리를 헤집으며 조금 짜증스럽게 물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부담스럽습니다. 왜 하필 접니까?”

“당신 하나만 예후르의 부하가 아니니까.”

라만이 멈칫하며 그녀를 보았다. 페기는 망토를 여미며 몸을 반쯤 틀었다.

“빨리 준비하고 나와요. 아무도 모르게 빠져나갈 거니까.”

문틈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라만이 잇새로 욕설을 내뱉으며 후다닥 서랍장을 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준비를 끝마친 라만과 함께 저택을 빠져나왔을 때는 아직 새벽이 오지 않은 이슥한 시간이었다.

라만은 횃불을 들고 마구간에서 두 필의 말을 끌고 왔다. 그중 순한 말의 고삐를 건네 받은 페기가 등자에 발을 올리려는데, 별안간 암흑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짐승이면 다 무서워하는 게 승마는 무슨 승마야.”

페기는 설핏 미간을 찌푸리며 어두운 정원을 들여다보았다.

“…안드레아?”

“그래, 안드레아다.”

횃불 속으로 고개를 들이민 안드레아가 그녀의 초라한 행색을 훑어보곤 혀를 끌끌 찼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런 꼴로 어딜 간다고?”

“여긴 어떻게….”

빠르게 속삭이던 페기가 안드레아의 등 뒤에서 걸어 나오는 차라를 발견하곤 입을 다물었다. 차라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언덕 아래에 마차 준비해 놨어. 거기로 가자.”

차라는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심결에 그들을 따라가려던 라만이 미동 없는 페기를 발견하곤 멈추어 섰다. 안드레아와 차라도 의아한 기색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너희가 왜 여기 있어?”

페기가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꼼짝도 하지 않을 기세였다.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주고받은 안드레아와 차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여기 있긴. 너 잘 좀 보살펴 달라는 부탁을 듣고 왔지.”

“부탁? 누가?”

“누구겠냐?”

안드레아가 심드렁하게 저택을 턱짓했다. 익히 예상했던 대답이지만, 심사가 복잡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페기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자, 아닌 척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던 안드레아가 넌지시 물어 왔다.

“싸웠어?”

“…….”

“야, 싸웠으면 저 새끼가 꺼져야지, 왜 네가 꺼져? 하여간에 마음만 약해선….”

“그런 거 아니야.”

단호한 대꾸에 안드레아는 머쓱한 기색으로 뒷머리만 벅벅 긁었다. 그녀는 마차를 살펴보겠다는 핑계를 대며 라만을 홀랑 데리고 가 버렸다.

졸지에 페기와 단둘이 남겨진 차라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곁눈질만 하다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페기는 얼어붙은 차라를 보고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난 괜찮으니 가 봐. 너까지 고생할 필요 없어.”

“아, 아냐! 나도 같이 갈래!”

“괜찮다는데도.”

“그게 아니라….”

쫄래쫄래 다가온 차라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예후르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아보려고 가는 거지?”

순간 페기의 고개가 번개처럼 돌아갔다.

“네가 그걸 어떻게….”

“그냥, 어쩌다 보니 알게 됐어.”

어색하게 뒷목을 긁적이던 차라가 짐짓 표정을 굳혔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잖아. 내가 도와줄게.”

말문이 막힌 페기가 아연한 표정으로 입술만 벙긋거렸다. 그러나 차라는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이 그녀의 손을 잡고 언덕 아래로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얼결에 그를 따라 달리던 페기가 다급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둠에 잠긴 저택의 문 앞에 누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페기는 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이것이 너의 뜻이라면.

그녀는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불어오는 바람을 꿰뚫고, 바람 따라 일어나는 들풀을 짓밟으며.

멀리 언덕 아래에서 안드레아가 손을 흔들었다.

아스라한 달빛이 그들의 앞을 비춰 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