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한 오르간 연주 소리는 계속된다.
페기는 천천히 빈 횃대로 손을 올렸다. 심상치 않은 기미를 눈치챈 주임 사제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전하, 아직 시험이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페기는 설핏 웃는다. 시작되지 않은 것이 대수란 말인가. 이토록 간단한 것인데.
횃대를 떠나는 그녀의 손 아래로 불씨가 피어올랐다.
장내를 엄숙하게 울리던 오르간 연주 소리가 우뚝 멈추었다. 무덤 같은 적막만이 흐르는 가운데, 페기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황급히 달려오던 주임 사제마저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맥없이 그녀를 떠나보낼 뿐이었다.
페기는 이제 단상의 가장자리에 엉거주춤 선 비올라에게로 다가간다. 멍하니 그녀를 응시하던 비올라는 성큼 가까워진 거리를 불현듯 깨닫곤 표정을 굳혔다. 경계하는 기색이 다분했다.
그러자 적당히 멈추어 선 페기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비올라의 얼굴에 잠시 아연해하는 기색이 비껴갔다. 내밀어진 그녀의 손과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면서도,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페기는 눈썹을 까딱이며 마치 재촉하듯, 내민 손을 작게 흔들었다.
움찔한 비올라가 슬며시 눈을 굴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장내의 모두가 석상처럼 엄숙한 표정으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결국 비올라는 마지못해 발걸음을 뗐다. 한 발, 두 발…. 질질 끌려가듯 다가간 비올라가 머뭇거리며 페기의 손을 잡은 순간이었다.
잡힌 손이 쑥 당겨지며 그녀의 몸이 페기에게로 기울었다. 비올라가 당황하여 입을 벌렸다.
“무, 무슨 짓…!”
“네 오라비.”
“…….”
“내가 죽였어.”
비올라의 만면에서 혈색이 빠져나갔다. 페기는 꽉 잡았던 비올라의 손을 미련 없이 놓아 주곤 바람처럼 그녀를 스쳐 지나갔다. 우두커니 서 있던 비올라가 핏기 없는 얼굴로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입술이 달싹이고, 눈가가 경련했다.
한순간에 폭발한 비올라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아, 알비야 공작 전하!”
경악한 병사들이 달려와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 사이로 간신히 손만 내뻗은 비올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거기 서! 멈추란 말이야!”
“진정하십시오, 전하!”
“멈춰!”
페기는 살래살래 고개를 흔들며 성당의 중앙 통로를 가로질렀다. 양옆에 앉아 있던 고위 성직자들이 눈으로만 멀거니 그녀를 좇았다. 수십의 시선을 매단 채로 그녀는 성당의 문 앞에 도착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예후르가 서 있었다.
까만 머리, 어깨에 두른 까만 망토. 내리쬐는 볕을 모조리 흡수할 것만 같은 그가 가만히 손을 내민다.
페기는 가벼이 그의 손을 잡았다.
걸어 나가는 그들의 등 뒤로 대성당의 문이 거대한 쇳소리를 내며 닫혔다. 피를 토하는 듯하던 비올라의 비명 소리마저 한순간 성당에 집어 삼켜졌다.
17
“퀴테리아 추기경은 제 존재를 알고 있었습니다.”
에피파나 수도사의 여리지만 단단한 목소리가 재판장 안을 가득 울렸다.
“보나벤투라… 그자가 종종 언급하곤 했으니까요. 퀴테리아 추기경도 너를 마녀라 했다, 너는 선량한 사람을 유혹하는 마녀이며 자신은 마녀로부터 세상을 수호하는 옥지기라고…. 솔직히 그때는 믿지 않았습니다. 갇혀 살았지만 퀴테리아 추기경이 얼마나 단호하고 엄격한 인물인지는 저도 조금은 들어 알았으니까요.”
“…….”
“하지만 그녀가 절 보러 왔을 때, 그것이 순전 제 착각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장내가 술렁였다. 진지하게 증언을 경청하던 재판관이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퀴테리아 추기경과 직접 대면한 적이 있단 말입니까?”
“네.”
에피파나 수도사는 초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보나벤투라가 저를 아주 많이 때린 날이었습니다. 평상시에도 손찌검이 잦은 자이긴 했지만, 그날은 유독 심했지요. 저는 매질을 견디다 못해 죽은 듯이 잠들었는데, 설핏 잠에서 깨고 보니 누군가 침대맡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두운 방 안. 검은 형체로만 보이던 누군가의 뒷모습.
“제가 깨어난 것을 알아채더니, 본인을 만포르차의 퀴테리아라고 소개하더군요.”
어디선가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에피파나 수도사는 개의치 않고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 저택 지하에 감금된 이래로 외부 사람을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게다가 퀴테리아 추기경이라니요. 그때의 저는 진정 하늘의 천사께서 저를 구하러 내려오신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퀴테리아 추기경을 붙잡고 울면서 애원했었지요. 보나벤투라는 사람의 탈을 쓴 악귀이며, 나는 마녀가 아니라 당신과 마찬가지로 천사를 모시는 신실한 수도자라고….”
“…….”
“그러자 퀴테리아 추기경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에피파나 수도사가 버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너의 고통은 내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보나벤투라의 역할이 아직 남아 있으니, 대의를 위해 네가 조금만 더 참아다오. 내 뜻이 이루어지면 기필코 보나벤투라를 벌하고 말 것이다.”
이것저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에피파나 수도사는 서러움이 묻어나는 눈으로 천천히 퀴테리아를 돌아보았다.
“대체 그 대의란 것이 무엇입니까?”
“…….”
“얼마나 중요한 뜻을 지니셨기에 제 고통을 외면하신 건가요?”
성난 관중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퀴테리아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분을 못 참고 돌을 던지는 자들도 있었다.
점차 아수라장이 되어 가는 재판장.
로브를 깊게 눌러 쓴 페기는 구석 자리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아슬아슬하게 퀴테리아의 발치로 떨어진 돌멩이를 보고 지레 놀란 클레멘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확실히 민심은 떠난 것 같습니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쪽에 모여 앉아 있는 청백회 단원들을 슬쩍 곁눈질했다.
대부분이 젊다 못해 어린 수도사들인 그들은 혼란이 가득한 표정으로 멍하니 주저앉아 있었다. 증거를 조작하여 사도를 음해하였음이 밝혀진 시점에서도 퀴테리아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저버리지 못하던 이들까지 흔들리게 할 정도로, 에피파나 수도사의 증언은 파급력이 컸다.
“죄를 입증하긴 힘들겠죠?”
“예. 아마도….”
이제 에피파나 수도사가 퇴장하고, 오르코가 증인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 역시 퀴테리아가 그들을 만나기 위해 보나벤투라의 사저를 방문했던 것을 증언하겠지만, 불행히도 일방적인 증언만으로는 그녀의 죄를 입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상관없다.
죄목이 추가되지 않더라도 퀴테리아는 이미 중죄를 범한 죄인이므로.
페기는 느른하게 의자에 기대어 앉았다.
오르코와 에피파나 수도사는 비장의 수였다. 그러나 일단 터지면 거대한 파급력을 몰고 올 것과는 별개로 실질적인 처벌을 유도해 내긴 힘들었다. 구태여 알틴을 이용해 어렵사리 퀴테리아의 죄를 조작한 것은 그런 연유에서였다.
처벌은 다른 죄로 이루되, 퀴테리아에 대한 신뢰는 오르코와 에피파나 수도사의 증언으로 확실하게 무너트릴 것.
실제로 몇 안 남은 청백회 단원들은 혼란에 빠졌으며, 시민들은 퀴테리아를 믿었던 만큼 더욱 거세게 분노하고 있었다. 성화를 지피는 데 실패한 알비야 공작이 별궁에 감금되어 처벌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이 성도 전체에 파다하니, 퀴테리아로서는 마지막 희망마저 바스라지는 순간일 터.
페기는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재판은 더 볼 것도 없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재판장을 나오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전령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페기는 전령에게서 서신을 받아들곤 곧장 마차에 올라탔다.
그녀를 따라온 클레멘스가 마차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물었다.
“보나벤투라를 어떻게 처결할지는 결정하셨습니까?”
서신의 봉투를 뒤집어 보던 페기가 잠시 멈칫했다. 클레멘스는 의아한 기색을 내비쳤다.
“에피파나 수도사와 오르코에게 의견을 묻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물어 봤어요.”
“뭐라고 대답하던가요?”
페기는 봉투 끝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내 뜻에 따르겠다더군요.”
“죽이시든, 살리시든.”
“그저 다시는 볼 수 없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복수를 원하지 않습니까?”
“저희가 원하는 것은 오직 평온한 삶입니다.”
페기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무덤에서 기어 올라온 그녀가 끝끝내 지금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날 이렇게 만든 자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복수심과 어떻게든 내 자리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욕망이었다.
그래서 저의 암살을 사주한 아나클레토를 죽였고, 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비올라를 무너트렸다. 그녀에게 평온한 삶이란 그렇게 해야만 얻을 수 있는 승리의 부산물이었다.
“에피파나 수도사와 오르코는 이름과 신분을 바꾸어 카타리나 지방에 은거하기로 결정되었지요. 만일 보나벤투라를 살려 두시겠다면, 평생 감시를 붙이는 것은 불가피하니 두 사람과 떼어 놓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살려 두어야 할까요?”
“…제 의견을 물으시겠다면야.”
클레멘스가 하나 남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살려서 이득 될 것이 없는 자입니다. 죽이십시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불현듯 피식거리며 웃었다.
“보나벤투라를 감당하느라 많이 힘든 모양이죠?”
“말도 마십시오. 감시를 맡은 병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찾아와 한탄하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아내와 아들을 만나게 해 달라 독촉하고 있다고요. 도대체 언제부터 아내고 아들이었는지….”
클레멘스가 투덜거렸다. 작게 웃기만 하던 페기가 창밖을 내다보며 넌지시 대꾸했다.
“보나벤투라에 대한 처결은 그대에게 맡길게요. 마음대로 처리하세요.”
“혹 그자를 죽이고 싶지 않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닌데….”
페기는 장대비가 쏟아지던 어두운 밤을 멍하니 떠올렸다.
숨 막히도록 피어오르던 습기, 처참하게 부서지던 오른손, 꿰뚫린 심장… 그리고 눈 감을 때까지도 잊지 못했던 본시오의 저주스러운 낯짝.
“아직 잘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손에 쥔 것이 없어 악으로 버티던 때는 도리어 결정이 쉬웠다. 하지만 본래의 자리로 돌아와 많은 것을 누리게 되자, 이전이라면 들은 척도 안 했을 오르코의 말이 자꾸만 귓가를 맴돌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시는군요.”
클레멘스가 유심히 그녀의 안색을 들여다보았다.
“보나벤투라는 제 선에서 깨끗하게 처리할 테니, 전하께선 전하의 고민을 하십시오. 먼 옛날 위대한 사도 샤를로망 프리울리께서 이르시길, 고민은 산 자의 특권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유쾌한 목소리에 조금은 힘이 났다. 페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서신의 봉투를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