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앉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바쁘게 눈빛만 주고받던 클레멘스와 글리체리아가 별안간 반색하며 손을 흔들었다.
“오, 엘피도 공작 전하! 여깁니다!”
검은 모피를 두른 예후르가 맞은편에서 느긋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클레멘스가 다소 경박스러울 정도로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전하! 도대체 이게 얼마 만에 뵙는 겁니까!”
“재판장에서 여러 번 뵈었을 텐데요?”
“그때야 묶여 계신 전하를 제가 일방적으로 뵈었던 것이고요.”
클레멘스가 환하게 웃으며 뒤쪽에 있는 페기를 눈짓했다. 예후르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안녕, 페기.”
“…….”
페기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누가 봐도 뚜한 표정으로.
“왜 그렇게 빤히 보니?”
“…그냥. 오랜만이다 싶어서.”
종교 재판소에서 풀려난 뒤, 뒷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하라며 사라졌던 그는 이후로 머리카락 하나 보이질 않았다. 듣기로는 산으로 들로 열심히 쏘다녔다는데, 그가 자연 속에서 여유를 만끽하는 동안 페기는 밀려드는 일거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래서 사냥은 잘 했어?”
누가 들어도 빈정거리는 투였다. 사이에 낀 클레멘스와 글리체리아가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는 가운데, 예후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잡았지.”
“뭘 그렇게 많이 잡았어?”
“비둘기.”
“비둘기?”
페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예후르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갑자기 처량한 척을 했다.
“그런데 잡고 싶었던 비둘기는 못 잡았어.”
“저, 엘피도 공작 전하. 목소리를 조금 낮추심이….”
글리체리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성도에서 새 사냥이 금지인 이상, 다른 곳도 아니고 성궁 한복판에서 대놓고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일단 얘기는 다 끝나고 해.”
페기가 싸한 눈으로 그를 훑고 지나갔다. 그러길래 왜 그녀의 성질을 건드렸냐는 듯 클레멘스가 질책하는 눈빛을 쏘았으나, 예후르는 뭐가 그리도 즐거운지 웃고만 있을 따름이었다.
“먼저 들어가. 나는 볕을 조금만 더 즐기다 갈게.”
예후르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그를 째려보던 페기가 휙 고개를 돌렸다. 클레멘스와 글리체리아가 다급히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성 나르세스 광장은 다시금 한산해졌다.
홀로 남겨진 예후르는 드넓은 광장을 한가롭게 거닐며 볕을 쬐었다. 순백의 대리석을 깔아 만든 성 나르세스 광장은 내리쬐는 햇볕과 날카로운 반사광이 뒤섞여, 날 좋은 낮이면 이렇듯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정도로 환하게 빛나곤 했다.
그때, 가까이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예후르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대리석만큼이나 희게 질린 비올라가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당신이 오라버니를 죽였어.”
예후르의 눈이 조금 지루하게 가라앉았다. 비올라는 이를 까득 갈았다.
“죄 없는 오라버니를 죽이고, 이젠 언니까지…!”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죽였는지 잘 모르겠어.”
비올라가 멈칫 굳었다. 예후르는 모피에 묻은 먼지를 털어 내며 단조롭게 말을 이었다.
“무서워서 숨어 버렸는지, 부하들만 밖으로 내보내고 본인은 지하 감옥에서 나오질 않았거든.”
“뭐, 뭐라고?!”
분노한 비올라가 온몸으로 달려들어 그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예후르는 어렵지 않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주제넘는 짓 하지 마, 비올라.”
“주제넘은 건 너야! 감히 만포르차의 적자를 욕보이고도 무사할 거라고 생각해?!”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닌데.”
예후르가 표정 없는 얼굴로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네가 왜 예리엘의 선택을 받았는지 알아?”
비올라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또다시, 몰이해의 사슬이 그녀의 숨통을 조여 왔다. 그녀는 차라리 이어질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네가 퀴테리아의 자매이기 때문이야.”
“…….”
“네가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비올라의 아랫입술이 경련하듯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안색에 파리한 빛이 감돌자, 예후르는 미련 없이 손목을 놔 주었다.
“그만 들어가야지. 기다리고들 있을 텐데.”
“너, 너….”
비올라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그를 삿대질했다. 예후르는 느른한 표정으로 그녀의 등 뒤를 눈짓했다. 성 예리엘 대성당 앞에서 한 수도사가 소리 높여 그녀를 부르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온몸을 떨어 대던 비올라는 끝내 하녀들의 부축을 받아 비틀비틀 걸어갔다. 예후르는 그제야 무료하게 시선을 돌렸다.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저 멀리서 날아오는 새 떼를 자세히 들여다보려던 그가 별안간 번개처럼 고개를 돌렸다.
멀어지는 비올라의 뒷등.
소매에 반쯤 가려진 그녀의 손끝에서 미약한 불씨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흐음….”
예후르가 느릿하게 팔짱을 끼며 인상을 구겼다.
페기는 서먹한 눈으로 성당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성 예리엘 대성당.
다른 일곱 대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원형의 돔에 직사각형 통로를 덧붙인 열쇠 구멍의 구조. 다만 유별날 정도로 빽빽하게 칠한 순백의 벽면에선 한 치의 오점도 용납할 수 없다는 고집이 느껴졌고, 색색의 유리를 끼워 넣은 스테인드글라스에선 보는 사람을 질리게 만드는 장엄함마저 흘렀다.
다른 일곱 대성당이 그러하듯, 이 역시 이름을 딴 소명의 천사 예리엘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천사에 대한 숭배와는 별개로 여덟 천사들의 개별적인 이야기는 일절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 관계로, 천사들은 대개 그들이 선택했던 사도들의 집합체로 형상화되었다.
이를테면, 수는 적어도 대대로 강력한 권능을 보였던 천사 미할리나의 사도들.
뱀을 봉인했던 야누비타 1세나 뱀을 죽인 수사의 예후르 같은 경우들이 모여, 미할리나는 보통 가장 강력한 천사로 인식된다. 그를 상징하는 성 미할리나 대성당은 자연히 백방의 귀물들로 장식된, 세상에서 가장 장엄한 성당으로 완공되었다.
반면에 천사 예리엘의 사도들은 역대 성가의 가보로만 헤아려도 가장 많은 수를 자랑했다. 오랜만에 천사 예리엘의 사도로 나타났던 페기를 제외하면, 약 300년 전까지만 해도 예리엘의 사도들을 대를 이어 꾸준히 발현하곤 했다.
수가 많은 만큼 출신이나 성품은 제각각이었지만, 그들의 일생은 대개 비슷했다.
천사 미할리나의 사도들처럼 거대한 업적을 남기거나 천사 마그누스의 사도들처럼 용맹함을 떨치는 것은 그들의 몫이 아니었다. 천사 예리엘의 사도들은 중앙 교회에 몸을 담는 대신, 지방으로 내려가거나 전 대륙을 순회하며 몸소 빈자들을 돌보았다. 신앙, 봉사, 자애. 이런 단어들이 그들의 이름 뒤로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그들의 소명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명의 천사 예리엘께서 자신의 아들딸들에게 신앙에 매진하며 빈자들을 돌보는 것을 그들의 소명으로 정하신 것이라고. 또한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천사를 섬기고 자신의 본분을 다함이 너희들의 소명이라 일깨우는 것이야말로 그들의 소명이라고.
그리하여 성 예리엘 대성당은 순백이다. 금칠조차 하지 않고 온통 순백으로 칠해 놓은 것은 결국에 모든 것이 천사 예리엘에게로 귀결되는 지난 사도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들의 소명, 그들을 따르는 백성들의 소명 모두 예리엘께서 정하신 바이니.
그렇다면 나의 소명은 무엇인가.
페기는 웅장하게 울려오는 오르간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때 그녀는 음악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다. 언젠가 들었던 천사의 장중한 음성을 뭇 사람들에게도 들려주어 천사의 존재감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그로써 세상의 신앙을 더욱 드높일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손이 망가진 지금에 와서는 무엇을 소명으로 삼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녀는 해야 할 일이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었지만, 그것을 소명으로 삼아도 될지에 대해선 확신을 갖지 못했다.
사도의 소명이란 곧 천사께서 내려 주시는 사명.
그것을 과연 그녀 개인의 욕망으로 채워도 되는 걸일까.
“전하.”
가까이서 글리체리아의 소곤거림이 들려왔다. 그녀를 돌아보려던 페기는 문득 반대편 통로를 통해 단상으로 올라가는 비올라의 모습을 발견했다.
“참관하려는 인원도 이것으로 끝일 것 같습니다.”
대성당 내부는 여전히 한산했다. 원탁 추기경들과 현재 성도에 머물고 있는 고위 성직자들이 체면을 세워 주었으나, 군데군데 텅 비어 있는 자리들은 어쩔 수가 없었다.
“…성하께서는 안 오시겠지요?”
페기가 비어 있는 성좌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글리체리아는 그저 난감한 기색으로 시선을 피했다.
페기의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레오폴트는 4년 전 너를 버린 나를 용서해 달라며 눈물로 애원해 왔다.
하지만 과연 지금도 그럴까.
그녀는 양자택일을 강요하여 다른 딸을 버리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어쩌면 눈물로 용서를 구해야 하는 사람은 이제 그녀인지도 몰랐다.
멀리 단상 위에서 성 예리엘 대성당의 주임 사제가 눈짓을 보내 왔다. 페기는 쓰디쓴 감정들을 씹어 삼키며 계단 위로 발을 올렸다.
결국에 선택하고 행동한 것은 그녀의 자의였다. 죄책감에 시달릴지언정, 후회에 발목이 잡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안 되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단상 위로 올라가려는데, 별안간 억센 손아귀에 팔이 잡혀 뒤로 돌려세워졌다. 페기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예후르…?”
어느새 다가온 그가 굳은 얼굴로 단상 위를 노려보고 있었다. 페기는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보았다.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는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있는 비올라가 있었다.
“…내가 과소평가했는지도 몰라.”
“뭐?”
예후르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어쩌면 내 예상이 틀렸는지도….”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페기가 다시 고개를 돌려 비올라를 보았다. 얼핏 의연해 보이던 비올라는 실상 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달 떨고 있었다.
“불을 피울 것 같아?”
시험은 막바지였다.
만약 그녀에 이어 비올라까지 불을 피운다면, 겨우 안정되었던 성도는 다시금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터.
“…확실치는 않아.”
“어떻게 해야 돼?”
“집중을 못 하게 막아야지.”
예후르는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성당의 내부를 돌아보았다. 어떻게든 방안을 마련하려는 듯 보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그의 어깨 위로 살며시 손을 올렸다.
“내가 알아서 할게.”
그의 시선이 멈칫하며 돌아왔다. 페기는 곧장 몸을 돌려, 성화대가 꽂혀 있는 단상의 중앙으로 거침없이 나아갔다.
타오르는 성화 양옆으론 두 개의 빈 횃대가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페기는 잠시 그 앞에서 활활 타오르는 성화를 응시했다.
4년 전, 이유 없이 꺼졌던 불.
그러나 비올라와 함께 다시 등장한 불.
“…카타리나 공작 전하?”
종을 울려 시험이 곧 시작한다는 것을 알리려던 성 예리엘 대성당의 주임 신부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 왔다. 페기는 대꾸 없이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듬성듬성 앉은 고위 성직자들이 멀뚱하게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