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3화 (263/328)

달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몰래 바람을 쐬러 나온 척 지하 감옥에서 올라온 옥지기가 좌우를 곁눈질하며 슬그머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간은 얼마 못 줍니다.”

그러자 골목의 어둠 속에서 흰 손이 튀어나왔다. 황급히 돈주머니를 낚아챈 옥지기가 입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더니 인상을 썼다.

“이걸론 안 되지. 더 없어요?”

잠잠하던 흰 손이 다시금 금화를 내밀었다. 옥지기는 그제야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골목 안으로 사라졌다.

옥지기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사위는 다시 고요해졌다. 비올라는 흰 손으로 로브를 여미며 조심스레 골목을 빠져나왔다. 지하 감옥의 입구를 응시하는 그녀의 눈에 얼핏 두려움이 서렸다.

기회는 지금뿐이야.

비올라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발밑을 밝히는 횃불, 군데군데 쳐진 거미줄과 어렴풋이 들려오는 쥐의 울음소리…. 비올라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발을 재게 놀렸다.

“어, 언니?”

용기 내어 입을 열어 보았지만, 그녀의 목소리만이 아득하게 울릴 뿐이었다.

“언니?”

“…….”

“언니….”

비올라는 아스라한 어둠에 휩싸인 정면을 어렵사리 바라보았다.

분명 이 감옥이라고 했다. 설마 그 못된 놈들이 그새 언니에게 몹쓸 짓이라도 한 것이라면….

“언니!”

“…전하.”

가까이서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비올라는 반색하며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황급히 달려갔다.

“언니세요? 퀴테리아 언니?”

“…오셨군요, 전하.”

창살을 움켜쥔 비올라의 손에 익숙한 온기가 닿아 왔다. 비올라는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언니….”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어찌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십니까.”

창살 사이로 뻗어 나온 퀴테리아의 손이 차분하게 비올라의 눈물을 닦아 갔다. 비올라는 훌쩍이며 입술을 달달 떨었다.

“저, 전 지금 이게 당최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왜 언니께서 이런 곳에 갇혀 계신 거죠? 분명 전 언니의 말씀대로 성하를 뵈러 갔었는데…. 분명 성하께서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는데, 왜 이런 일이….”

“함정에 걸린 것이지요.”

“빠져나오실 수 있나요?”

비올라가 간절하게 물었다. 묵묵부답이던 퀴테리아가 창살을 움켜쥔 비올라의 손을 다시금 부드럽게 쓸었다.

“곧 세 번째 시험이 열린다고 들었습니다.”

애처롭게 무너져 있던 비올라의 표정이 일순 딱딱하게 굳었다. 퀴테리아는 비올라의 손을 힘껏 감싸 쥐며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가 이렇게 된 이상, 어떻게든 전하께서 지금의 자리를 유지하고 계셔야 합니다. 그래야만 후일을 도모할 수 있어요.”

“하, 하지만 저는 불을 피우지 못….”

비올라는 울렁거리는 속을 참지 못하고 다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사랑하는 언니, 지지 세력인 청백회, 위스누아의 가족들…. 모두의 미래가 그녀에게 달려 있었다.

“그러면 일단 시험을 미뤄야지요.”

퀴테리아가 창살 가까이로 얼굴을 붙이며 속살거렸다.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전하께서 해내셔야만 해요.”

“제가요…?”

비올라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하, 하지만 성하께선 이제 절 보려 하지 않으세요. 저도 감금되었고요. 오늘도 하녀와 옷을 바꿔 입고 간신히 성궁을 빠져나온 것인데….”

“성하께서 전하를 보지 않으시겠다면 다른 분을 부르셔야지요.”

퀴테리아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잠시 고민하던 비올라가 머뭇머뭇 자신 없는 기색으로 물었다.

“혹… 솔란지아 추기경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빌헬미나의 꼭두각시는 스스로 뭔가를 결정하는 법이 없지요. 지금쯤 두문불출하며 미에투넨의 연락만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럼 도대체 누구를….”

초조해진 비올라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교황이나 원탁 추기경의 도움이 절실했다. 만일 양측 모두 그녀를 외면한다면, 그들에게 영향력 있는 사람이라도 꾀어내어야….

“이제야 좀 감이 잡히시는 모양이군요.”

퀴테리아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비올라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그 애가 성궁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상냥하신 분이죠. 전하께서 초대하신다면 거절하지 못하실 겁니다.”

“또한 저를 감금하고 있는 버러지 같은 군사들도 감히 그 앞을 가로막지 못할 테고요.”

비올라가 치맛자락을 털며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리세요, 언니.”

“…….”

“제가 반드시 이 더러운 감옥에서 꺼내 드릴 테니.”

어둠 속에서 비올라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퀴테리아는 순순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마차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차라는 문득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저게 뭐야?”

똑같이 시체처럼 늘어져 있던 요슈아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뭐가….”

“저거. 연기잖아.”

“연기?”

끙끙거리며 좌석을 딛고 일어난 요슈아가 창밖을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진짜네? 무슨 일이라도 났나?”

창문 앞에서 옹기종기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추리에 열중하던 두 소년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성도의 중심부로 들어갈수록, 군데군데 무너진 건물들과 맥없이 길가에 늘어져 붕대를 교체하는 부상병들의 모습이 보였다. 성도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후 폭주할 것처럼 달리기 시작한 마차는 순식간에 성궁 안으로 들이닥쳤다. 말이 멈추기 무섭게 마차에서 튀어나온 차라와 요슈아는 성직자와 하인들을 밀치며 정신없이 내전으로 달음박질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정변이라니!”

겨우 처소에 도착해 그간의 사정을 소상히 전해 들은 차라는 열불을 냈다. 아무리 성도를 떠나 있었기로서니 고작해야 한 달도 안 되는 시간이었는데, 일이 이 지경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페기는! 예후르는! 다 어디 있어!”

“그, 그것은 저도 잘….”

“젠장!”

분을 참다못한 차라가 발을 세게 굴렸다. 굳은 얼굴로 창밖을 내다보던 요슈아가 슬그머니 다가와 속삭였다.

“근위대가 없어.”

“…뭐?”

멈칫한 차라가 횃불을 들고 창밖을 돌아다니는 병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얼핏 보이기로도 근위대의 갑옷은 아니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야….”

“일단 성하께 가 보자. 그분이라면 뭔가 알고 계시겠지.”

요슈아의 말에 차라는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때마침 하녀가 달려와 허리를 깊게 숙이며 고했다.

“도련님,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긴히 뵙고자 하십니다.”

“나중에.”

급하게 문턱을 넘으려는 차라를 하녀가 온몸으로 가로막았다.

“꼭 지금 모셔 오시랍니다.”

불시에 저지당한 차라가 당혹스러운 나머지 입술만 벙긋댔다. 대신 요슈아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섰다.

“지금 이게 무슨 무례야?”

“부탁드립니다, 도련님.”

하녀가 하얗게 질린 입술을 간신히 달싹였다.

“만약 도련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본인의 손목을 그어 버리시겠다고….”

그렁그렁한 하녀의 눈을 멀거니 응시하던 차라가 불현듯 헛숨을 내뱉었다.

“질린다, 진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린 차라가 비올라의 처소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하녀는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종종거리며 그의 뒤를 따라붙었다. 오직 요슈아만이 마뜩찮은 기색으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야밤의 내전은 싸늘하리만치 고요했다.

시든 화초의 잎사귀가 정원 근처에서 나부꼈고, 어둠에 잠긴 창밖으로는 간혹 순찰대의 횃불만이 아른거렸다.

차라는 오스스 소름이 돋아나는 목덜미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4년 전 페기가 죽은 뒤로 내전은 늘 무덤처럼 적막하였으나, 이토록 음산한 분위기가 감도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위기가 어째 요상하지.”

뒤따라오던 요슈아가 소리 죽여 이죽거렸다.

비올라의 처소 앞에는 근위대가 아닌 낯선 병사들이 무장하고 서 있었다. 다가오는 차라를 발견한 병사들이 무기를 꺼내려 하자, 하녀가 급히 달려가 고했다.

“차라 도련님이십니다.”

병사들이 흠칫 굳었다. 그럼에도 선뜻 물러서는 기색이 없자, 요슈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안 비키면 교황 성하께 갈 겁니다.”

병사들은 그제야 미적거리며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 하녀가 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침울하게 안으로 들어서던 차라가 멈칫 굳었다.

오밤중에 어울리지 않도록 화려하게 치장한 비올라가 문 앞으로 그를 마중 나와 있었다.

“안녕, 차라.”

비올라의 푸른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당황한 차라가 말을 조금 더듬었다.

“어, 어….”

“이리 와서 앉으렴. 다과를 준비해 놨어.”

비올라가 등 뒤의 소파와 탁자를 눈짓했다. 촛불로 영롱하게 밝혀 놓은 탁상에는 타국의 진귀한 다과들이 올라 있었다.

“시간이 조금 일렀으면 식사라도 대접했을 텐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되었네. 부디 마음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이 상하긴….”

차라가 눈도 못 마주치고 어물거리자, 비올라는 설핏 웃었다. 우아하게 뒤를 도는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짙푸른 공단 드레스가 아름답게 물결쳤다.

비올라를 따라 어기적어기적 소파로 가던 차라가 의외의 물건을 발견하곤 멈춰 섰다. 치맛자락을 갈무리하며 상석에 앉던 비올라가 그 모습에 새처럼 웃었다.

“예전에 네가 미에투넨에서 사 온 선물이잖아. 늘 그곳에 두고 볼 때마다 네 생각을 했단다.”

“아….”

차라가 한없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미에투넨의 공방에서 구입했던 못생긴 인형.

멋쩍은 기분에 괜히 인형을 만지작거리던 그는 인형이 놓여 있던 장식장 바닥에 남아 있는 원형의 자국을 발견했다. 눈을 짧게 깜박인 차라가 자국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꽃병처럼 둥근 모양의 물체가 오랫동안 그리고 최근까지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흔적.

“차라?”

느닷없이 들려오는 목소리에 차라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비올라가 장식장 앞에 멍하니 선 그를 이상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야.”

차라는 인형을 내려놓고 황급히 소파로 가 앉았다. 표정 없는 얼굴로 물끄러미 그를 지켜보던 비올라가 금세 환한 미소를 지으며 손수 차를 따라 주었다.

“도대체 그동안 어딜 그렇게 쏘다녔던 거니? 가끔 편지라도 좀 보내 주지. 말은 안 해도 레오가 많이 걱정했어.”

“…보냈는데.”

“뭐?”

“아니야. 아무것도.”

차라는 뜨거운 찻잔을 들고 후후 입김을 불었다. 설핏 미간을 찌푸렸던 비올라가 다시금 능숙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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