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2화 (262/328)

“카타리나 공작 전하.”

그때, 등 뒤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오랜 상념에서 깨어나 고개를 돌렸다. 클레멘스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있었다.

“미란테 경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치안대는 거의 다 정리가 되었다는군요.”

“벌써요?”

“조금 전 치안대장이 항복했다고 합니다.”

페기의 곁으로 슬쩍 다가온 클레멘스가 종탑의 난간 너머를 내려다보더니 인상을 찌푸리며 코를 쥐었다. 페기가 설핏 웃었다.

“사택에 창문은 닫아 두고 오셨나요?”

“집사의 귀가 멀어서 말입니다. 십중팔구 난리 통이 일어난 줄도 모르고 있을 텐데, 돌아가거든 요 연기 냄새가 진동하게 생겼습니다.”

클레멘스가 부러 툴툴거리며 말했다. 페기가 작게 소리 내어 웃자, 클레멘스는 넌지시 그녀의 눈치를 살펴보았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셨다지요?”

“…네. 피곤하다나 뭐라나.”

묘하게 불퉁한 말투였다. 페기는 난간에 팔꿈치를 올리곤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예후르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마무리는 네가 하고 돌아와.”

그러고는 단조롭게 돌아서던 뒷등.

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았던 페기조차 할 말을 모조리 잊을 지경이었다. 결국에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뿐.

“배교는 성직자가 함부로 입에 올릴 말이 아니에요. 사도는 더더군다나 그렇고.”

심지어 예후르는 은연중에 사상을 의심받던 인물이었다. 먼 사막, 이교의 땅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4년 전 천사 미할리나의 성상을 베어 넘겼다는 이유로.

“어때요, 클레멘스. 이대로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묻힐 수 있을까요?”

그러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클레멘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신 없는 기색으로 웃기만 했다.

페기는 시름에 잠긴 눈을 난간 밖으로 돌렸다.

그에 대한 무지가 이제 와 두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숨기고 있는 무언가. 그가 품고 있는 미지의 존재감이 자꾸만 그녀의 불안감을 부추겼다.

“…어? 저기! 살아 돌아온 사도시잖아!”

불현듯 아래에서 누군가의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종탑 아래 옹기종기 모인 시민들이 페기를 손짓하며 다른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밀알처럼 작게만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 기쁨과 환희가 가득했다. 페기가 얼떨떨한 기색으로 허리를 곧추세우자, 흐뭇하게 시민들을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 있지요. 엘피도 공작 전하든 알비야 공작 전하든, 교황 성하를 향한 성도 시민들의 무조건적인 애정을 이어받을 수만 있다면 별 탈 없이 성좌에 앉으실 수 있으리라고.”

“…….”

“이제 보니 그 애정이 전하를 향하는군요.”

페기는 멍하니 그를 쳐다보았다.

“나를요? 왜?”

“왜냐니… 당연하지 않습니까. 전하께선 전례 없이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오신 사도요, 교황 성하를 핍박하고 사도에게 거짓된 죄를 뒤집어씌웠던 청백회를 무너트린 장본인이신데.”

“그건 나 혼자 한 일이 아니에요.”

“하지만 전하께서 하신 것처럼 보이지요.”

교황의 교서를 발표한 것도, 장미 수도회의 수습 기사들을 이끌고 와 퀴테리아를 호송한 것도 그녀였다.

그제야 시민들의 오해를 알아챈 페기가 조금 창백해진 낯빛으로 입술만 달싹거렸다. 클레멘스가 흡족한 얼굴로 그녀를 격려했다.

“교황 성하께서 성도의 시민들로부터 받는 무한한 애정은 오스피나 참극을 함께 겪었다는 동지애와 잿더미로 전락한 성도를 일으켜 세우셨다는 존경심이 합쳐진 것입니다. 비록 성하와 시민들이 함께한 시간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전하께는 교황 성하께 없는 것이 하나 있지요.”

“…….”

“바로 성하께서 아끼는 따님이시라는 것.”

애정은 대물림된다.

“성하께서 많은 고초를 겪으셨듯, 전하께서도 죽음이란 말 못 할 고통을 겪으셨지요. 성도의 시민들이 전하와 교황 성하를 겹쳐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하지만 난 그런 애정을 받을 자격이 없어요. 나는….”

페기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했다.

레오폴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성도를 재건했다면, 그녀는 간사한 술수로 퀴테리아를 몰아낸 것에 불과했다. 자랑스럽게 저들의 애정을 받아들이기엔 양심의 가책이 너무나도 컸다.

“받아들이셔야 합니다.”

“못하겠어요. 내가 어떻게.”

“정 받아들이지 못하시겠다면,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하십시오.”

클레멘스가 엄숙하게 말했다.

“설마 그런 각오도 없이 일을 꾸미신 겁니까?”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질린 낯빛을 가만히 응시하던 클레멘스가 곧 표정을 풀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를 생각해서라도 부디 그렇게 해 주십시오.”

“…….”

“그분에 대한 의혹이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그 곁을 지켜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페기는 흔들리는 시선을 조금 내렸다.

삿된 의혹이 그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설사 거짓된 모습에 반한 시민들이 보내는 찬사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예후르를 보호할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결심한 페기가 다시 용기 내어 난간 앞으로 걸어갔다. 사라진 그녀의 모습에 당황하여 종탑 위를 기웃거리던 시민들이 다시 만개한 얼굴로 환호성을 내질렀다. 페기는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그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하셨습니다.”

흡족해하는 클레멘스의 목소리가 유독 따갑게 들려왔다.

페기는 목 끝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꿀꺽 삼키곤 몸을 돌려 빠르게 종탑을 내려왔다. 둥글게 이어지는 계단처럼 그녀의 삶도 끝을 알 수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가는 것만 같았다.

일 층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전령이 급하게 달려와 고했다.

“전하! 야손 수도사가 탈주했습니다!”

“뭐?”

페기가 반문하기 무섭게, 미란테가 몇몇 기사들을 이끌고 들어왔다.

“전하, 청백회의 간부인 야손이….”

“방금 들었어요.”

미란테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제 불찰입니다. 더욱 세심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페기는 몰려오는 현기증에 이마를 감싸쥐며 벽을 짚고 섰다.

“퀴테리아 추기경은요?”

“하옥되어 있습니다.”

“야손이 퀴테리아를 두고 달아났다고요?”

의미심장한 질문에 미란테가 눈매를 날카롭게 세웠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저는 야손이란 자에 대해 잘 알지 못합니다. 그가 이대로 성도 밖으로 달아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획책할 것인지 고견을 들려주십시오.”

페기는 가만히 입술을 매만졌다.

야손은 그 누구보다도 청백회의 신념에 강한 믿음을 가진 자. 일이 잘못되었다고 하여 이토록 쉽게 퀴테리아를 내버릴 인물이 아니었다.

“…아마도 이 상황을 반전시킬 방도를 찾겠지요.”

“방도라면….”

미란테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이 지경이 되고도 상황이 반전될 여지가 남아 있나 싶어서.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가 이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어디로 갔는지 대충 알 것 같아요.”

***

성궁 앙겔리카의 북서쪽에는 야트막한 산이 있다.

산이라기엔 낮고, 그렇다고 동산이라 하기엔 높아서 일단은 산이라 불리지만 동네 애들의 놀이터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원래는 나무가 무성하여 제법 그럴듯한 이름으로 불렸는데, 언젠가 어린 사도가 실수로 산을 모조리 태운 뒤로는 민둥산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민둥산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페기는 붉은 노을로 물들어 가는 서녘 하늘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산 정상에서 몰아치는 겨울바람은 해가 기울어 갈수록 거세어지고 있었다. 호위로 따라 나온 라만이 정중하게 외투를 권했으나, 그녀는 조용히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마음 졸이는 기다림은 머잖아 끝을 보였다.

멀리서부터 산을 달려 올라오는 다급한 발소리에 페기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

알틴이 화상 흉터로 흉하게 얽힌 만면에 미소를 가득 띠며 달려오고 있었다. 페기는 순간 그녀에게 처참한 배신을 당했다는 것도 잊은 채 옛날처럼 손을 흔들어 주려 했다.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등 뒤에서 알틴을 덮쳐 왔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내질렀다. 동시에 사방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이 찢어 죽여도 모자랄 것들이…!”

순식간에 제압되어 끌려 내려가는 야손의 양손이 이상할 정도로 붉었다. 페기는 일순 치미는 현기증에 휘청거리며 뛸 듯이 산길을 내려갔다.

“전하….”

알틴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병사들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비켜섰다. 페기는 터덜터덜 걸어와 알틴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았다.

“…알틴.”

조용한 부름에 알틴의 눈이 가물거리며 뜨였다. 페기는 단도가 꽂힌 그녀의 가슴팍을 애써 외면하며 눈물을 꾹 참았다.

“전… 하….”

알틴이 파들거리며 손을 내밀자, 페기는 다급히 그 손을 잡아 주었다.

“제 아들….”

“네 아들은 무사해.”

형편없이 구겨져 있던 알틴의 얼굴에 비로소 안도감이 깃들었다.

“마지막으로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봐야지. 아들 얼굴 봐야지.”

“저보다 좋은 부모… 찾아 주실래요…?”

흐려지는 두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다.

“못된 엄마 이름 따위… 알려 주지 마시고, 그냥… 좋은… 착하고 좋은 부모 밑에서 자라도록….”

“알틴.”

“약속해 주세요, 제발….”

결국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페기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약속할게. 약속해.”

그제야 알틴의 얼굴에 실낱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두 눈을 감고 아들의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리던 그녀의 고개가 별안간 풀썩 기울어졌다.

페기는 평온한 알틴의 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눈치만 보던 병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아마도 죄인과 몸싸움 중에 사고가 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발견했을 때는 이미….”

“…….”

“전하?”

“그만 가 봐요.”

서로 의아한 눈빛을 주고받은 병사들이 곧 허리 숙여 인사하곤 길을 떠났다.

페기는 온기가 빠져나가는 알틴의 손을 꼭 부여잡고 떨 듯이 고개를 숙였다. 그때껏 조용히 지켜만 보던 라만이 다가와 죽은 이의 몸뚱이 위로 따스한 외투를 덮어 주었다.

불그스름한 저녁놀로 온통 뒤덮이는 민둥산.

애도하는 그림자가 유독 무겁고 길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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