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는 그 길로 사람을 보내 청백회에 간자로 숨어든 알틴을 불러냈다. 이슥한 밤이 되어서야 나타난 알틴은 목이 졸린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낯빛이었다.
“전하. 이렇게 자꾸 불러내시면 저 정말 들킬지도 몰라요. 안 그래도 요새 담장 경비가 더 삼엄해지고 있는데….”
페기는 지체 없이 천으로 감싸인 무언가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알틴이 천을 헤집다가 멈칫 굳었다.
“알아보겠니?”
“…당연하죠. 제가 우리 아들한테 만들어 준 모자인데.”
작은 모자를 꼭 쥔 알틴의 두 눈에 이슬이 맺혔다. 페기는 건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많이 자랐더구나. 이제 그 모자는 맞지 않는다기에 가져와 보았단다.”
“그렇게… 많이 자랐나요?”
알틴은 간절하게 페기를 바라보았다. 페기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알틴은 다급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전하, 저 아들이 너무 보고 싶어요. 무슨 일이든 다 할게요. 제발 저 좀 여기서 빨리 꺼내 주세요.”
“…무슨 일이든.”
“예, 무슨 일이든.”
그리움에 사로잡힌 알틴의 눈이 형형하도록 번들거렸다. 페기는 살며시 쪼그려 앉아 그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가져가렴.”
알틴은 넌지시 전해지는 서류 더미를 받아 들었다. 의아한 기색이 감도는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페기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보나벤투라가 넘긴 자료들이란다.”
“보나벤투라 추기경이요?”
“그래. 우리 쪽으로 넘어왔어.”
멍하니 서류를 내려다보던 알틴이 곧 결연한 빛으로 페기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뜻이신지 잘 알겠어요. 이걸 퀴테리아 추기경의 집무실에 숨겨 두면 되는 거죠?”
“아니. 내가 그렇게 시켰다고 고해바쳐야지.”
“…네?”
페기는 알틴의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나는 널 협박한 거야. 아들을 인질로 잡힌 너는 어쩔 수 없이 청백회에 간자로 들어갔지만, 나에 대한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이 자료들을 퀴테리아에게 넘기는 거고.”
“…….”
“사실과 크게 다르지 않잖니. 거짓이 아니니 진실되게 보일 거란다. 네 연기라면 퀴테리아도 충분히 속아 넘어갈 거야.”
“왜… 그렇게 해야 하는데요?”
“그래야 퀴테리아가 조금이라도 널 믿을 테니까.”
퀴테리아는 신중한 사람이다. 자신의 사연을 설명하고 귀중한 자료를 넘긴들, 단기간에 완전한 신뢰를 얻기는 힘들 터.
“조만간 큰일이 터질 거야.”
하지만 분위기만 조성된다면.
“예후르가 중죄를 범한 죄인으로 몰려 잡혀 들어갈 거란다. 그때, 퀴테리아에게 그 자료들을 바치며 고해. 나까지 함께 엮어 넣을 방도가 있노라고.”
“저, 절 믿지 않을 거예요.”
“믿을 거야. 그만한 일일 테니까.”
페기는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렸다.
“나를 엮어 넣을 증거를 가져오겠다고 선언한다면 밖으로 나오기 한결 수월하겠지. 필요한 증거라면 그때 넘기마. 어차피 얼마간의 눈속임에 불과한 것이니.”
“…….”
“중요한 건 그다음이야.”
나를 엮어 넣겠답시고 퀴테리아가 거짓 증거를 들고 나서는 그 순간.
“네가 바꿔 쳐야 해.”
“무엇으로요?”
“내가 저번에 주었던 자료들.”
잠자코 기억을 더듬던 알틴이 곧 탄성을 내뱉었다. 페기는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용을 보았니?”
“…살짝 들추어만 보았는데 난생처음 보는 문자가 있길래 무서워서 덮어 두었어요.”
“난생처음 보는 문자?”
페기가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알틴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때 시키신 대로 퀴테리아 추기경의 집무실 외진 곳에 숨겨 두었어요. 작정하고 뒤지지 않으면 못 찾을 곳이에요.”
“…그런 곳이라면 앞으로도 들킬 가능성은 적겠지. 때가 될 때까진 계속 그곳에 숨겨 놓으렴.”
페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하자, 알틴이 황급히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이번 일만 완수하면 절 내보내 주시는 건가요?”
페기는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알틴의 낯빛이 순식간에 희게 폈다. 온몸으로 감격하던 그녀는 비틀거리며 일어나 인사하곤 다시 골목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물끄러미 골목을 응시하던 페기가 호위로 따라 나온 막시모를 돌아보았다.
“그리 보셔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예후르는 알틴에게 중요한 서류를 전달해 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알틴과 접촉할 수 있는 것은 그녀뿐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중요한 서류인 만큼 역설적으로 감시가 적은 퀴테리아의 집무실에 숨기라는 전언 역시 이해할 만한 내용이었으나, 정작 전달하란 서류를 페기조차 보지 못한 것이 문제였다.
“대체 언제부터 이 일을 꾸미고 있었던 거예요?”
그때, 예후르는 이미 자신을 미끼로 걸어 퀴테리아를 주저앉힐 준비를 끝마친 셈이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저 모르게 진행했다는 점과 지금에 이르러서도 비밀에 부치고 있는 것은 그녀에게 묘한 서운함을 불러일으켰다.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막시모.”
“들으면 후회하실 테고요.”
페기가 설풋 눈살을 찌푸렸다.
“얼마나 미친 짓이길래요?”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네.”
“전 분명 말렸습니다. 듣지 않으신 건 엘피도 공작 전하시니 나중에라도 절 탓하진 마십시오.”
막시모가 꿋꿋하게 대꾸했다. 그에게서 대답을 듣길 포기한 페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는 그의 계획대로 순탄하게 흘러가길 바랄 뿐이었으나.
“…예후르.”
청백회의 반응은 생각보다 훨씬 빨랐다. 퀴테리아를 사도로 칭송하는 바람잡이들을 풀어 그들의 속도를 늦추려 했으나, 퀴테리아는 그마저 정면으로 돌파해 버렸다. 그러고는 종교 재판소와 작당하여 약식으로 예후르를 호송해 버렸다.
“괜찮을 거야.”
“…….”
“너무 걱정하지 말고.”
예후르의 말이 그토록 무겁게 다가올 수가 없었다.
한순간에 홀로 남겨진 페기는 정신없는 틈에도 막시모를 장미 수도회로 보내 미란테를 불러오도록 했다. 그사이 재판이 열렸고 예후르가 던진, 이른바 미끼는 그녀의 예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이러니 나한테 말을 안 했지….’
페기는 재판장에 느긋이 앉아 있는 예후르를 노려보며 분을 삭였다.
뱀 숭배라니, 배교라니. 아무리 미끼라 한들, 스스로에게 그런 죄목을 갖다 붙이다니. 제정신인가.
“생각보다 파장이 큽니다, 전하. 후폭풍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교황 성하의 인가를 받으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동의해요, 클레멘스 추기경.”
그리고 청백회의 화살이 저에게로 향하자, 페기는 기다렸다는 듯 성궁으로 달려가 레오폴트에게 서신을 전했다.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었다.
퀴테리아는 이미 술수에 걸려들었다. 그녀에겐 가망이 없으니, 애꿎은 예후르에게 배교자라는 오명을 남겨 주고 싶지 않다면 협력해라.
“성하께서 화가 많이 나셨습니다.”
예상했던 일이다. 그러나 예후르를 버리지 못할 레오폴트는 결국에 뜻을 굽힐 것이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분노를 가라앉힐 시간이었다.
그렇게 겨울바람을 맞으며 내전 앞을 지켰던 이틀.
페기는 추위에 몸서리칠수록 속에서 용솟음치는 불덩이의 뜨거운 열기를 느꼈다. 제대로 먹지도 잠들지도 못하는 시간이 이어지니 기력이 쇠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일 텐데도 그녀의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지고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녀는 더 이상 의문으로 속을 태우지 않았다.
찬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 손등의 부르튼 상처가 순식간에 나아 사라지는 것을 보며 말없이 소매 속으로 손등을 숨길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떠오른 이틀째의 태양.
유독 맑은 하늘 아래 내리쬐는 겨울 햇살조차 따가운 날이었다. 작은 얼음 알갱이가 맺힌 속눈썹을 깜빡이며 페기는 비로소 오늘임을 직감했다.
“성하께서 전하라 하셨습니다.”
받아 든 교서는 기다림의 시간에 비하면 지나치리만큼 가벼웠다. 하지만 대필한 수도사의 글씨 속에서 페기는 피를 토하는 듯한 레오폴트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예후르를 택한다는 것은 곧 비올라를 버린다는 뜻.
아무리 퀴테리아에게 가망이 없다 한들, 다른 자식을 위해 딸을 포기하는 심정은 얼마나 절절하겠는가.
“…성하를 잘 보필하세요.”
페기는 쓴웃음을 씹어 삼키며 돌아섰다.
그녀는 레오폴트에게 양자택일을 강요한 장본인. 위로를 건넬 자격조차 그녀에겐 없었다.
이후로는 수월했다.
퀴테리아가 제 손으로 갖다 바친 증거의 내용이 밝혀지면서부터 술렁이던 성도의 민심은 레오폴트의 교서가 낭독된 순간 그야말로 폭발하고 말았다.
그러잖아도 성도의 신실한 시민들이 유별나게 사랑하고 애달파 하는 존재가 바로 레오폴트였다. 교황을 수호해야 하는 근위대가 도리어 청백회의 말로 전락하여 레오폴트를 압박했다는 폭로는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미, 미란테 경이시다!”
하물며 방종한 청백회와 근위대를 무찌르기 위해 나타난 사람이 바로 오랜 시간 근위대에 헌신했던 전 단장 미란테였다. 그녀는 일찌감치 근위대의 대적자로 고려되었던 경비대와 다르게 성도의 지리를 상세하게 꿰뚫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성도 시민들의 호감을 산 인물이었다.
시민들은 때맞춰 나타난 충정의 상징에게 환호를 보냈다. 피와 살이 튀기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는 광경에서 지난날의 참극을 떠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