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본시오가 전권을 잡기 시작한 이후로 전 대륙을 호령하던 근위대의 위용은 빛이 바래기 시작했다.
누구도 의심하지 않던 타락의 시작은 갓 들어온 기사들에게 본시오가 치하의 의미로 내리던 술상이었다.
밤낮없이 수련에만 매진하던 어린 기사들에게 처음 맛보는 향락의 세계는 그야말로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어린 만큼 맹목적인 기사들은 속절없이 유흥에 빠져들었고, 청명하기 그지없던 성기사의 정신은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훈련을 게을리하는 기사의 검이 녹스는 것은 당연지사.
자신의 타락을 절감하며 어찌할 수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기사들에게 이번에는 청백회의 수도사들이 다가왔다.
당신은 괜찮다,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와 함께 개혁에 매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성기사가 걸어야 할 정의로운 길이다.
자, 우리의 손을 잡아라.
청백회는 그들에게 타락에 대한 면죄부가 되어 주었다. 낮에는 청백회의 가르침대로 그 누구보다 열성적인 신도가 되어 온 성도를 휘젓고 다녔으나, 밤에는 술독에 빠져 지냈다. 그리고 어젯밤의 죄악을 용서받기 위하여 더욱 청백회의 교리에 탐닉하고 빠지고….
단순히 훈련 부족의 문제가 아니었다.
신앙심이란 곧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갑옷.
스스로 그 갑옷을 벗어 젖힌 이들에겐 은퇴한 노기사와 미숙한 수습 기사들만으로도 충분했다. 최소한의 병력만 확보된다면, 굳이 용 기병대를 투입하여 성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지 않고도 저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는 소리.
그럼에도 어렵게 돌고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를 위해서였다.
명분.
“그래. 네 말대로 미란테 경은 우리에게 협조하겠지.”
예후르는 그리 말했다.
“아마 우리가 연락을 주기만을 내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몰라. 장미 수도회와 근위대의 갈등은 오래되었지만, 사도를 수호하는 근위대란 상징적인 직함이 저들에게 있는 이상 장미 수도회도 명분 없이 움직이긴 난감했을 테니.”
하지만 이쪽에서 먼저 도움을 요청한다면, 일개 수도회라 할지라도 성도에 개입할 수 있는 최소한의 명분이 확보된다.
“그들에겐 우리가 명분이 되어 줄 수 있어. 하지만 페기, 우리의 명분은?”
당시 그들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고작해야 보나벤투라가 내어 준 세금 횡령의 증거.
그마저 퀴테리아가 개입했다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를 그대로 제출한다면 청백회의 청렴한 인상에는 다소 타격이 가겠으나 퀴테리아는 끝까지 발뺌할 것이고, 무리하여 퀴테리아를 엮으려 든다면 도리어 거센 후폭풍이 돌아올 것이었다.
“퀴테리아 추기경은 에피파나 수도사와 오르코의 존재를 알고도 묵인했어. 그들도 지금까지 겪은 일들에 대해 기꺼이 증언하겠다고 했으니….”
“민심은 조금 떠날 수 있겠지. 하지만 청백회의 단원들은 믿지 않을 거야.”
예후르는 차분하게 차를 따라 냈다.
“너도 알다시피 청백회는 강력한 군대를 이끌고 지금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야. 오히려 지금의 자리에 올라 근위대와 치안대라는 병력을 추가적으로 얻게 된 것에 가까워. 외부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제압한들, 청백회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무너지지 않는다면?”
“내부적으로 더욱 결속하게 되겠지.”
적의 존재는 ‘우리’를 더욱 크게 만든다.
또한 적의 공격은 ‘핍박받는 우리’를 만들어 결집력을 강화시킨다.
“하지만 그 명분이란 걸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는 건데. 청백회의 본거지는 거의 요새나 다름없어서 누구도 숨어들 수가 없다며. 알틴도 아직 주요 문건에는 접근할 수 없다고 하고….”
“찾을 수 없다면 만들어야지.”
“…….”
“퀴테리아가 제 발로 그 증거를 갖다 바쳐야 하고.”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제 발로?”
“그 정도는 되어야 맹목적인 청백회 단원들도 좀 믿을 것이 아니니?”
예후르가 즐거운 기색으로 찻잔을 들어 올렸다.
“만일 우리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를 제출하여 퀴테리아를 끌어내렸다고 가정하자. 청백회에서 어떻게 반응하겠니? 야손처럼 고집스러운 작자가 과연 우리가 주장하는 그녀의 죄를 순순히 인정할까?”
“그럴 리가….”
“그래. 조작된 증거라고 생각하겠지. 퀴테리아는 순식간에 결백한 성직자로 둔갑할 테고. 만약 사형이라도 당하는 날엔 핍박받는 백성들을 대신해 순교하신 희대의 성인으로 추앙받을걸?”
예후르는 소리 내어 웃었지만, 페기는 도저히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지금의 청백회를 보자면 충분히 그럴듯한 전개였기 때문에.
“이미 적으로 규정된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청백회에겐 통하지 않을 거야. 퀴테리아가 제 손으로 제출한 증거쯤은 되어야 먹히겠지.”
“…….”
“그게 바로 청백회의 가장 강력한 근간인 신뢰를 무너트릴 방법이야.”
타락한 교회를 정화해야 한다는 기치로 젊은 수도사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이끌어 낸 퀴테리아.
거기에 보나벤투라의 꾸준한 지원, 어느 날 사도로 각성한 비올라의 후광을 받아 화려하게 중앙 교회로 진출한 청백회.
여러 부수적인 사항들이 있었으나, 결국에 그들이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퀴테리아를 향한 깊은 신뢰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퀴테리아라면 무조건 옳다는 그릇된 존경심은 교회 역사상 유례없이 단단한 조직을 만듦과 동시에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말았으니.
바로 퀴테리아 그 자신.
청백회의 단원들은 퀴테리아를 마치 사도처럼 우러르지만, 불행히도 그녀는 사도가 아니다. 말과 행동이 아닌 존재 자체로 존경심을 받아 마땅한 사도와 달리, 그녀는 끊임없이 말과 행동으로 지지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야 했다.
그렇게 수년을 어렵게 쌓아 올린 신뢰감은 물론 한두 번의 실언이나 실수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잘하게 실망스러운 행보를 유도하여 지지 세력을 꾸준히 약화시키기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남은 방법은 단 하나.
퀴테리아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
“어려울 거야.”
“그래도 해내야 해.”
예후르는 단호했다.
“청백회뿐만이 아니야. 청백회를 미워하는 일반 시민들조차 퀴테리아에 대해서는 다소 유보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어.”
퀴테리아는 다른 타락한 성직자들과 다르다는 한 줄기 희망, 혹은 그녀라면 낡은 교회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리라는 기대.
“그 모두가 퀴테리아를 향한 믿음의 부산물들이야. 이번 싸움에서 누가 이기느냐와는 관계없이, 지금 그 믿음을 부수지 않는다면 교회는 머잖아 양분되고 말 거야. 퀴테리아에 대한 신뢰가 건재한 이상 청백회는 결코 무너지지 않을 테니까.”
“…….”
“우리는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해야 하잖니.”
예후르가 가만히 팔을 뻗어 페기의 손등을 어루만졌다. 하염없이 입술을 짓씹던 페기도 결국은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방안은 있어?”
“퀴테리아는 청백회의 우두머리야. 적의 우두머리를 노리려면 우리도 엇비슷한 상대를 걸어야겠지.”
페기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너?”
예후르는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페기는 생각을 가다듬고 간신히 입술을 뗐다.
“너를 걸겠다는 거야, 지금?”
“그만하면 퀴테리아도 속아 넘어오지 않겠니?”
“예후르!”
“이미 준비는 끝났어.”
의심 많은 퀴테리아조차 덥석 물지 않고는 못 배길 미끼.
“나는 위대한 사도에서 찢어 죽일 죄인으로 전락할 테고, 퀴테리아는 신이 난 나머지 본래의 신중함을 잃고 말겠지. 그래, 어쩌면 이참에 너까지 함께 끌어내리자고 생각할지 몰라.”
“…….”
“그 틈이 바로 기회야, 페기.”
페기는 망연자실하게 입술을 달싹였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해? 너는 훗날에 교황이 될 사람이잖아. 그러다 너한테 피해라도 간다면….”
“퀴테리아의 위증으로 밝혀지면 내 결백이 입증될 거야.”
“하지만 구렁텅이에 빠져야 하는 사람이 꼭 너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퀴테리아와 엇비슷한 위치여야 한다면 원탁 추기경이면 된다. 분명 자원할 사람도 있었다.
“필사적으로 보여야 하니까.”
“…….”
“성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선택으로 비춰져야 하니까.”
라발의 용병대에게 침략당했던 수십 년 전의 상처를 여전히 끌어안고 사는 성도 오스피나의 시민들.
“확실한 명분 없이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는 건 여론의 문제도 있어. 지금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온 사도와 뱀을 죽인 영웅이지만, 성도에서 정변을 일으키는 순간 성도를 약탈했던 라발의 용병들과 똑같은 취급을 받게 될 테니까. 여론을 등에 업은 청백회가 다시 회생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하지 않니?”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할 여지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내가 잡혀 들어가 혹시라도 죽을 위기에 처한다면 달라지지. 게다가 나를 거짓으로 몰아간 사람이 다름 아닌 퀴테리아야. 교황을 수호하는 근위대를 감히 사적으로 남용했다는 것까지 시기 좋게 밝혀지면 여론의 분노는 더욱 거세질 테고.”
“…….”
“그때 군사를 일으킨다면, 우리는 교회의 적과 싸우는 수호자가 될 거야. 성도를 약탈하는 무법자와 성도를 수호하는 방패. 이만한 차이라면 나를 미끼로 걸 만하지 않니?”
예후르는 깊은 눈으로 그녀를 들여다보았다.
“물론 내가 잡혀 들어간 다음은 네가 해야 돼.”
중심축을 잃고 흔들리는 세력을 추스르는 것도, 비밀스러운 공작을 펼치는 것도.
“할 수 있겠니?”
우스운 질문이었다.
너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나뿐이라면, 어떻게든 해내야 하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