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요새 누가 그런 구닥다리 율법서를 지킵니까? 근위 기사님들 여기 안 나오신 지가 벌써 몇 년째인데요?”
“구닥다리? 몇 년?”
싸늘하게 가라앉는 미란테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문지기가 신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 그러니까 아마 4년 전쯤? 그래도 단장님… 아니, 전 단장님 떠나시고 난 직후에는 지켜졌는데, 본시오 부단장님이 전면에 나서기 시작하신 뒤로는 율법서야 있으나 없으나 한 것이 되었지요.”
“…….”
“아, 또! 장미 수도회랑은 무슨 일로 틀어졌는지, 몇 년째 충원도 제대로 이루어지질 않는다니까요? 요즘은 하도 인력이 부족해서 치안대 병사들까지 성궁으로 들여 순찰을 돌게 하고 있습니다. 전 단장님, 오신 김에 장미 수도회 쪽으로 연락을 좀 넣어 주십시오! 근위대 충원이 안 되니, 저희 같은 아랫것들만 아주 고생입니다!”
문지기가 울상으로 매달렸다. 미란테는 검집을 느릿하게 쓸어내리며 서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아주 고생이 많았겠어.”
“아이고, 말씀드린다면야 하루 꼬박 새울 수도 있지요! 그나저나 전 단장님께서는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미리 연락을 주시지 않고요.”
“어쩌다 보니 일이 그렇게 되었네.”
미란테가 넌지시 북부 지구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치안대가 성궁까지 순찰하느라 북부 지구의 경계가 그리도 엉망이었던 게군.”
“예?”
의아하게 반문하던 문지기는 불현듯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했다. 그늘에 가려진 북부 지구의 골목골목에서 낯선 이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전 단장님…?”
문지기가 차츰 얼어붙는 얼굴로 뒷걸음질했다. 무장한 이방인들이 미란테의 등 뒤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자네를 베고 싶지 않네.”
어느덧 수십의 병력을 거느린 미란테가 문지기에게 음산한 시선을 주었다.
“물러서게나.”
“정체불명의 병사들이라니?”
근위대 대련실로 급보가 날아든 것은 정오의 일이었다.
대낮부터 술판을 벌이고 있던 대부분의 기사들은 급보를 듣고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그나마 본시오가 애써 눈살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일백에 가까운 병사들이 북문에서부터 밀어닥치고 있는데….”
“북문?”
일순 본시오가 낯빛을 바꾸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전령이 황급히 비켜섰다.
“상황이 심각합니다, 부단장님. 달려오는 길에 전해 듣기론 종교 재판소의 상황도 녹록지 않다고 합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연하게 중얼거린 본시오가 경갑을 챙겨 입었다. 술기운에 자꾸만 매듭짓는 손길이 엇나가자, 보다 못한 전령이 대신 경갑의 매듭을 지어 주었다.
“어떻게 할까요? 일단 왈테르 단장님께도 연락을 드려야….”
“그 영감이 뭘 안다고 부르나.”
“하지만 싸움 솜씨 하나만은 여전히 근위대에서 제일이시지 않습니까?”
잠자코 전령의 말을 듣던 본시오가 술기운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거칠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고주망태로 쓰러져 있는 기사들을 걷어차며 깨우기 시작했다.
“다 일어나! 비상 상황이다!”
“아우….”
시끄럽게 코를 골던 근위 기사들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걷어차인 부위를 문질렀다. 본시오는 그들의 몸뚱이 위로 경갑을 하나씩 던져 주며 재촉했다.
“빨리 일어나!”
“부단장님,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전령이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굼뜨게 일어나는 기사들을 후려치며 바쁘게 움직이던 본시오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떻게 해야 할까….”
“…….”
“아무래도 내전으로 가야겠지?”
장난스럽게 묻는 소리에 전령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본시오는 낄낄 웃으며, 비틀거리는 기사들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겨우 정신을 차린 기사들을 데리고 나왔을 때는 이미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였다. 다급한 것은 전령 혼자인지, 내전으로 향하는 동안에만 볼일을 보겠답시고 멈춰 선 것이 무려 네 차례나 되었다. 심지어는 그들을 질책해야 할 본시오마저 속없이 웃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내전은 이미 이방인들의 손에 넘어간 뒤였다.
본시오는 이런 상황을 일찍이 예견한 사람처럼 묵묵히 내전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가느다란 세검을 지팡이처럼 양손으로 짚고 선 미란테가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단장님이실 줄 알았습니다.”
“전 단장이다. 이 미련한 놈.”
씹어 뱉듯 중얼거린 미란테가 거침없이 계단을 밟아 내려왔다. 아직 술기운이 덜 가신 근위 기사들은 그제야 미란테를 알아보고 잔뜩 흥분하기 시작했다.
“어, 할머니? 할머니가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안 그래도 편지를 보내려 했는데… 악!”
성큼성큼 다가온 미란테가 검집째로 세검을 휘둘러 근위 기사의 허벅지를 후려쳤다. 그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지자, 미란테는 즉각 다음 근위 기사를 후려 팼다. 그렇게 영문을 모르는 근위 기사들이 차례차례 쓰러지는 동안, 본시오만은 여전히 동요 없는 모습이었다.
마침내 모든 근위 기사들을 쓰러트린 미란테가 저벅저벅 본시오에게로 다가왔다. 본시오는 특유의 나른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던 미란테가 순식간에 잇새로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곤 맨주먹으로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윽!”
본시오가 짧은 비명을 터트리며 기우뚱했다. 온 힘을 다하느라 비틀거렸던 미란테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살벌하게 중얼거렸다.
“괘씸한 녀석….”
“…….”
“내가 어떤 마음으로 네놈을 받아들였는데….”
파들거리는 목소리에 못다 푼 노여움이 묻어났다. 본시오는 후려 맞은 턱을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그때 끝까지 반대하셨었어야죠.”
성도 오스피나를 피로 물들였던 라발 용병대장의 목을 잘라 바친 어느 사내아이.
교황 레오폴트는 크게 기뻐하며 사내아이를 근위 기사로 길러 내라 명했지만,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것이 사실이다.
미란테 역시 그중 하나였다.
“성하. 저는 저 아이의 타고난 천성이 우려됩니다.”
부모 없는 고아를 품어 주었던 용병단.
아무리 배운 것 없는 아이라지만, 한때 은혜를 베풀어 주었던 사람의 목을 단숨에 그어 버리는 것이 과연 정상일까.
“사람은 변할 수 있다네. 아직 어린아이가 아닌가. 자네가 맡아 한번 잘 이끌어 보게나.”
4년 전, 불명예스럽게 은퇴한 뒤로 미란테는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을 후회했다.
못하겠다고, 나는 할 수가 없다고 말했으면 오늘의 이런 치욕은 없었을까.
“단장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냥 제가 이렇게 생겨 먹은 것을요.”
본시오가 시시껄렁하게 웃으며 느릿느릿 다가왔다.
“그러니까 하나도 변하지 않은 제가 마지막으로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
“살려 주십시오.”
미란테가 까득, 이를 갈았다. 당장 찢어 죽일 것만 같은 살벌한 눈빛을 받으면서도 본시오는 지극히 평온한 모습이었다.
“내전까지 장악하신 걸 보면 퀴테리아 추기경도 이미 손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단 거겠죠. …누구든 좋습니다. 퀴테리아 추기경, 알비야 공작, 탐보프와 라발의 세력들까지. 제가 꿰고 있는 그들의 약점을 모두 알려 드리겠습니다.”
“내가 그따위 헛소리에 흔들릴 것 같나?”
“저 하나 살려 주시는 것에 비하면 충분한 값이 될 겁니다.”
본시오가 느물거리며 속삭였다.
“조용히 살겠습니다. 그냥 못 본 척만 해 주십시오.”
미란테는 시퍼렇게 그를 노려보았다. 노여움을 꾸역꾸역 씹어 삼키는 얼마간의 침묵 뒤로 그녀가 한 발짝 다가섰다.
“난 자네가 변한 줄 알았네.”
“…….”
“청백회와 손을 잡았다기에 적어도 신앙의 길로 접어든 것은 다행이라 생각했어. 내가 길러 낸 저 망아지 같은 놈들, 자네가 데리고 다니며 청백회로 물들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같은 생각이었지. 다른 놈들도 변했으니 자네도 변할 수 있으리라고.”
본시오는 마치 낯선 사람의 이야기라도 듣는 것처럼 멀뚱히 눈만 껌벅였다. 그 모습을 끈질기게 응시하던 미란테가 문득 헛웃음을 터트렸다.
“다 나의 헛된 바람인 줄도 모르고….”
그녀는 씁쓸한 혼잣말만 남기고 돌아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사방에서 병사들이 몰려와 근위 기사들을 에워쌌다. 근위 기사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무장이 해제되어 그대로 끌려 나갔다. 미란테는 제 손으로 길러 낸 자식 같은 근위 기사들을 외면한 채 꿋꿋이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할머니! 시키신 대로 네 개의 성문을 모두 점거했습니다!”
그때, 헐레벌떡 달려온 병사가 각 잡힌 자세로 경례하며 보고했다. 미란테는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투구를 착용한 새파랗게 어린 얼굴에 긴장감과 들뜬 기색이 혼재되어 있었다.
미란테는 옅게 웃으며 어린 제자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잘했다, 욜리에.”
“정말이요? 정말 저 잘했어요, 할머니?”
“그래, 아주 잘했어.”
어린 병사가 금세 함박웃음을 지으며 제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미란테가 문득 초라하게 끌려 나가는 옛 제자들의 뒷모습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그러나 미련은 찰나였다.
미란테는 어린 제자와 함께 내전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서 교회의 깃발은 변함없이 힘차게 휘날리고 있었다.
***
성도는 수월하게 정리되고 있었다.
북부 지구에서 내려와 신속하게 성궁 앙겔리카를 점령한 미란테는 종교 재판소를 함락시킨 부대와 합류하여 성도 전 지역으로 진군했다. 시가지 곳곳에서 치안대와의 항쟁이 빚어졌으나,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 벌어진 순간부터 승기는 기울어져 있었다.
이제 페기는 높은 종탑에 올라 잿빛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도의 전경을 가만히 굽어본다.
성궁을 점령한 즉시 미란테는 성도 오스피나를 가로지르는 동서남북의 대로를 거점으로 삼아 민가들이 들어선 좁은 골목으로 진출하고 있었다. 막바지에 몰린 치안대는 절망적인 심정을 추스르며 결사 항쟁을 외치고 있었으나, 그마저 오늘이 가기 전에 완전히 꺾이고 말 터.
실상 근위대가 무력화된 시점에서 결과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민병이 주축인 치안대는 강도 높은 훈련을 받은 성기사들에게 결코 비할 바가 못 되므로.
애당초 성도 오스피나가 강력한 방비를 자랑할 수 있었던 까닭은 온전히 광신적인 신앙심으로 무장한 근위대에 있었다. 교황과 사도를 위해서라면 제 목숨은 물론이요, 생사람 잡아 죽이는 죄악마저 서슴지 않고 저지를 이들에게 아무리 날카로운들 적의 창칼이 대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