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6화 (256/328)

“차라리 불을 피우는 것으로 세 번째 시험을 여신다면…!”

들뜬 기색으로 끼어들던 청백회 단원이 야손의 무시무시한 시선을 받곤 쭈그러들었다.

퀴테리아는 지끈거리며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꾹 짓눌렀다. 비올라가 불을 피울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카타리나 공작을 떨구어 내기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 전제가 성립하지 않아 못내 아쉬울 뿐.

고민하던 퀴테리아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이만 모두 나가 보십시오. 게롯타를 불러오도록 하고.”

“게롯타 수도사 말입니까?”

의아해하는 야손의 물음에 퀴테리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야손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순순히 다른 단원들을 데리고 집무실을 나갔다.

머지않아 노크하는 소리와 함께 게롯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하.”

“들어와요, 게롯타.”

문을 열고 주춤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온 게롯타가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퀴테리아는 짐짓 상냥한 미소를 띠며 자리를 권했다. 그녀가 시키는 대로 소파에 앉은 게롯타가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

퀴테리아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잉크로 더러워진 게롯타의 손을 눈짓했다.

“일을 하다 왔나요?”

“예, 예…. 솔란지아 추기경의 인장도 본뜨고… 또 그분의 필체도 조작하느라….”

게롯타는 거뭇거뭇한 손을 치맛자락 안으로 말아 넣었다.

정체불명의 약초를 이용해 전서구를 기절시켜 다른 세력들의 밀서를 염탐하는 일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었다. 밀서의 내용을 살짝 조작할 때마다 필요한 인장과 필적 복사는 수많은 단원들 중에서도 게롯타의 실력이 으뜸이었다.

“일전에 내게 했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퀴테리아가 느긋하게 건네는 말에 게롯타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묘한 미소를 띤 퀴테리아가 손바닥에 턱을 괴었다.

“카타리나 공작을 무너트릴 방안을 주겠다고요?”

게롯타는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퀴테리아는 긴 숨을 내뱉으며 슬그머니 시선을 내리깔았다.

주는 것이 있으면 가는 것이 있는 법.

도움을 받으면 그것이 곧 빚이 된다.

뼛속까지 장사치인 위스누아의 만포르차 가문에서 자라난 퀴테리아는 그러한 불변의 진리를 모르지 않았다. 그래서 몸소 증거를 대령하겠다는 게롯타의 제안을 유보한 것이었다. 가능하다면 제 손으로 카타리나 공작을 처리하는 것이 나을 테니까.

하지만 이리저리 궁리해 보아도 당장 카타리나 공작을 처리할 방안이 없었다. 엘피도 공작이 없는 그녀는 상대할 가치도 없는 조무래기일 테지만, 그들의 뒤에는 클레멘스 추기경을 내세운 라발이 있었다. 지금의 기세를 몰아 어떻게든 카타리나 공작을 함께 처리하여 라발이 교국의 정세에 끼어들 여지를 차단해야만 했다.

그로써 얻을 이득을 생각한다면, 게롯타에게 줄 보답은 약소하다.

퀴테리아는 느른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사의 예후르와 카니나의 페기.

그 두 사람만 사라지면 교회는 모조리 알비야 공작, 더 나아가 그녀의 손아귀로 들어올 것이다.

“좋습니다. 그대와 그대 아이의 안전을 보장해 드리죠.”

초조하게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던 게롯타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퀴테리아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카타리나 공작을 무너트릴 방안이란 것이 대체 무엇입니까?”

“…필적입니다.”

게롯타가 긴장한 모습으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4년 전… 돌아가시기 전의 카타리나 공작 전하를 가까이서 모신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필체라면 누구보다도 잘 알아요. 지금 카타리나 공작 전하라 주장하는 저 가짜의 필체와는 전혀 다릅니다.”

“…필체라.”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퀴테리아가 곧 선선히 수긍했다.

사람마다 고유한 필체가 있다. 다행히 여론도 아군의 편이니,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도 뒤바꿀 수 있다는 금서의 내용과 엮는다면 충분히 카타리나 공작을 무너트릴 수 있으리라.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필적은 성궁에 남아 있을 겁니다. 가짜의 필적을 확보할 수 있겠습니까?”

“내일 재판 전까지 가져오겠습니다.”

게롯타가 시퍼런 독기로 눈을 빛냈다. 퀴테리아는 비로소 흡족한 기색으로 미소를 머금었다.

***

이튿날, 재판이 재개되었다.

엘피도 공작은 여전히 침묵만을 견지했으므로 상황은 그에게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미 그는 뱀 숭배자이자 배교자로 낙인찍혔으며, 사실상 형량을 결정하는 단계만이 남아 있었다.

“작위는 무조건 박탈되겠지?”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게. 외딴 성에 감금된다 해도 감지덕지해야 할 판국인데….”

사람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의견을 주고받는 재판관들을 힐끔거리며 수군댔다.

배교는 화형을 내려 마땅한 중죄이나, 아직 뱀의 생존 여부가 확실치 않으므로 공작의 목숨을 붙여 두지 않겠냐는 것이 중론이었다. 어찌 되었든 엘피도 공작은 현시대의 가장 강력한 사도. 만에 하나 뱀이 다시 마귀 부대를 이끌고 나타난다면, 선봉에 서야 할 사도는 다름 아닌 그였다.

그것만은 청백회도 인정하는 사안이었기 때문에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엘피도 공작이 사라지면, 뱀에게서 교회를 보호해야 할 중대한 짐이 오롯이 알비야 공작에게 지워진다. 게다가 엘피도 공작을 자칫 잘못 건드린다면 그를 따르는 용들이 폭주할 가능성도 있기에, 공작에 대한 처단은 신중해야 했다.

따라서 야손이 증인석에서 초조하게 다리를 떨고 있는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심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재판관들은 안중에도 없는지, 그는 굳게 닫힌 재판장의 문을 힐끔대기 바빴다. 불안함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내보냈던 청백회 단원이 뒤늦게야 돌아와 그의 귀를 붙잡고 무어라 속삭이자, 참다못한 야손이 재판장을 박차고 나섰다.

재판이 한창인 시각. 재판장 외부 복도는 한산했다.

거의 뛸 듯이 출구 쪽으로 향하던 야손은 막 마차에서 내리는 퀴테리아를 발견했다. 그가 큼지막해진 눈으로 서둘러 달려갔다.

“예하!”

구겨진 옷자락을 매만지던 퀴테리아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야손 수도사.”

“예하, 왜 이리 늦으셨습니까! 저는 안 오시는 줄만 알고…!”

“설마 벌써 판결이 내려진 겁니까?”

퀴테리아가 웃으며 물었다. 야손은 한풀 꺾인 기색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재판관들의 고민이 깊은 모양입니다. 엘피도 공작이 데리고 다니는 용들을 무시할 수 없으니, 구금 장소로 최대한 민가와 떨어진 곳을 택해야 할 테니까요.”

한탄하듯 주절거리던 야손이 퍼뜩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그보다 증거는 어찌 되었습니까?”

퀴테리아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얼굴이 화상 흉터로 얼룩진 게롯타가 납작한 함을 들고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게롯타.”

퀴테리아가 손을 내밀자, 게롯타가 흠칫하며 얼른 함을 건네주었다. 퀴테리아는 손수 함을 열어 야손에게 보였다. 야손은 조금 긴장한 표정으로 함에 들어 있는 양피지를 집어 들었다.

“이것이 진정….”

“가짜의 필적입니다. 뒷장은 성궁에서 구해 온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필적이고.”

종이 두 장을 나란히 두고 비교해 보던 야손이 슬금슬금 웃기 시작했다.

“눈이 단춧구멍이 아닌 이상, 이걸 보고 동일인의 필체라 주장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지요.”

퀴테리아는 슬쩍 게롯타에게 시선을 주었다.

“게롯타 수도사의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 아니요. 아닙니다….”

게롯타가 주눅 든 표정으로 연신 고개만 조아렸다. 조심스럽게 필적 자료를 함에 집어넣은 야손이 재판장을 돌아보며 재촉했다.

“이만 가시지요. 곧 엘피도 공작에 대한 판결이 내려질 겁니다.”

“그럽시….”

야손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던 퀴테리아가 문득 인상을 찌푸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자색 추기경 의복에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던 금줄이 흉하게 끊겨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야손이 작게 혀를 찼다.

“이런….”

심지어는 금줄을 매만지는 퀴테리아의 어설픈 손길에 옷매무새가 더욱 엉망이 되어 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게롯타가 조심스레 손을 대 보았으나 역부족이었다.

퀴테리아가 한숨을 내쉬며 함을 도로 게롯타에게 넘겼다.

“야손. 그대는 먼저 재판장으로 돌아가 재판관들을 잠시 잡아 두십시오. 곧 따라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예하.”

야손은 사냥개처럼 철저하게 복종하며 다시 재판장으로 달려갔다. 퀴테리아는 망가진 차림새를 점검하기 위해 잠시 곁방으로 들어갔다.

재판장에선 엘피도 공작에 대한 판결이 막 내려지려 하고 있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 마지막으로 변호하실 기회입니다.”

“…….”

“진정 끝까지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실 요량입니까?”

예후르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깊은 한숨을 내쉰 재판관이 지친 눈을 들어 장내를 돌아보았다.

“그럼 판결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관중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굳게 다물린 재판관의 입술을 주시했다. 이어질 판결이 교회의 권력 구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을 터.

그러나 재판관의 말이 채 이어지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렸다.

“잠시만 판결을 유보해 주십시오!”

우렁차게 외치며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야손이었다. 재판관이 당혹한 기색으로 물었다.

“야손 수도사?”

“한 가지, 더 추가할 죄목이 있습니다!”

재판장 중앙에 우뚝 선 야손이 강렬한 눈빛으로 재판관을 올려다보았다. 재판관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니, 그걸 왜 이제야….”

“죄송합니다! 곧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입장해 새로운 죄목과 그 증거를 밝혀 주실 겁니다.”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요?”

퀴테리아의 이름이 언급되기 무섭게 재판관들의 안색이 돌변했다. 서로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한 재판관들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선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여기 있습니다.”

야손의 거대한 몸 뒤에서 퀴테리아가 사뿐사뿐 걸어 나왔다. 통로를 기웃거리던 관중들은 매섭게 휘날리는 자색 추기경 의복을 발견하곤 기가 죽어 시선을 피했다. 부정할 수 없는 현 교회의 권력자인 퀴테리아 추기경은 성도 시민들에게조차 아득하고도 먼 존재였다.

퀴테리아는 단상 앞에서 멈추어 섰다.

재판관들과 가벼운 눈웃음을 주고받은 그녀가 우아하게 몸을 틀었다. 게롯타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납작한 함을 내밀고 있었다. 함을 받아 든 퀴테리아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게롯타의 어깨를 살짝 쥐었다. 희게 질려 있던 게롯타의 만면에 그제야 생기가 조금 돌았다.

퀴테리아는 함을 들고 천천히 재판관에게로 다가갔다. 반대쪽에 앉아 있던 예후르가 그녀의 발길을 물끄러미 눈으로 좇는 것이 느껴졌다. 곁눈으로 그를 훑어본 퀴테리아가 입가에 은근한 조소를 머금었다.

하늘을 날던 새가 떨어졌다.

더는 날아오를 수 없도록 날개를 잡아 뜯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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