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생김새와 목소리가 같아 의심을 면했을 뿐, 그녀만이 되살아날 수 있었던 이유는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다. 그러나 부활의 비밀을 덮고 있던 베일이 한 꺼풀 벗겨진 이상, 우후죽순 돋아나는 의혹을 묵살하기는 더 이상 무리였다.
야손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기세등등하게 페기를 손가락질했다.
“저것은 가짜입니다! 죽은 자를 되살리겠다는 엘피도 공작의 허황된 집착이 만들어 낸 희대의 사기극! 저 가짜를 내세워 진정한 사도이신 알비야 공작 전하를 몰아내고, 감히 성좌를 차지하려 한 것입니다! 성도 오스피나의 시민 여러분! 이런 천인공노할 짓을 진정 두고 보고만 계실 겁니까!”
“야, 야손 수도사!”
재판관의 만류도 소용없었다. 재판장은 이미 야손의 독무대로 변질되고 말았다. 관중들은 홀린 듯이 그의 연설에 빠져들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성도의 시민들이여, 눈을 뜨십시오! 누가 교회의 진정한 수호자이며, 누가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교회를 등진 배교자인지! 저 불가능한 존재가 알려 주고 있질 않습니까!”
“옳소!”
성난 관중들이 들고 일어섰다. 멍하니 그들을 따라 일어서던 페기는 곧장 제게로 모이는 시선들을 느꼈다. 앞뒤 양옆 가릴 것 없이 관중석의 모두가 뚫어져라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4년 전, 끝내 불을 피우지 못했던 대성당에서 경험했던 끔찍한 악의가 서서히 그녀의 목을 졸라 오기 시작했다.
“마샤! 얼른 전하를 모시고 빠져나가거라!”
보다 못한 클레멘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으며 다급히 속삭였다. 퍼뜩 정신을 차린 마샤가 울상으로 페기의 팔을 잡아당겼다. 고꾸라질 것처럼 뒤로 돌려진 페기가 마샤의 힘에 끌려가며 장내를 돌아보았다. 외로이 묶여 있는 예후르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져 갔다.
페기는 소리 없이 그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거대한 쇳소리와 함께 재판장의 문이 열렸다.
***
아침 해와 함께 성궁 앙겔리카의 문이 열렸다.
정갈한 수도복 차림으로 입궁하던 성직자들이 흠칫하며 어딘가를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 입궁하는 사람들이 속속들이 늘어날수록 떼로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는 점차 커져만 갔다.
그 중심에는 내전 앞에서 무릎 꿇고 있는 카니나의 페기가 있었다.
어제 종교 재판소에서 나와 저택을 들를 여유도 없었던 그녀는 한겨울 추위에 걸맞지 않는 얇은 로브 차림이었다. 아무것도 깔리지 않는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밤을 지새웠는지, 얇은 머리칼 끝마다 얼음 알갱이가 맺혀 있고 파랗게 질린 입술은 간헐적으로 떨렸다.
지켜보고만 있기 사뭇 애처로운 모습이었으나, 선뜻 다가가 감싸 주는 사람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종교 재판소에서 벌어졌던 폭로가 들불처럼 번져 나가, 성도 사람치고 어제의 일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아직 엘피도 공작이 배교자란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이들조차 그녀의 부활에 대해서는 의혹을 보이는 판국이니, 작금의 성도에서 그녀의 처지란 바람 앞의 등불이나 마찬가지였다.
“정말 아예 딴 사람일까요?”
“그럴 수밖에…. 솔직히 이상하긴 했잖습니까. 대관절 죽은 사람이 어떻게 되살아난다고요.”
사자(死者)는 돌아오지 못한다.
지금까지 굳건했던 진리를 깨트리기에 카니나의 페기란 존재는 너무나도 미약했다. 사도로서 특출한 업적을 세운 것도 아니고, 죽기 전까지 존재감이 지대했던 것도 아니다. 하물며 4년 전에는 비어 버린 성화대에 불을 지피지도 못했다.
역사상 위대했던 다른 사도들을 제치고 하필 평범하기 그지없는 그녀가 부활했다는 것을 곧이곧대로 믿기보단, 차라리 죽은 누이에게 집착하던 엘피도 공작이 금기를 범했다고 추리하는 편이 더욱 그럴싸했다.
“그런데도 굳이 여기까지 들어와서 보란 듯이 앉아 있는 꼴을 보아하니 참으로 낯짝도 두껍습니다.”
“저렇게 빈다고 교황 성하께서 봐주기나 하실는지….”
저들끼리 모여 쑥덕거리던 성직자들이 끌끌 혀를 차며 고개를 흔들었다.
온 성도에 퍼진 소문을 교황이라고 모를쏘냐. 죽은 딸을 아꼈던 만큼 저 가짜에게 느낄 교황의 배신감은 더욱 지대할 것이었다. 추운 겨울날 내전 앞에서 밤을 지새우는데도 한 번 나와 보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발길을 옮기려던 성직자들은, 그러나 난데없이 안드레아를 마주치곤 흠칫 굳었다. 마치 옛 전사의 동상처럼 우뚝 선 안드레아는 형형한 안광을 내뿜으며 페기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행여 그녀의 눈에 띄기라도 할까, 성직자들은 몸을 낮춰 살금살금 걷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착잡하게 페기를 보고 있던 클레멘스가 작은 목소리로 안드레아에게 속삭였다.
“그 고서는 진짜입니까?”
“…그렇다니까. 옛날에 내가 봤던 거예요.”
안드레아가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우연히 발견한 그 책으로 사술을 익히다가 예후르 그 새끼한테 들켜서 압수당했어요. 그걸 어떻게 청백회가 갖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클레멘스의 표정이 보다 심각해졌다. 이미 고서의 진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성도의 여론은 최악으로 흐르고 있었다. 페기뿐만 아니라 예후르의 위상 역시 진창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왜 일이 이따위로 되어선…. 젠장!”
거칠게 발을 굴린 안드레아가 제 성질을 못 참고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떨떠름한 표정으로 슬그머니 그녀에게서 멀어진 클레멘스가 뒷짐 지고 홀홀 페기에게로 다가갔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
은근하게 부르는 소리에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던 페기가 어깨를 움찔했다. 클레멘스는 그녀의 등 뒤에 붙어 먼 곳을 바라보는 시늉을 했다.
“북쪽 지구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
페기에게서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자, 클레멘스가 힐끗 시선을 내렸다.
“아직입니까?”
“…네.”
페기는 굳게 닫혀 있는 내전의 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보다 못한 클레멘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하께서 끝내 외면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지 않으실 거예요.”
“전하.”
“성하께선 절대 예후르를 포기하지 못하세요.”
고집스럽게 뜨인 보랏빛 눈에 서늘한 독기가 맴돌았다. 사뭇 염려스러운 눈으로 페기를 지켜보던 클레멘스가 조용히 외투를 벗어 그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그러고는 차마 떼어지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입궁하는 성직자들의 행렬이 끝난 성궁은 이제 바쁜 오전 업무 시간으로 접어들었다. 자연히 그녀를 에워싸고 수군거리던 인파는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겨울의 정적이 내전 앞을 싸늘하게 훑고 있었다.
그때, 거대한 쇳소리와 함께 내전의 문이 열리며 어느 수도사가 종종걸음으로 달려 나왔다. 페기는 얼어붙은 몸을 움츠리며 힘껏 그를 쏘아보았다.
“성하께선 무어라고 하십니까?”
“…날이 춥습니다. 이만 돌아가시지요.”
페기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수도사는 차마 그녀의 형형한 안광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다.
“성하께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 하십니다. 저택으로 돌아가 계시면 후일에 다시 연락을 드릴 터이니….”
“생각이 끝나실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겠어요.”
“제발 그러지 마십시오. 한낱 수도사의 사견이나… 큰 기대를 하지 않으시는 편이 좋을 듯싶습니다.”
“왜요. 내 서신을 받으시더니 화부터 내시던가요?”
차가운 조롱에 수도사는 난감한 기색으로 입술을 다물었다. 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도사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가서 성하께 전하세요.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성하의 우유부단함이라고. 이제는 결정을 내리셔야 할 때라고 말이에요.”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언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전전긍긍하던 수도사는 결국 그녀의 고집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페기는 힘없이 내전으로 돌아가는 수도사의 뒷모습을 꿋꿋이 쏘아보며, 흘러내린 외투를 끌어당겼다.
이까짓 고초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
“예하, 아까 성궁에서 보셨습니까? 그 가짜 말입니다!”
퀴테리아의 집무실로 들어오기 무섭게 야손이 상기된 얼굴로 물어 왔다.
“확실히 엘피도 공작이 없으니 오합지졸들뿐인가 봅니다. 머리가 있으면 지금 당장 도망쳐야지요. 가짜임이 죄 탄로 난 상황에서 설마하니 성하께서 그년을 비호해 주시겠습니까? 도리어 바로 끌어내 참수하지 않으시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죠!”
야손의 말에 다른 청백회 단원들도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느긋하게 상석을 차지하고 앉은 퀴테리아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엘피도 공작마저 잡혀 들어간 상황이니, 마지막 동아줄인 교황 성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는 게지요. 현명한 사람도 때로는 아주 멍청한 짓을 저지르곤 합니다. 죽은 딸과 똑같은 얼굴로 애원하면 성하께서도 모른 체하지 못하시리라 생각했을 겁니다.”
“설마 성하께서…?”
잔뜩 들떠 있던 야손이 순식간에 낯빛을 바꾸었다.
“예하, 만약 교황 성하께서 가짜의 편을 들어 주신다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이미 알비야 공작 전하께 말씀을 전해 두었습니다. 직접 성하를 찾아뵈어 성하의 결단을 이끌어 내시라고 말입니다.”
적이 교황의 인정에 매달리겠다면 이쪽도 똑같은 수를 쓰면 그만이다.
퀴테리아는 코웃음을 치며 다리를 꼬았다. 아무리 교황 레오폴트가 나이를 먹어 예전의 강고한 심기를 잃었다 한들, 진짜배기 딸과 가짜를 혼동할 정도는 아니었다.
“달아나지 않은 것이 차라리 우리에겐 반가운 일입니다. 이미 성도 내에 카타리나 공작의 정체에 대한 의혹이 파다하나,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더욱 바짝 차리고 올가미를 조여야 합니다. 가짜라고 우습게 보아 놓아주었다간 훗날 어떤 파란을 끌고 들어올지 모르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가짜라고 확정 지을 단서가….”
“없지요.”
퀴테리아는 진지한 표정으로 느릿하게 턱을 쓰다듬었다.
엘피도 공작은 이제 회생할 방도가 없다. 신원이 확실한 공작의 수하에게서 자백을 받아 냈고, 또한 뱀과 얽힌 금서도 증거로 확보된 상황이었다. 판결만 내려지지 않았을 뿐 그는 이미 용서받지 못할 배교자였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은 사정이 조금 달랐다.
엘피도 공작의 수하에게서 확보한 금서는 공작의 배교를 증명할 수는 있어도, 살아 돌아온 카타리나 공작이 가짜라는 사실마저 확증하지는 못했다. 야손의 연설로 여론을 그렇게 몰아가긴 했지만, 적법한 처벌을 내리기 위해선 그녀가 가짜라는 보다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