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4화 (254/328)

재판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테오둘로 보좌 사제는 이만 제자리로 돌아가도 좋습니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보좌 사제는 황급히 증인석으로 꽁무니를 뺐다. 재판관은 엄격한 표정으로 장내를 돌아보았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하자면 의혹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는 뱀의 사망 여부, 둘째는 펠릭스 보좌 사제의 의문사, 셋째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대답을 회피하시는 지난 1년간의 행방, 마지막으로 저 허물이 정말로 우리가 아는 ‘뱀’의 흔적인지의 여부.”

“…….”

“함부로 재단하기 참으로 난해한 문제들이지요.”

뱀의 사망 여부는 지금 이 자리에서 가릴 수 없다. 더구나 설령 지하 수로를 드나든 사람이 엘피도 공작뿐이라 하여도 펠릭스 보좌 사제의 죽음에 연관되었다고 허투루 단언할 수는 없으며, 아무리 1년간 그의 행적이 의문이라 해도 무작정 죄를 뒤집어씌울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도 아리송한 것은 허물의 정체였다.

재판관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불투명한 허물을 응시했다. ‘뱀’이라 명명된 교회의 주적은 여전히 그 실체가 불명확했다. 어원을 따져 지금의 뱀과 유사한 생김새이리라 짐작하는 이들이 많지만, 짐작은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이다.

“의혹투성이인 건 인정하겠으나, 의혹만으로 엘피도 공작 전하를 뱀 숭배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습니다.”

“물론 그러시겠지요.”

야손의 태연한 대답에 재판관은 설핏 눈살을 찡그렸다.

긴급 재판을 여는 데까진 청백회와 뜻이 맞았지만, 엘피도 공작에게 유죄를 선고하기 위해선 그럴듯한 증거를 제시해 주어야 했다. 오늘의 이 재판은 종교 재판소의 위신을 다시 세우는 중대한 자리. 털끝만큼의 의혹도 남겨 두어서는 안 되었다.

그런 재판관의 우려를 불식하듯 야손은 관객석을 돌아보며 우렁차게 외쳤다.

“그럼 마지막 증인을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죽은 사제의 일기장 내용이 공개된 이후로 그와 함께 지하 수로로 내려갔던 보좌 사제가 증인으로 나올 것은 이미 예견된 사항이었으나, 새로운 증인의 출현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소란스러워진 틈으로 재판장의 문이 활짝 열렸다.

가슴에 푸른 장미 브로치를 매단 근육질의 청백회 단원들이 얼굴을 가린 한 사내를 질질 끌고 들어왔다. 사내를 재판장 중앙에 강제로 무릎 꿇린 단원들이 그의 얼굴에 뒤집어씌웠던 검은 천을 확 벗겨 냈다. 동시에 관객석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얼굴은 그야말로 피투성이였다. 시퍼렇게 부어올라 눈조차 제대로 뜨지 못했으며, 덥수룩한 머리칼에는 피딱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가까이 서 있던 근위 대원조차 진하게 풍겨 오는 피비린내에 인상을 구길 정도였다.

야손은 사내의 뒷머리를 거칠게 휘어잡아 강제로 고개를 들렸다.

“이자의 이름은 게일. 엘피도 공작 전하의 상단에서 일하는 마부입니다.”

“아니, 일개 마부를 어찌 저리도….”

게일의 처참한 몰골에 당황한 재판관이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야손은 개의치 않고 게일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피 묻지 않은 하얀 팔뚝에 검은 전갈 모양의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마부는 은신을 위한 거짓 신분일 뿐, 이자는 조직적인 암살단의 일원이었습니다.”

“지,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암살이요?”

사람들이 모두 아연실색했다. 기겁한 재판관이 예후르를 추궁했다.

“엘피도 공작 전하, 저 발언이 사실입니까?”

예후르는 말없이 게일을 응시할 뿐이었다. 잔기침을 터트리며 고개를 휘청거리던 게일이 이내 힘겨운 미소를 지으며 갈라진 입술을 달싹였다.

“송구… 합니다, 전하…. 다 불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재판관이 경악한 기색으로 ‘맙소사’ 하고 중얼거렸다. 야손이 기세등등하게 말을 이었다.

“이자는 전직 암살자로, 엘피도 공작 전하의 수하로 들어간 뒤에는 온갖 불법적인 일들을 도맡아 했습니다.”

야손이 게일의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이봐, 네가 지금껏 무슨 짓을 해 왔는지 낱낱이 고해!”

“그냥… 다 했습니다…. 주로 타국에 첩자로 파견되었고… 가끔은 고문이나 암살도….”

“그것이 진정 사실인가?”

재판관의 황망한 질문에 게일은 맥없이 고개만 주억거렸다. 재판관은 허망하게 탄식했다. 아무리 중앙 교회가 썩은 정치판이기로서니, 만인의 모범이 되어야 할 사도마저 그럴 수는 없었다.

“아직은 놀라실 차례가 아닙니다. 이자가 재판장으로 끌려 나온 것은 비단 그런 이유만이 아니니까요.”

야손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저희 청백회는 전직 암살자들이 엘피도 공작 전하의 밑에서 암암리에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꾸준히 그들의 뒤를 쫓아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잡힌 것이 바로 이자입니다.”

야손의 형형한 눈빛이 게일에게로 꽂혀 들었다.

“당시 이자가 지니고 있던 고서입니다.”

재판관은 야손이 내미는 낡은 고서를 받아 들었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표지를 넘기던 재판관이 무언가를 발견하곤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은 사어(死語)가 아닙니까?”

“사어로 된 기록을 옮겨 적은 뒤 해석한 것입니다. 뒷장에 해석본이 따라오니 계속 읽어 보시지요.”

사어로 남겨진 기록이란 즉 역사로 기록되지 못한 신성시대의 기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뱀과 사도의 싸움이 한창이던 옛 시절.

베일에 싸인 신성시대의 기록이란 고작해야 오래된 비석에 새겨진 사어 몇 줄이 전부이며, 그마저 상당 부분은 해석의 여지가 분분했다. 수수께끼인 만큼 어떤 내용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신성시대의 기록을 난데없이 뜯어보게 되었으니, 재판관으로선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못내 껄끄러운 기색으로 망설이던 재판관이 마지못해 뒷장을 펼쳤다. 꺼림칙한 눈으로 내용을 훑는가 싶던 재판관이, 그런데 난데없이 안색을 확 뒤바꾸었다.

“이것이 진정 저자에게서 나왔단 말입니까?”

“엄중한 재판장에서 어찌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허….”

황망히 야손의 대답을 기다리던 재판관이 크게 탄식했다. 의심과 노여움이 혼재된 눈빛으로 예후르를 잠시 노려본 그는 이내 쉰 목소리로 고서를 빠르게 읊기 시작했다.

“태초에 불이 있었다. 불로 인하여 세상이 빛과 그림자로 갈라지니, 그 사이에서 수많은 생명이 탄생했다. 모든 생명은 하나의 우주인 바,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는 각자의 불을 품고 있다.”

“…….”

“그야말로 생명의 근원, 혹은 생명력의 원천. 그 얼마나 가공할 만한 힘이겠나.”

장내의 분위기가 차츰 어수선해졌다. 재판관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목청을 높였다.

“내 말이 의심스럽거든 지금 당장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 보라. 갓 죽은 생명의 속으로 파고들면 아직 꺼지지 않은 생명의 불씨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되었다. 너는 그것으로 원하는 무엇이든 이룰 수 있으리라.”

“조용! 조용!”

오른편에 앉은 재판관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호통을 쳤다. 그럼에도 술렁이는 장내는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중앙의 재판관이 계속해 낭독을 이어 나갔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가. 세상을 지배할 힘, 너는 이것으로 얻을 수 있다. 유한한 생명을 연장할 수단, 그 또한 이것으로 얻을 수 있다. 너는 나의 얼굴을 할 수도 있으며, 나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생명의 불씨로 이룰 수 있는 일은 이토록 무궁무진하다.”

“…….”

“불가능한 것은 오직 죽은 불씨를 다시 틔우는 것뿐. 그것을 제외하면 너는 모든 것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차마 아연함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입술만 계속 벙긋거렸다. 생명의 불씨니 하는 것들은 죄다 처음 듣는 소리였다. 높은 확률로 이단의 기록일지 모르는 것이 다름 아닌 종교 재판소에서 낭독되고 있는 것이었다.

소리 없이 재판관에게 다가간 야손이 친절하게 고서의 페이지를 넘겨 주었다.

“마지막까지 읽어 주셔야지요.”

길게 늘어진 재판관의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노여움에 가득 찬 눈으로 야손을 쏘아본 재판관이 가까스로 입술을 달싹였다.

“너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울리는 욕망의 목소리를 무시하지 마라.”

“…….”

“이것이 바로… 뱀인 내가 너에게 보내는 전언이다.”

“배, 뱀이라니!”

사방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장내가 시장 바닥처럼 시끄러워졌지만, 분위기를 가라앉혀야 할 근위 대원들조차 얼이 빠져 움직이질 못했다.

기다렸다는 듯 야손이 두꺼운 손바닥을 부닥치며 우렁차게 외쳤다.

“맞습니다! 저것은 뱀의 기록! 배교자의 상징이라 할 수 있겠으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재판관에게서 고서를 뺏어 든 야손이 어느 문장을 가리켰다.

“불가능한 것은 오직 죽은 불씨를 다시 틔우는 것뿐.”

“…….”

“다시 말해,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은 뱀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란 뜻입니다.”

사람들의 안색이 차츰 퍼렇게 질려 갔다. 설마 하는 의심이 스산하게 번져 나갔다. 야손은 서슬 퍼런 예후르의 안광을 마주하며 입꼬리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하지만 이런 부분도 있었지요. 너는 나의 얼굴을 할 수도 있으며, 나의 목소리를 낼 수도 있다.”

“…….”

“누군가가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뱀에게도 불가능한 부활.

그럼에도 되살아난 한 사람.

사람들은 멍하니 고개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재판장에 모인 수백 명의 사람들이 오직 한 사람만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러다 어디선가 ‘저기다!’ 하는 외침이 들려온 순간, 수백의 고개가 일제히 한 지점으로 돌아갔다.

바로 로브를 깊게 눌러쓴 카니나의 페기에게로.

알아들을 수 없는 웅성거림이 차츰 커져만 갔다. 의심과 혼란으로 뒤섞인 수백의 눈초리가 꽂혀 들고, 감당할 수 없는 악의가 넘치도록 흘러들었다.

페기는 얼어붙은 채로 경련하듯 눈을 깜박였다. 옆에 앉아 있던 클레멘스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작게 속삭여 왔다.

“전하….”

“애당초 죽은 사람이 되살아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야손이 신명나게 외쳤다.

“그 어떤 기록을 들추어 봐도 부활의 선례는 없습니다! 천 년 전 강대했던 뱀의 시대에 종막을 드리우셨던 사도 야누비타 1세께서도 끝내 살아 돌아오지 못하셨습니다! 한데 불조차 제대로 피우지 못하던 비렁뱅이 사도에게 부활이라니요!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립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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