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재판소의 문이 열리자, 시민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하얗게 질리거나 곧 터질 것처럼 붉게 달아오른 사람들이 제각기 목청을 높여 댔다. 날개 없는 말은 이미 백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
이시도르 피아제 역시 재판을 지켜보던 관중들 중 하나였다. 바글거리는 인파에 섞여 힘겹게 재판소를 빠져나온 그는 한숨을 돌리며 터덜터덜 인근의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얼핏 소박해 보이는 마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마차의 문을 열고 들어간 이시도르가 간략하게 예를 취했다.
“전하.”
로브로 얼굴을 가린 페기가 말없이 눈길만 주었다. 따로 떨어져서 재판을 관람했던 클레멘스와 안드레아도 이미 마차에 들어와 있었다.
마차의 문을 닫으며 이시도르가 신속하게 말을 꺼냈다.
“전하.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긴급한 사안이라는 핑계로 공식 절차도 밟지 않고 종교 재판을 열었는데, 이 점을 지적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이미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싸움이에요.”
페기는 잠자코 눈을 내리깔았다. 답답해진 이시도르가 목소리를 높였다.
“엘피도 공작 전하를 의심하는 자들이 이미 늘어나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설득해 주십시오. 행방이 묘연하셨던 1년간 무엇을 하셨는지,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직접 분명하게 밝히셔야 합니다.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에요.”
“…….”
“전하!”
페기는 그제야 입술을 뗐다.
“나도 몰라요. 예후르가 1년간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이시도르의 표정이 순간 망연자실해졌다. 예후르의 행방이 묘연해졌던 1년, 페기는 그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었다.
“지금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간다는 건 누구보다도 예후르가 가장 잘 알 거예요. 그럼에도 침묵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겠죠.”
“하지만….”
이시도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태연하기에는 뱀 숭배자란 죄목이 너무나도 무거웠다. 하물며 재판을 맡은 종교 재판소마저 그들의 편이 아니니, 자칫 잘못하다간 정말로 엘피도 공작은 뱀 숭배자가 되어 나락으로 떨어질지도 몰랐다.
생각을 가다듬은 이시도르가 다시금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사제의 일기만 해도 충분히 위협적인 증거입니다. 광장에서 공개한 뱀의 허물도 있고, 죽은 사제와 함께 3년 전 지하 수로로 내려갔었던 보좌 사제를 증인으로 데려왔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어떻게든 돌파구를 마련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시도르조차 무엇이 돌파구가 될지 감을 잡지 못했다. 말을 아끼고 있을 뿐이지, 여기 모인 모두가 절망적인 상황임을 알고 있었다.
그때껏 조용하던 클레멘스가 문득 입술을 달싹였다.
“보나벤투라는 어떻습니까?”
“보나벤투라? 그 미친놈?”
안드레아의 반문에 클레멘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를 돕겠다는 의사를 밝혔습니다. 청백회의 약점이 될 만한 자료들을 꽤 갖고 있을 텐데요.”
“허….”
아연한 표정으로 페기와 클레멘스를 번갈아 본 안드레아가 이내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다더니, 그녀는 이토록 지조 없는 정치판이 참으로 싫증 났다.
반면에 내내 죽상이던 이시도르는 화색을 보였다.
“듣던 중에 다행인 소리입니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쪽에서도 더욱 강력하게 청백회를 밀어붙이는 것이 어떨….”
“없어요.”
이시도르는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초조한 기색으로 손톱을 물어뜯던 페기가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그 자료들, 지금 나한테 없어요.”
“…예?”
이시도르의 반문이 무의미하게 울렸다. 페기는 살갗이 벗겨져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른 채 강박적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골몰하는 그녀의 귀엔 더 이상 누구의 목소리도 와닿지 않았다.
“이대로면 저희의 승리입니다, 예하!”
야손이 만개한 얼굴로 우렁차게 외쳤다. 퀴테리아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아주 잘해 주었습니다, 야손 수도사.”
“과찬이십니다! 전부 예하께서 준비하신 일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재판장에서의 역할은 오롯이 그대의 몫이었지요. 일기장을 낭독할 사람으로 그대를 택한 것은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칭찬에 야손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그는 커다란 몸이 구겨질 정도로 부끄러워했다.
흐뭇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퀴테리아는 불현듯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머뭇거리며 집무실로 들어오는 사람은 얼굴이 온통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수도사였다.
“게롯타. 무슨 일입니까?”
“아… 그게….”
게롯타가 그녀답지 않게 눈치를 보았다. 야손을 힐끔거리는 그녀의 시선을 알아챈 퀴테리아가 다소 엄격한 목소리로 명했다.
“야손. 곧 고행 시간입니다.”
“아니, 시간이 벌써…! 저는 이만 단원들을 지도하러 가 보겠습니다!”
허리를 직각으로 굽혀 인사한 야손이 바람처럼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퀴테리아가 느긋하게 게롯타를 돌아보았다.
“대체 용건이 무엇이기에….”
“예하!”
난데없이 게롯타가 그녀의 발치에 엎어졌다. 퀴테리아는 조금 놀란 눈으로 게롯타를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고, 고백할 것이 있습니다. 저, 저는, 그러니까, 제가….”
게롯타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거렸다. 무미건조하게 그녀를 응시하던 퀴테리아가 고개를 돌려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첩자였다고요?”
“예, 예…?”
게롯타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퀴테리아는 태연하게 찻잔을 받쳐 들고 있었다.
“주기적으로 외부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지 않습니까? 며칠 전에는 야음을 틈타 담을 넘기도 했고요.”
“…….”
“설마 내가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한 겁니까?”
“아, 그, 그게….”
멍하니 입만 벌리고 있던 게롯타가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짤막하게 웃은 퀴테리아가 찻잔에 입술을 붙였다.
“보아하니 내게 들킨 걸 알아 미리 선수 치려는 건 아닌 듯하고…. 청백회에 첩자로 들어올 정도면 심기를 아주 단단하게 먹었어야 할 텐데 갑자기 변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전 협박당한 거예요. 저, 저는 원래 수도사도 아니었고….”
게롯타의 눈에서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제, 제 아이가 인질로 잡혀 있어서 그랬어요. 전 청백회에 아, 아무런 원한도 없습니다. 그저 강요에 의해….”
“누구의?”
“카, 카타리나 공작….”
찻잔을 내리던 퀴테리아의 손길이 멈칫했다. 그녀의 우아한 입매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참…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바닥에 납작 엎드려서 파들파들 떨던 게롯타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남은 눈물을 모두 털어 버리곤, 품속에서 묵직한 서류 더미를 꺼내 들었다.
“카타리나 공작이 예하의 집무실에 심어 놓으라 명령했던 거짓 증거들입니다.”
퀴테리아는 서류를 받아 들곤 한 장, 한 장 넘겨 보았다. 그런데 서류를 읽어 갈수록 매끄럽던 그녀의 얼굴에 금이 갔다.
“…보나벤투라.”
이를 으득 간 퀴테리아가 어느새 형형해진 눈으로 게롯타를 내려다보았다.
“카타리나 공작이 건네준 것이 확실합니까?”
“네, 네!”
“이것을 내 집무실에 심어 놓으라 했다고….”
퀴테리아는 얼굴을 찌푸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게롯타가 건네준 서류는 본디 보나벤투라에게 있었을 세금 횡령의 증거들이었다. 직접적으로 횡령에 가담한 것은 보나벤투라지만, 이 증거들이 퀴테리아의 집무실에서 발견된다면 그녀도 책임을 면하긴 힘들었다.
문제는 집무실을 수색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저택은 명백한 퀴테리아의 사유지로, 법적 근거 없이는 막무가내로 침입할 수 없었다. 하물며 그녀는 원탁 추기경이며, 동시에 사도인 알비야 공작의 자매. 보나벤투라처럼 증거가 명확하지 않은 다음에야 중앙 교회의 법무처도 선뜻 수색을 허락하지 않을 터였다.
혹 적들이 나도 모르는 나의 흠결을 잡은 것인가.
찜찜한 생각에 사로잡힌 퀴테리아가 저도 모르게 미간에 깊은 골을 팼다. 그 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게롯타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예, 예하.”
찻잔에 머물러 있던 퀴테리아의 눈길이 그녀에게로 떨어졌다. 게롯타는 마른침을 삼키곤 가까스로 말을 이었다.
“제가 카타리나 공작의 약점을 알고 있습니다.”
“…약점?”
퀴테리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입술을 꾹 깨문 게롯타가 결연하게 허리를 폈다.
“엘피도 공작은 뱀 숭배자로 보내실 수 있지만, 카타리나 공작이 아직 남아 있지 않습니까. 살려 두셨다간 후환이 될 겁니다. 제게 그 여자를 무너트릴 방도가 있어요.”
“…….”
“저와 제 아이의 안전만 보장해 주신다면 무조건적으로 예하께 협조하겠습니다.”
늘 상대방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던 게롯타의 눈에서 놀랄 만한 독기가 엿보였다.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던 퀴테리아가 곧 흐드러지도록 웃기 시작했다.
***
재판 두 번째 날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지하 수로에서 발견된 뱀의 허물입니다.”
거대한 뱀의 허물이 재판장 중앙에 놓였다. 길이는 약 3m가량, 폭은 성인 남자가 양팔을 벌려 안아도 채 끝까지 닿지 못할 크기였다.
생전 처음 보는 크기의 허물에 좌중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반응이 터지자, 야손은 으스대듯 가슴을 힘껏 내밀었다.
“동물학자로부터 여태 학계에 보고된 적 없는 뱀의 비늘임을 확인받았습니다.”
야손은 동물학자의 날인이 찍힌 확인서를 제출했다. 차분히 내용을 들여다보던 재판관이 지나가듯 물었다.
“아까 증인 목록을 보니, 죽은 사제와 함께 지하 수로로 내려갔다던 보좌 사제가 있던데요.”
“지금 바로 모시겠습니다.”
야손은 증인석에서 불안하게 다리를 떨고 있던 어느 젊은 성직자를 데려왔다. 그는 베론의 교회에 소속된 보좌 사제로, 병사한 주임 사제를 대신해 그의 일기를 퀴테리아에게 전달한 장본인이기도 했다.
“베, 베론에서 보좌 사제직을 수행하고 있는 테, 테오둘로라고 합니다.”
보좌 사제는 덜덜 떨며 재판관에게 허리 숙여 인사했다.
“일기에서 보셨던 대로 3년 전 어느 날 저는 소성당의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발견했고… 반드시 지하 수로로 내려가 봐야겠다는 주임 사제님의 고집을 말리지 못하여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저의 전임자였던 페, 펠릭스 보좌 사제님의 시신… 과 저, 저것… 을 발견했고요.”
보좌 사제가 겁먹은 기색으로 뱀의 허물을 곁눈질했다. 재판관은 외알박이 안경을 추켜올렸다.
“4년 전 지하 수로에는 뱀의 허물이 없던 것이 확실합니까?”
“제, 제가 베론으로 오기 전이라 잘은 모르지만… 주임 사제님께서 분명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지난번에 내려왔을 때는 펠릭스 보좌 사제님만 계셨다고… 저번에 들으셨던 일기 내용 이상으로 제가 알고 있는 것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