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2화 (252/328)

관객석 곳곳에서 힉,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손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보좌 사제는 까무러칠 듯이 놀랐지만, 나는 익히 짐작했던 바이기에 씁쓸한 기분을 삼킬 뿐이었다. 죽어 가던 펠릭스를 두고 도망쳤던 기억은 밤마다 나를 괴롭히는 악몽이 되어 찾아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 반쯤 썩어 버린 펠릭스의 시신 위에 망토를 덮어 주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의문뿐이었다. 다만 엘피도 공작 전하와 연관되었으리란 예감만이 번뜩일 뿐이었다.”

장내의 모든 시선이 예후르에게로 모여들었다. 따가운 눈길에도 그는 변함없이 무표정을 고수하고 있었다.

“만약 지하 수로에서 발견한 것이 펠릭스의 시신뿐이었다면 이토록 얼이 빠지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보좌 사제는 그곳에서 차마 상상한 적조차 없는 것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펠릭스의 시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불투명하고 거대한 허물.”

“…….”

“그것은 뱀의 허물이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금방이라도 재판장이 떠나갈 것처럼 술렁거림이 번져 오르고, 몇몇은 격분을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기도 했다.

보다 못한 재판장이 목청을 높였다.

“모두들 자중하십시오!”

서슬 퍼런 노성에 장내가 잠시 얼어붙었다. 그 틈에 근위대원들이 관객석으로 파고들어 일어선 관중들을 다시 제자리에 앉혔다. 한숨을 푹 내쉰 재판관이 계속 말하라는 듯 야손에게 눈짓을 주었다.

야손이 곧바로 낭독을 이어 갔다.

“나는 보좌 사제와 함께 허물을 갖고 교회로 올라왔다. 촛불에 수없이 비추어 보았지만 뱀의 허물이 맞았다. 깊은 산골의 수도원에서 자란 보좌 사제는 뱀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지녔는데, 그 역시 이렇게 거대한 뱀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고 하였다.”

“…….”

“그 순간에도 우리는 알고 있었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뿐 진실은 분명했다. 그것은 일반적인 뱀의 허물이 아니었다. 이미 죽었다고 알려진, 교회의 주적 ‘뱀’의 허물이었다.”

장내에는 아연한 정적만이 흘렀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하던 야손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흔히 알려지길, 뱀이란 성화의 절반을 훔쳐 먹은 도둑. 모든 경전을 통틀어 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단 두 줄 뿐입니다.”

“…….”

“뱀은 간악한 도둑이요, 사특한 모리배라. 너희는 그가 속삭이는 유혹을 경계하라.”

그의 음성이 음울하게 울렸다.

“교회의 주적임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기록은 이상할 정도로 적습니다. 하지만 각 지방마다 뱀에 얽힌 설화 하나 쯤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요. 예컨대 페란 지방에선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의 말씀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뱀은 때로 산천을 뒤덮을 정도로 거대하며, 때로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정도로 작다.

“그 말씀대로라면 비현실적으로 거대하거나 왜소한 뱀은 사도의 숙적이며 마귀를 다루는 뱀이겠지요.”

야손이 양팔을 펼치며 장내를 돌아보았다.

“이날 이후로 사제는 진실을 알릴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는 위스누아의 대주교셨던 만달 추기경께서 의문사하시고 그 자리가 공석이던 때. 중앙 교회와 직통으로 연결될 방안이 없어 전전긍긍할 무렵에 1년여간 행방이 묘연하셨던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귀환하십니다. 사제는 진실을 폭로할 용기를 잃고 이 기록을 어둠 속으로 숨기지요.”

그렇게 몇 해가 덧없이 흘러갔다.

늙은 사제는 더욱 늙었고, 죽음을 목전에 두게 되었다.

“이것은 사제의 마지막 일기이자, 절명을 앞둔 자의 참회록입니다.”

야손은 일기의 마지막 장을 펼쳤다. 그의 낮은 목소리가 웅장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내 손으로 작성하는 마지막 일기가 될 성싶다. 기나긴 생에 후회하는 일도, 잘못한 것도 많지만 그것을 모두 풀어놓기엔 적절치 않다. 지금의 내가 남겨야 할 것은 용기가 없어 드러내지 못했던 진실이다.”

“…….”

“이미 보좌 사제의 도움을 받아 위스누아의 세르난도 공자에게 보낼 서신을 작성해 두었다. 그간 내가 겪었던 일들을 간략하게 정리하였는데, 공자가 직접 교회로 오면 일기장과 뱀의 허물을 전달할 생각이다. 누이동생인 알비야 공작 전하의 정적이 되는 엘피도 공작의 과오이니, 그대로 묵살하진 않으리라 믿는다. 이것으로 그동안 진실을 외면해 왔던 나의 실수를 조금이나마 만회할 수 있길 바란다.”

야손은 엄숙하게 일기장을 닫았다.

“이 일기를 작성하고 이틀 뒤, 사제는 사망했습니다.”

“…….”

“위스누아의 세르난도 공자는 서신을 받았지만, 미리 예정되었던 탐보프 동부 원정이 있어 교회에 들르지 못했지요. 최측근의 증언으로는 원정을 다녀온 뒤 베론의 교회로 가야 한다고 누누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재판관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공자는 여기 계신 엘피도 공작 전하의 용이 내지르는 불길에 그만 유명을 달리하시고 말았습니다.”

재판관은 침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야손은 가슴팍을 움켜쥐며 짐짓 고통스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죽은 사제의 일기로 유추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한 가지입니다. 바로 4년 전 사제가 지하 수로로 내려갔을 때 존재하지 않았던 뱀의 허물이 3년 전에는 발견되었다는 것이지요. 이상한 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뱀의 사망 시점을 4년 전으로 추측해 왔으니까요.”

야손은 품에서 양피지 서류를 꺼내 재판관에게 건네었다.

“그것은 각지에서 일어나던 마귀들이 한날한시에 사라졌음을 증명하는 서류입니다. 당시 마귀와 대치하던 각국의 사령관들로부터 확인받은 것이니 정확합니다.”

외알박이 안경을 매만지며 서류를 읽어 내린 재판관이 곧 고개를 끄덕였다. 야손이 기다렸다는 듯 장내를 돌아보았다.

“4년 전에 죽은 줄 알았던 뱀이 3년 전에 허물을 남겼습니다. 그때 죽지 않았다는 소립니다. 숨죽이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소리지요.”

“…….”

“엘피도 공작 전하. 이것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모두의 이목이 예후르에게로 모였다. 동상처럼 가만히 앉아만 있던 그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나는 모르는 일입니다.”

“뱀을 죽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이 4년 전이라 내 입으로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은데.”

그가 가늘게 웃었다. 야손이 인상을 구겼다.

“그럼 뱀을 죽인 것이 정확히 언제입니까?”

“글쎄… 3년 전쯤으로 해 둘까요?”

“법정입니다. 무게를 더해 대답해 주십시오.”

“그리 말해도 내 대답은 변하지 않습니다.”

예후르가 가만히 턱을 괴었다.

“뱀이 죽은 것은 도처에서 발견되던 마귀가 사라진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야손 수도사는 그마저 뱀의 수작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충분히 가능한 전개가 아닙니까? 죽은 줄 알았던 뱀이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나타난다면, 더한 공포심을 자극하겠지요.”

야손이 강경하게 대꾸했다. 예후르는 잠시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턱을 쓰다듬었다.

“그럼 성검은 어떻습니까?”

“…….”

“4년 전 마귀에게 빼앗겼던 모게리니 산의 성유물 말입니다. 천 년 전의 사도 야누비타 1세께서 뱀을 봉인하셨던 검이지요. 나는 그 검을 탈환하여 뱀을 죽이고 돌아왔습니다. 뱀을 죽인 충분한 증거가 될 텐데요.”

“전하께서 뱀 숭배자가 아니라면 그렇겠지요.”

설핏 미간을 찡그린 예후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그런 말도 안 되는…. 나는 사도입니다. 뱀을 숭배하다니요?”

“4년 전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도셨지요.”

야손의 입가에 비릿한 조소가 맺혔다.

“사자(死者)가 난데없이 부활한 것과 관련 있지 않겠습니까?”

예후르의 표정이 서서히 식어 갔다. 물끄러미 야손을 응시하던 그가 입술을 뗐다.

“카타리나 공작은 함부로 거론하지 마십시오.”

“그럼 대답해 주시지요. 4년 전, 뱀을 잡으러 떠나신 전하께선 지하 수로에는 왜 들어가셨던 겁니까?”

예후르는 입을 다물었다. 신이 난 야손이 입꼬리를 죽 찢었다.

“또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성인식에 참여하기 위해 성도로 올라갔다던 펠릭스 보좌 사제는 어찌하여 수로에서 죽은 것입니까? 4년 전 전하께서 들어가시기 전까지 지하 수로는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무언가 알고 계신 것이 있을 텐데요.”

“…….”

“좋습니다. 다른 질문을 드리지요.”

야손이 느긋하게 다가왔다.

“4년 전, 전하께선 돌아가신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시신도 확인하지 않으신 채 용을 타고 성궁을 떠나셨습니다. 휘하의 용 기병대 단원들이 급히 전하의 뒤를 쫓았으나, 이미 지쳐 버린 용들은 전하를 놓치고 말았지요. 그렇게 장장 1년이나 전하의 행방은 묘연했습니다.”

하지만 오리무중이었던 그의 행방이 최초로 폭로되었다.

야손은 일기장을 흔들며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그리도 급하게 향하셨던 곳은 다름 아닌 베론의 교회입니다. 실제로 사제가 기록한 날짜에 용의 울음소리를 들었다는 베론 주민들의 증언이 있습니다. 4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마귀가 나타난 줄 알고 야밤에 도시 전체가 난리가 났던지라 또렷하게 기억하는 주민들이 많더군요. 또한 이튿날 새벽에는 백룡이 먼 하늘로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지하 수로로 내려간 뒤, 사제는 노심초사하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록 그는 수로에서 올라오지 않았고, 그가 죽었다고 생각한 사제는 이 사건이 미칠 파장이 두려워 수로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를 봉하기에 이르렀다.

“전하께선 행방이 묘연하셨던 그 1년, 수로에 갇혀 계셨습니다.”

예후르의 발치로 다가온 야손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의 거대한 그림자가 예후르에게로 드리워졌다.

“대체 수로에서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

“아니, 아무것도 없는 그곳에서 어떻게 1년을 살아남으신 겁니까?”

예후르는 침묵했다. 얼마간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야손이 피식 웃으며 뒤돌아섰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이것으로 마치겠습니다.”

야손이 제자리로 돌아가자, 재판관의 시선이 예후르에게로 향했다. 예후르는 변함없이 허공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재판관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재판은 이틀 뒤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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