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1화 (251/328)

서기가 제자리로 돌아가자, 야손이 뚜벅거리며 재판장의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변함없이 평온한 예후르를 힘껏 쏘아본 그가 고개를 들어 전투적으로 재판관들을 올려다보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4년 전을 기억하실 겁니다.”

4년 전이라면 카니나의 페기가 의문사한 초유의 사태였다. 관객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이어질 야손의 말을 기다렸다.

“그때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뱀을 잡기 위해 서쪽으로 이동하여 위스누아 근방의 베론이란 소도시에 들르셨습니다. 그리고 도시의 유일한 교회를 찾아 폐쇄된 지하 수로에 홀로 들어가셨지요. 이는 공작 전하 휘하의 용 기병대 단원이 베론의 지배자였던 솔브리오 자작을 찾아 폐쇄된 지하 수로로 입장할 수 있는 다른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구했던 기록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야손이 양피지 서류를 재판관에게 공손히 넘겼다. 서류를 들춰 본 재판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교회에는 늙은 주임 사제와 갓 신학교를 졸업한 보좌 사제만이 정식으로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성인식에 불려 갔던 보좌 사제가 어쩐 일인지 연락이 두절되어 주임 사제만이 엘피도 공작 전하를 맞이했지요.”

“…….”

“다음은 작고한 주임 사제가 남긴 일기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아손은 품속에서 낡은 공책을 꺼내 펼쳤다.

“난데없이 들이닥치신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폐쇄된 지하 수로로 들어가신 뒤, 나는 전하의 수하로부터 차마 믿지 못할 이야기를 들었다. 전하께선 지금 뱀을 찾기 위해 비밀리에 움직이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설마 지금껏 이 교회 밑바닥에 뱀이 잠들어 있었던 것일까? 나는 두려움을 금치 못했다.”

야손이 종이를 한 장 넘겼다.

“그로부터 며칠 뒤의 일기입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성궁으로부터 급보를 들으시곤 황급히 교회를 떠나셨지만, 나는 여전히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먼 옛날 사도 로살레다께서 호기심은 달콤한 죄악이라 하셨건만, 달콤함에 취한 노구는 지하 수로로 절대 내려가지 말라는 엘피도 공작 전하의 명을 어기고야 말았다. 당시의 나는 우둔하게도 지하 수로를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

“지하 수로는 어둡고 습했다. 나는 횃불 하나에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오래전에 물이 말라붙은 수로는 한없이 적막했고, 나의 늙은 몸은 슬슬 지쳐 가기 시작했다. 다시 교회로 올라갈 길이 막막해져 이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 무렵, 불현듯 저 끝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의 신음 소리였다.”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야손은 흘끗 눈을 들어 예후르를 확인했다. 그는 변함없이 평온해 보였다. 분노를 씹어 삼키는 야손의 턱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갔다. 신음 소리는 차츰 커져만 갔다. 도대체 누구일까. 지하 수로는 아주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었으며, 베론에는 근 십여 년간 행방이 묘연해졌던 사람도 없다. 나는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

“불안이 극대화될 무렵에 나는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곧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사람의 신음 소리가 지하 수로의 석벽 안을 휘몰아쳤다. 나는 어디서 샘솟았는지 모를 용기로 횃불을 비추어 보았다. 그곳에는… 성도로 올라간 뒤 연락이 닿지 않던 보좌 사제 펠릭스가 피투성이의 끔찍한 몰골로 죽어 가고 있었다.”

“방금 무어라 했습니까, 야손 수도사? 누가 있었다고요?”

재판관이 놀란 기색으로 되물었다. 야손은 꼿꼿이 고개를 세워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성인식에 불려 간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다던 보좌 사제 말입니다.”

“그자가 왜 그곳에….”

재판관이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뜬금없는 인물의 등장에 관중들도 설왕설래가 한창이었다. 점차 짙어지는 의심의 눈초리가 예후르에게로 꽂혀 들었다.

“마저 낭독하겠습니다.”

야손은 다시 일기장으로 눈을 내렸다.

“나는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교회로 돌아왔다. 지금 이 자리에서 기억을 되짚어 보건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펠릭스가 맞았다. 성도로 간 아이가 어찌해 교회 밑바닥에서 죽어 가고 있던 것인가.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이를 알고 계셨던가. 그렇다면 왜 저대로 두신 건가. 어째서 내게 지하 수로로 내려가지 말라 엄명을 내리셨나.”

“…….”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수로로 내려가 보았던 광경을 숫제 기억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보면 안 될 것을 보았다. 지금 이 순간은 내가 눈감는 날까지 죽도록 나를 괴롭히는 기억이 될 것이다.”

“…….”

“다음 일기는 며칠 뒤입니다.”

일기 한 장을 넘긴 야손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성 예리엘 대성당의 성화가 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불을 피우지 못한 카타리나 공작은 처형될 것이라는데, 아마도 지금쯤 성도에선 화형식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문득 지하 수로에서 올라와 급하게 성도로 돌아가셨던 엘피도 공작 전하가 떠올랐다. 혹시 그때 들으셨던 급보가 이것이었을까? 아, 손님이 오신 것 같다.”

“…….”

“일기는 다음 줄에서 다시 이어집니다.”

야손이 일기장을 들어 재판관에게 보였다. 외알박이 안경을 고쳐 쓴 재판관이 인상을 찌푸렸다. 단정하던 필체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손님은 지하 수로로 내려가셨다. 나는 감히 이유를 여쭐 수가 없었다. 어찌하여 이곳에 다시 오신 것인가. 지하 수로로 내려가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 밤이 깊었다. 빗소리가 나를 잠들게 하지 못한다.”

야손은 일기장을 덮고 예후르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이 일기가 작성된 날짜는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돌아가시고 정확히 엿새 뒤입니다. 성도로 돌아오셨던 전하께서 목적지를 알리지 않고 떠나신 뒤지요.”

관중들은 4년 전을 곰곰이 떠올렸다. 한밤중에 의문사했던 카타리나 공작, 며칠 뒤 성궁으로 들이닥치던 용 기병대와 오래지 않아 다시 성궁을 떠나던 용들….

급작스럽게 성도를 떠난 뒤로 엘피도 공작은 약 1년여간 행방이 묘연해졌었다. 조금 전 야손이 읽은 일기의 내용은 오리무중이었던 그의 행방을 알려 주는 단초였다. 깨달음을 얻은 관중들이 못내 얼떨떨한 표정으로 예후르를 주시했다.

“그토록 아끼시던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비명에 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시신조차 확인하지 않으셨지요. 왜 그리 급하게 성궁을 떠나셨던 겁니까?”

“…….”

“전하. 지하 수로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신 겁니까?”

집요하게 캐묻는 소리에도 예후르는 침묵을 고수할 뿐이었다. 얼마간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야손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좋습니다. 그다음 일기를 읽어 드리죠. 한밤중 전하께서 교회를 찾아와 지하 수로로 들어가시고 약 1년이 지난 시점입니다.”

일기가 다시 펼쳐졌다.

“하늘이 유독 흐린 날이었다. 새벽녘에 일어나 환복하고 교회로 나오니, 며칠 전 새로 들어온 보좌 사제가 어느 소성당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물으니, 처음 보는 문이 열려 있다고 했다.”

“…….”

“일순 벼락을 맞은 것처럼 온몸이 굳어졌다. 미친 듯이 잊고 싶었고, 실제로 잊고 지냈던 일들이 다시금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나는 속절없이 그곳으로 다가갔다. 지하 수로로 연결되는 석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찍힌 발자국을 발견한 순간, 나는 그만 졸도하고 말았다.”

관중들이 숨죽인 장내는 고요했다. 야손은 호흡을 고르곤 다시 말을 이었다.

“깨어나고도 나는 한참이나 정신이 없었다. 보좌 사제가 오늘은 휴식을 취하라 간청했지만 지하 수로로 통하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다. 나는 분명 지난해 그 문을 봉해 두었었다. 문틈마다 아교를 꼼꼼히 발라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열 수가 없었을 터.”

종이가 한 장 넘어갔다.

“비 내리는 어느 밤, 홀로 교회를 찾으셨던 그분께선 지하 수로로 내려가 끝끝내 돌아오지 않으셨다. 차마 직접 내려가 확인할 용기가 내게는 없었다. 또한 중앙 교회로 이 사실을 알려 만천하에 지하 수로의 비밀을 폭로할 의기 또한 없었다.”

“…….”

“예기치 않은 순간에 너무나도 위험한 진실을 직면했던 나는 그저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이미 죽을 날만 기다리는 노구에게 진실을 파헤쳐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 따위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수개월을 잠 못 이루며 그분이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던 나는 결국 모든 진실을 묻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위대한 사도시라 하여도 폐쇄된 지하 수로에서 몇 달을 견딜 수는 없었다. 돌아가셨음을 확신하였기에 문을 봉하는 데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나는 잠시 드러났던 진실의 모퉁이가 다시 어둠 속으로 가라앉길 간곡히 바랐다.”

“…….”

“하지만 지하 수로로 통하는 문이 다시 열렸다. 지하에서 걸어 나온 것은 그분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독단으로 진실을 묻으려 했던 내게는 무엇이 진실인지 확인할 의무가 있었다.”

잠시 말을 멈춘 야손이 관중들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일기는 이튿날로 이어집니다.”

종이가 팔락 넘어간다.

“어젯밤 겪은 일을 어떤 식으로 기록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기록하는 것이 맞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도대체 무엇을 본 것인가. 내가 본 것이 맞는 걸까.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아침 해를 맞이한다. 어젯밤의 기억이 내 착오이길 바라지만, 여전히 넋이 나가 있는 보좌 사제의 얼굴을 보니 늙은이의 한낱 소망에 지나지 않는 듯싶다.”

“…….”

“망설임을 이기고 깃펜을 들겠다. 이는 묻혀선 아니 될 진실이다. 설사 내 손으로 진실을 폭로하지 못하게 될지라도, 이 기록을 바탕으로 누군가 진실을 밝혀 주리라 믿는다. 계속되는 서술은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실이며, 사감이 전혀 섞이지 않았음을 미리 밝히겠다.”

집중한 관중들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야손의 엄숙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난밤, 나는 나를 말리던 보좌 사제와 함께 폐쇄된 지하 수로로 내려갔다. 그곳은 여전히 습했다. 나와 보좌 사제의 발소리가 천둥처럼 울릴 만큼 고요했고, 타오르는 횃불로도 발치의 어둠을 거둬 내지 못할 만큼 어두웠다. 나는 일전에 수로로 내려왔었던 기억을 더듬어 나아갔다. 마침내 다다른 막다른 골목에서 나는 두 가지를 보았다.”

“…….”

“첫째는 전(前) 보좌 사제인 펠릭스의 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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