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9화 (249/328)

“그래 봤자 수습 기사 나부랭이잖아. 일단은 보나벤투라 건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보나벤투라를 시작으로 청백회를 시궁창에 빠트릴 거라며?”

“아, 그거라면….”

곧바로 대꾸하려던 클레멘스가 멈칫하며 페기의 눈치를 보았다. 잠시 찻잔을 응시하던 페기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오늘 퀴테리아 추기경의 연설이 있다고 했지?”

“뭐?”

뜬금없는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던 안드레아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광장에서 시민들 대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예정이란 소리는 들었는데.”

“언제 하는지 알아?”

“글쎄… 내가 성도를 나올 때만 해도 조용했으니 지금쯤이면 하고 있겠네.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창밖으로 태양의 위치를 가늠하던 안드레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페기는 계속 만지작거리던 찻잔의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어 올렸다.

“곧 알게 될 거야.”

성도 오스피나의 광장에는 벌써부터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청백회 단원들이 아침부터 성도 곳곳을 돌아다니며 중대한 발표가 있으리라 선동한 탓이었다. 저들끼리 발표 내용을 추측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아직 비어 있는 임시 단상을 곁눈질하며 궁금증을 드러냈다.

문짝처럼 거대한 몸집의 야손이 나타난 것은 그즈음이었다.

어딘가에 다녀온 것처럼 그는 헐레벌떡 광장을 가로질러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한편에는 음습해 보이는 주변 광경과 어울리지 않게 고상한 마차 한 대가 놓여 있었다.

야손은 구겨진 옷자락을 탁탁 털곤 조심스럽게 마차의 문을 열었다.

“예하. 종교 재판소에 다녀왔습니다.”

야손은 깊숙하게 허리를 숙인 자세로 잠자코 퀴테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침묵은 기약이 없었다. 직각으로 굽혀진 허리에서 찌릿한 통증이 올라올 무렵, 퀴테리아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내려앉았다.

“저 사람들은 곧 무슨 소리를 듣게 될지 짐작이나 할까요?”

“…예?”

엉뚱한 대답에 야손이 슬쩍 고개를 들어 올렸다. 퀴테리아의 시선은 골목을 벗어나 광장을 향해 있었다.

“성도의 시민들에게 사도란 살아 있는 천사나 마찬가지입니다. 실상은 그저 평범한 인간의 몸에 천사의 권능이 깃들었을 뿐인데도, 모든 방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특별함을 원하지요.”

“…….”

“하지만 알비야 공작 전하를 보아 알지 않습니까. 결국은 사도도 인간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야손은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질투, 열등감, 비열함과 오만함…. 알비야 공작이 스스럼없이 내비치는 미성숙한 감정의 단면들을 발견할 때마다 그 역시 사도에 대한 환상을 하나씩 접어 갔다.

“시민들도 곧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러러 모셨던 사도가 실은 우리의 적이었음을.”

“깨달음의 과정이 고통스러울까, 그것이 심려됩니다.”

성도 오스피나의 시민들은 가까이서 교황과 사도를 모신다는 자부심이 지대하다.

하지만 그런 자부심은 사도를 높임으로써 사도와 가까운 자신들의 위치를 높이려는 무의식적인 욕망과도 닿아 있었다. 사도의 위상과 성도 시민들의 자긍심을 분리할 수 없는 만큼, 사도를 깎아내리려는 시도는 어찌할 수 없는 거부감을 불러일으킬 것이었다.

고뇌하던 퀴테리아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것을 준비하세요.”

“예? 그것이라면 설마….”

야손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퀴테리아는 야손의 만류도 뿌리치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공개한다고 해서 증거의 법적 효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적이 미리 안다 하여 대비할 수 있는 증거도 아니니, 여기에서 공개하는 것이 맞아요.”

갈팡질팡하던 야손도 퀴테리아의 단호한 명령에는 따를 수밖에 없었다.

수하 몇몇을 데리고 급하게 저택을 다녀온 야손의 품에는 거대한 직사각형의 궤짝이 들려 있었다. 물끄러미 그것을 응시하던 퀴테리아가 이내 마차에서 내려섰다.

시끌벅적하던 광장은 퀴테리아의 등장과 함께 적막해졌다.

자색 추기경 예복을 갖춰 입은 퀴테리아는 검은 수도복 차림의 청백회 단원들을 이끌고 임시 단상 위로 올랐다. 슬그머니 고개를 조아려 예를 차리던 시민들이 역광을 받는 그녀의 호리호리한 전신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무표정한 그녀의 얼굴에선 달리 특이한 사항을 찾아볼 수 없었다.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를 한 차례 둘러본 퀴테리아가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모여 주신 분들께 먼저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오늘 여러분들께 전하고 싶은….”

“보나벤투라 추기경 때문입니까?”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덕분에 퀴테리아의 말이 끊겼지만 누구 하나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다. 애당초 광장에 모인 모두가 보나벤투라에 대한 청백회와 퀴테리아의 입장을 들으러 온 것이었다.

광장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필 원탁의 추기경이, 그것도 청렴과 순결을 강조하던 청백회의 일원이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중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은 삽시에 성도 오스피나를 강타했다. 죄가 폭로된 지 벌써 수일이 지났음에도 보나벤투라를 향한 원성은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며칠 전 청백회의 수도사들이 길가의 노점상을 죽도록 패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죄가 한낱 노점보다 못할 리가 없는데 어찌 청백회는 가만히 침묵하고 있답니까!”

“옳소! 청백회는 기만을 멈추시오!”

이곳저곳에서 야유하는 소리가 빗발쳤다. 청백회 단원들이 좌중의 분위기를 가라앉히기 위해 분주히 돌아다녔지만 소용없었다. 퀴테리아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시민들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거짓된 사도는 물러나라!”

일순 광장의 한구석이 싸해졌다. 야유가 잠시 멈춘 틈으로 이번엔 반대쪽에서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거짓된 사도는 물러나라!”

“물러나라! 진정한 사도께서 저기 계시다!”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 당신이야말로 시대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사도이십니다! 거짓된 사도를 몰아내고 교회를 바로 세워 주십시오!”

광장 곳곳에서 영문을 알 수 없는 함성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민들은 소스라친 표정으로 화들짝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이 너무 많아 고함을 친 자를 식별할 수조차 없었다.

야손이 시퍼레진 얼굴로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틀어쥐었다.

“저딴 저급한 수를 쓰다니….”

살벌하게 중얼거린 그가 휙 주변의 단원들을 돌아보며 외쳤다.

“뭐 해! 당장 저 바람잡이들을 잡아 오지 않고!”

멍하니 상황을 지켜만 보던 청백회 단원들이 그제야 황급히 광장의 인파 속으로 뛰어들었다.

야손은 단원들이 헤매는 광경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사도를 사칭하는 것은 종교 재판에 회부될 수도 있는 중죄. 필시 엘피도 공작 측의 더러운 술수였다.

좀처럼 단원들이 바람잡이들을 잡지 못하자, 야손은 궤짝을 수하에게 맡기고 본인이 직접 인파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미처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퀴테리아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왔다.

“맞습니다.”

야손은 황망히 뒤를 돌아보았다. 임시 단상에 올라선 퀴테리아가 가느다란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저는 거짓된 사도를 몰아내기 위해 지금 이 자리에 섰습니다.”

웅성거림이 커져만 갔다. 야손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회피가 아닌 정면 돌파를 택했다면, 이제 모든 것은 그녀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사도가 더 이상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현실을 여러분들도 느끼고 계실 겁니다. 빈자를 몸소 굽어살피고 고난을 개의치 않는 사도는 이제 없습니다. 작금의 사도들은 밀실에 틀어박혀 음습한 정치판에 골몰하거나,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백성을 돌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개중에는 뒷골목 건달만도 못한 분도 계시지요.”

우우, 야유하는 소리가 힘없이 사그라들었다. 내심 동감하는 시민들도 선뜻 동조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퀴테리아의 발언은 지나치게 위험했다. 자칫 잘못하다간 종교 재판소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사안이었다.

“교회가 예전의 영광을 잃고 비틀대기 시작한 것은 사도가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교회는 역병과도 같은 배덕에 물들었고, 도려낼 수 없는 타락에 시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 타락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누구의, 얼마만큼의 타락이 교회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겠습니까.”

“…….”

“저는 마침내 해답에 도달했습니다.”

퀴테리아의 눈길이 야손에게로 내려앉았다.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던 야손이 퍼뜩 정신을 차리곤 단상 위로 거대한 궤짝을 올렸다. 사람들의 이목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궤짝으로 쏠렸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교회를 병들게 한 근원입니다.”

당당하게 선언한 퀴테리아가 뚜벅뚜벅 걸어와 궤짝을 열어젖혔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궤짝 안을 들여다보던 앞줄의 사람들이 갑자기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짤막한 비명 소리와 영문을 모르는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그러자 야손은 임시 단상 위로 훌쩍 뛰어 올라와, 기꺼이 궤짝을 앞으로 엎어 주었다. 궤짝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던 물체가 풀썩거리며 단상 위로 쏟아졌다. 의아해하던 시민들이 급하게 숨을 들이켰다.

허옇고 불투명한 원통형의 무언가.

딱 잡아서 정체를 단정 짓긴 힘들었으나, 척 보기에도 불길한 기운이 슬슬 풍겨 왔다.

퀴테리아가 단상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이것은 뱀의 허물입니다.”

칼로 자른 것처럼 웅성거림이 멎었다.

퀴테리아는 단상으로 쏟아진 허물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하늘의 여덟 천사를 거스른 죄인이자, 교회의 영원한 숙적.”

“…….”

“우리가 아는 그 뱀 말입니다.”

충격은 시간차로 번졌다. 제일 먼저 허물을 코앞에 둔 앞줄의 사람들이 질겁하여 비명을 질렀고, 뒷줄의 사람들도 불에 덴 것처럼 화다닥 놀랐다. 가장자리의 시민들 중에는 겁에 질려 달아나는 이들도 있었다.

퀴테리아가 손을 들어 시민들의 흐트러진 집중을 모았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그저 한낱 허물일 뿐입니다.”

“그, 그런 걸 대체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그건 법정에서 밝힐 이야기입니다.”

시민들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법정?’하고 중얼거렸다. 퀴테리아는 거침없이 말을 내뱉었다.

“지금 여기서 밝힐 수 있는 것은 이 허물이 3년 전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뱀이 죽은 것이 언제입니까?”

시민들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었다. 뱀이 정확히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저 사방에서 떼로 일어나던 마귀들이 일거에 사라진 시점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아마도 4년 전….”

대답하던 시민이 서서히 몰려오는 충격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퀴테리아는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4년 전.”

“…….”

“하지만 허물은 3년 전에 생겨났지요. 이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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