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8화 (248/328)

“…이것 봐라.”

쏟아지는 말을 멀뚱히 듣기만 하던 안드레아가 한쪽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야, 말단인 네가 아는 게 이상한 일이지. 네가 모른다고 퀴테리아도 몰랐을까? 너도 수도사면 나름대로 배울 만큼 배웠을 텐데 왜 다 짜고 치는 판인 걸 몰라?”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선 그럴 분이 아니십니다!”

“아니, 그러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안드레아가 덥석 어깨동무를 했다.

“내가 뭐 심심해서 너 하나 놀리자고 이러겠냐? 자꾸 보다 보니까 넌 생각보다 착실하고 순진한 놈인데 하필이면 청백회란 마수에 걸려든 게 안타까워서 이러는 거잖냐, 어? 안 그럼 명색이 사도인 내가 왜 맨날 시장 바닥에서 너 같은 놈들이랑 실랑이나 피우겠어?”

“하, 하지만 저는 진심으로 청백회의 사상에 공감한….”

“그러니까 그 사상이란 게 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이거야. 보나벤투라 저 지경으로 털리는 걸 보고도 몰라? 그것들 다 한통속이라니까? 단죄의 천사 마르쿠스 천사님께서 선택하신 이 몸의 눈을 한번 믿어 봐라, 어?”

청백회 단원의 표정이 점차 혼란으로 물들어 갔다. 흘끗 그 모습을 확인한 안드레아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회심의 미소를 지어 올렸다. 안 그래도 뒤숭숭한 청백회를 쉼 없이 찌르고 다니며 분탕을 치는 것이 요새 그녀의 낙이었다.

하지만 그런 얕은 수작으로 단번에 세뇌가 풀릴쏘냐.

머잖아 마음을 다잡은 청백회 단원이 안드레아의 몸을 힘껏 밀어냈다.

“아무리 사도시라 하여도 아닌 건 아닌 겁니다! 더 이상은 전하의 간악한 말씀 듣지 않겠습니다!”

“뭐? 간악한 말쓰음?”

“예, 간악한 말씀이요! 사도라고 어디 다 같은 사도랍니까? 본인을 사도라 칭하실 거라면 사도의 의무부터 다하십시오! 대관절 저 같은 일개 수도사들이 전하를 보며 무엇을 배우겠습니까? 차라리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 같으신 분이 훨씬 존경받을 만한 분이시지요!”

안드레아는 파란 눈을 끔벅였다. 애당초 사도란 지위를 필요할 때만 가져다 쓰는 그녀에겐 타격이라 할 것조차 없는 말이었다. 퀴테리아와 그녀의 자질을 비교하는 것도 너무 많이 들어 이제는 귀에 못이 박힐 지경이다.

“너 그 여자한테 너무 큰 환상을 품고 있는 거 아니냐? 솔직히 너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잖아.”

꿋꿋이 그녀를 노려보던 청백회 단원이 더는 대꾸할 마음이 없다는 듯 휙 뒤돌아섰다. 고집스러운 뒷모습을 잠시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눈을 돌렸다. 주린 배를 문지르며 식당을 찾아 나서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헉, 하고 놀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안드레아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백발이 성성한 노기사가 시장을 빠져나가려던 청백회 단원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가 공작 전하시오. 어서 무례를 사과드리시오.”

한겨울 엄동설한처럼 묵직한 음성이었다. 사도인 안드레아의 앞에선 빽빽 잘만 소리를 지르던 청백회 단원도 노기사의 무시무시한 기세 앞에서는 힘을 못 썼다. 단원은 죽상으로 다가와 꾸벅 고개 숙여 사죄하곤 꽁무니를 뺐다. 안드레아는 멍청한 얼굴로 목을 긁고 있을 뿐이었다.

갓 벼린 칼날처럼 매서운 눈으로 도망치는 단원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노기사가 이내 절도 있는 걸음으로 다가와 안드레아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젊은이의 객기일 뿐입니다. 부디 전하께서 아량을 베풀어 주시지요.”

“안 그래도 꾸짖을 생각은 없었…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신데.”

“근위대장 왈테르입니다.”

우락부락한 인상의 노기사가 다시금 고개를 깊게 숙였다. 두 눈을 끔벅거리던 안드레아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설마 그 할배?!”

“예.”

“내가 술 처먹고 종탑 기어 올라갔을 때 둘러업고 내려왔던?”

“부끄럽게도 그렇습니다.”

“아니, 부끄러워도 내가 부끄러워할 일을 왜 할배가….”

멍하니 중얼거리던 안드레아의 눈에 문득 왈테르 경의 가슴팍이 들어왔다. 안드레아의 표정이 절로 찌푸려졌다.

“뭐야. 할배도 청백회였어?”

“아. 이것 말씀하십니까?”

왈테르가 가슴팍에 매단 파란 장미 브로치를 태연하게 눈짓했다.

“요새 청백회의 수도사들로부터 강론을 듣고 있습니다. 이 브로치를 매달고 있어야 출입을 허가해 준다더군요.”

“아….”

안드레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물렸다.

“거… 그럼 할배도 그쪽 편인가? 청백회 쪽?”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그저 교황 성하를 모실 뿐이지요. 요사이 젊은 근위대원들을 중심으로 청백회의 사상에 심취한 이들이 많아 저도 한 수 배워 보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배워 보니 좀 어때요?”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공감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왈테르는 물 흐르듯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더없이 공손하지만 바늘 하나 들어가지 못할 것처럼 완고해 보이는 태도에 안드레아도 더 이상은 캐묻지 못했다.

그녀는 그길로 성도를 빠져나와 한탄했다.

“근위대가 괜히 그 모양인 게 아니었다니까? 단장이란 작자가 그 모양이니, 부단장인 본시오가 개처럼 설쳐 대지.”

마침 성도 밖 저택에는 예후르와 페기, 클레멘스가 추후의 계획을 상의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

페기는 다짜고짜 찾아와 한탄을 들이붓는 안드레아를 조금 심드렁하게 바라보았다.

“원래도 딱 부러지는 분은 아니셨잖아. 미란테 경이 단장직을 내려놓고 떠났을 때부터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상황이고.”

“아무리 그래도 할망구 하나 사라졌다고 사람이 저렇게 삐딱선을 타나? 검만 휘두를 줄 알지, 원….”

안드레아는 대차게 다리를 꼬며 혀를 끌끌 찼다. 살살 눈치만 보던 클레멘스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이참에 미란테 경을 저희 쪽으로 모셔 오는 것은 어떻습니까? 어차피 은퇴한 야인이시니 소속에 얽매일 일도 없을 테고, 정신 나간 근위대원들을 따끔하게 견제하긴 제격이시지 않습니까?”

“그러잖아도 장미 수도회 쪽으로 연락을 넣어 봤는데, 지금 당장은 성도로 올라오기 힘들 것 같다더군요.”

“미란테 경이? 왜?”

페기의 물음에 예후르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이유는 듣지 못했어. 다만 수도원에 다녀온 수하의 말로는 미란테 경이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고 있다고 해.”

은퇴한 성기사들은 보통 수도원으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여생을 바친다. 미란테도 그리 특별한 경우는 아니었다.

“하지만 양성하는 후학의 수가 백여 명에 이른다면, 어때?”

“…뭐?”

“말 그대로야. 장미 수도회에서 미란테의 가르침을 받으며 밤낮없이 수행에 매진하는 수습 기사들의 수가 백을 상회한다는 보고가 들어왔어. 보통 수도회에 상주하는 견습 기사들이 스물 안팎이라는 걸 생각하면 아주 이상한 일이지.”

페기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수습 기사들의 수는 늘 일정 정도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본대에서 결원이 발생할 경우 수습 기사들을 바로바로 충원하기 때문이다.

심각한 표정으로 아래턱을 매만지던 클레멘스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고 보니 최근 들어 근위대에 인력난이 발생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에페소스 별궁의 순찰을 도맡을 인원이 부족해 치안대에 도움을 요청했다는데, 설마하니 그럴까 싶어 헛소문으로 치부했었지요.”

“아마도 소문이 맞을 겁니다. 수도회에 상주하는 수습 기사들의 수가 배로 늘어났다는 것은 곧 지난 몇 년간 본대에 인력이 전혀 충원되지 않았다는 뜻이니까요.”

“그게 가능해? 아무리 그래도 성궁의 근위대인데. 영감님 호위는 어쩌라고?”

안드레아가 못마땅한 기색으로 끼어들었다. 그녀를 안심시키듯 예후르가 말을 이었다.

“레오의 안위는 근위대의 생명 줄이나 마찬가지야. 레오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비난의 화살은 곧장 근위대를 향할 테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레오만큼은 안전하게 지키려 들 테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안드레아가 꿍얼거리며 다시 몸을 소파에 푹 파묻었다. 예후르는 페기와 클레멘스를 차례로 돌아보았다.

“지금 중요하게 봐야 할 건 근위대와 장미 수도회 사이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근위대는 본디 장미 수도회 소속의 장미 기사단. 지금까지 수도회와 발맞추어 같은 방향으로 움직였던 근위대에 마르코스 본시오란 이물질이 끼어들면서 사이가 삐걱거리기 시작한 거죠.”

어릴 적부터 장미 수도회로 들어가 철저하게 교육받는 여타의 근위대원들과 달리, 본시오는 고향조차 불분명한 라발의 용병대 출신이었다. 단장인 왈테르가 허수아비로 전락한 이래 근위대는 본시오의 손아귀로 들어갔으니, 유연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미 수도회의 완고한 성직자들이 그것을 두고 볼 리 없었다.

안드레아가 이죽거렸다.

“하긴, 지금이야 부단장이란 감투 잘 쓰고 있지만 한때는 성도로 쳐들어왔던 용병이었지. 장미 수도회의 노인네들이라면 옛날의 그 꼴을 다 기억해서 라발 쪽은 쳐다도 보지 않을 텐데, 본시오의 꼭두각시로 전락한 지금의 근위대를 보면서 얼마나 속이 쓰리시겠어.”

라발 운운하는 소리에 클레멘스가 불편한 기색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뭐어… 어찌 되었든 성궁의 호위라는 중차대한 문제가 걸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미 수도회가 인력을 충원해 주지 않는 건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아시다시피 장미 수도회는 사도를 향한 광신적인 신앙으로 유명하지요. 젊은 근위대원들이 청백회의 사상에 속절없이 심취하는 것도 분명 장미 수도회와 닮은 부분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장미 수도회나 청백회나 올바른 신앙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주저 없이 내놓을 광신도들.

하지만 그 결은 분명히 달랐다.

“장미 수도회의 신앙이 오직 사도를 향한다면, 청백회의 신앙은 퀴테리아가 주장하는 개혁이란 기치에 닿아 있어요. 장미 수도회는 아마 청백회를 이끌며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이 사도가 아닌 것을 우려하고 있을 거예요. 더 이상의 인력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근위대의 충원 요구를 거절해 왔을 거고요.”

페기의 분석에 안드레아가 후다닥 끼어들었다.

“안 그래도 자꾸 그놈들이 나보단 퀴테리아가 사도에 더 걸맞는단 소리를 하더만?”

“그런 반응을 걱정했겠지. 교회는 사도가 아닌 존재의 우상화를 철저히 배격하니까.”

페기는 예후르를 돌아보았다.

“일단은 장미 수도회와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좋겠어. 장미 수도회가 청백회를 배척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줄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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