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6화 (246/328)

“확실해.”

“그런데 쟤네가 왜 저렇게 나와? 시험장에서 불 못 피우면 끝이잖아.”

예후르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응시하는 옆얼굴에 깊게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멋쩍은 듯이 머리를 연거푸 쓸어 넘기던 안드레아가 발길을 돌렸다.

“아무튼 난 이만 간다.”

“함께 안 가십니까?”

마차에 탈 준비를 하던 클레멘스가 의아한 기색으로 물어 왔다. 뒤돌아보지 않고 손만 흔드는 안드레아를 대신해 예후르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안드레아는 따로 할 일이 있습니다.”

그러자 클레멘스와 글리체리아의 얼굴에는 더더욱 의문이 서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탁에서 병든 닭처럼 졸기만 하던 안드레아는 비로소 생기가 도는 모습으로 성큼성큼 성궁을 빠져나갔다.

대로로 들어서자 자연스레 그녀에게로 이목이 쏠렸다.

늘 원탁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벗어 던졌던 자색의 치렁치렁한 추기경 의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데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적발까지 길게 풀어 두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잖아도 기사처럼 큰 키에 어깨가 떡 벌어진 체구, 게다가 특유의 강인한 인상까지 곁들여져 안드레아는 지금 그 누구보다 번쩍번쩍 빛나고 있었다.

훤한 대로보다는 좁다랗고 지저분한 골목길, 단숨에 쏠리는 이목보다는 은밀하게 오가는 시선을 선호하던 안드레아였다. 그러나 오늘만은 웬일로 사방에서 쏟아지는 주목을 즐기며 대로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심지어는 따라와 보라는 듯 뒤를 돌아보며 히죽 웃기까지 했다.

성궁에서부터 시작된 술렁거림은 안드레아의 발걸음 뒤로 차곡차곡 쌓여 갔다. 사람들은 보기 드문 원탁 추기경의 행차에 놀라고, 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망나니 사도라는 사실에 또 한 번 까무러쳤다. 할 일 없는 거지들, 장을 보러 나온 시민들, 파리만 날리던 상인들 모두가 슬금슬금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름 같은 인파를 거느리고 안드레아가 향한 곳은 바로 청백회의 본거지였다.

안드레아는 자색 망토를 멋있게 휘날리며 힘껏 소리쳤다.

“여기가 바로 납치범을 길러 내는 곳인가?”

흥미롭게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놀라서 숨을 헙 들이켰다. 안드레아는 신이 나 목청을 더 돋우었다.

“아니지, 강간범도 기르는 곳이지! 협박에 폭행에 아주 못 하는 짓이 없는 곳이야!”

안드레아가 배꼽을 잡으며 낄낄거렸다. 몸을 흔들거리는 모양새가 흡사 만취한 주정뱅이 같았으나 누구도 감히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녀에게선 맹수와 같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대문이 따가운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고래고래 욕을 내지르던 안드레아가 그제야 사납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무시무시한 표정의 야손이 손수 대문을 밀며 나오고 있었다.

“누군가 했더니 퀴테리아의 졸개잖아? 야, 주인이 고기는 제대로 챙겨 주든?”

“…돌아가십시오. 아무리 전하라 하셔도 이렇게 함부로 모욕하실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야손이 분을 꾹 눌러 참으며 말했다. 실실거리며 다가간 안드레아가 검지로 그의 어깨를 쿡쿡 밀었다.

“야, 이 모자란 새끼야. 내가 틀린 말 했냐? 너희가 극진히 모시던 보나벤투라 추기경께서 납치에 감금에 강간에 학대까지, 아주 조목조목 다 해 드신 걸 나보고 어쩌라고?”

“…아직 법정에서 판결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함부로 예단하지 마십시오.”

“오, 그러니까 너는 보나벤투라를 믿는단 말이지? 이상하네. 너희 원래 사이 더럽게 안 좋았잖아.”

야손에게 바짝 달라붙은 안드레아가 붉은 입술을 찢으며 속삭여 왔다.

“아니면 퀴테리아가 보나벤투라를 믿는 건가?”

야손은 더 상대하기도 싫다는 양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안드레아는 개의치 않고 속삭였다.

“대충 어떤 말로 널 구워삶았을지는 대충 예상이 돼. 넌 단순한 녀석이니까 퀴테리아의 세 치 혀라면 네 마음쯤은 순식간에 뒤집어 놓았겠지.”

“…예하께선 그런 분이 아니십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야손의 어깨를 찌르던 손가락이 스르르 올라가 그의 팔을 은근하게 쓸었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가 사적으로 무슨 관계인지… 네가 알아?”

순간 야손의 안색이 뒤바뀌었다. 관자놀이에 굵은 핏대가 서면서 시뻘건 분노의 기운이 목에서부터 번져 왔다.

“무슨 헛소리를…!”

야손은 거칠게 안드레아를 밀쳐 내려 했으나, 안드레아는 가볍게 폴짝 뛰어 그의 손길을 피했다. 순식간에 뒤로 멀어진 그녀가 보란 듯이 낄낄거렸다.

“하여간 덩치만 큰 놈들은 이 속도감이 부족해. 야, 주먹질을 할 거면 좀 제대로 해 봐!”

“그만하십시오! 사도라는 분께서 어찌 같은 원탁 추기경을 그리 속된 말로 모욕하십니까!”

“내가? 모욕? 누굴?”

양팔을 펼친 안드레아가 정말로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어?”

“…….”

“야, 노려보지만 말고 말을 좀 해 봐. 내가 방금 너한테 뭐라고 했냐고.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야손이 이를 갈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안 그래도 요즘 하는 일마다 풀리지 않아 짜증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저 망나니까지 자꾸 건드리니 아주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돌아가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아, 가든 말든 내 맘이라고. 네가 뭔데 나보고 돌아가라 말라야? 퀴테리아가 그리 가르쳤냐? 윗사람한텐 예의를 말아 먹어도 좋다고?”

“왜 자꾸 예하를 들먹이십니까!”

참다못한 야손이 폭발했다.

“예하께서 얼마나 청렴하고 고고하신지는 만천하가 다 압니다! 그리 저속하게 비난하셔 봤자 예하의 명성에는 조금도 누가 가지 않습니다! 애당초 그분은 당신 같은 분이 함부로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이 아니란 말입니다!”

“나 같은 분? 그게 뭔데?”

안드레아가 팔짱을 끼며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마치 더 할 수 있으면 해 보라는 듯 부추기는 모양새였다. 나는 고귀한 사도이며, 너는 한낱 수도사. 너는 더 할 수 없노라 미리 재단하여 업신여기는 기색이 너무나도 적나라했다.

그러자 야손도 더 이상은 목구멍에 걸린 말을 눌러 참을 수가 없었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순간의 격류에 휩쓸리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이 전하를 보고 무어라 지껄이는 줄이나 아십니까? 교회를 욕보이는 망나니라 합니다! 도저히 고귀한 사도로는 보이지 않는 그 저속한 행동거지 때문에요! 전하 같은 분보다야 차라리 퀴테리아 추기경 예하께서 훨씬 더 사도에 어울리시는 분입니다!”

“…오.”

예상보다 세게 나온 말에 안드레아가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괴팍한 성미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었던 구경꾼들도 당혹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명색이 사도와 청백회의 행동 대장. 이대로 두 사람이 충돌한다면 자칫 심각한 일로 비화되는 수가 있었다.

한편, 먼 그늘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전하. 이만 가셔야 합니다.”

막시모의 재촉에도 페기는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녀의 시선은 야손과 대치하는 안드레아에게 못 박혀 있었다.

“…막시모. 둘이 싸우면 안드레아에게 승산이 있을까요?”

“마가 공작 전하 말씀입니까?”

막시모가 눈을 가늘게 뜨고 야손과 안드레아를 살폈다.

“힘으로는 상대가 안 되시겠지만 싸움에 힘만 있는 건 아니니까요. 싸움이 붙어도 체면을 구기실 일은 없을 겁니다.”

“…하긴. 안드레아라면 그러고도 남겠죠.”

페기가 옅게 웃으며 발길을 돌렸다.

안드레아가 일부러 사람들을 몰고 와 보란 듯이 야손에게 시비를 건 것은 페기의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나마 청백회의 이목을 끌어 줄 사람이 필요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눈길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이런 일엔 안드레아가 제격인 듯했다.

페기는 소란스러운 정문 쪽을 피해 음습한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감싼 그녀에게로 뒷골목 걸인들의 은근한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그녀를 철통같이 방비하는 막시모에게서 심상찮은 기운을 읽고는 얼른 눈길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고불고불한 골목을 수없이 꺾어 들어가자 막다른 길이 나왔다.

높은 담벼락 앞에는 검은 수도복 차림의 깡마른 여자가 뒤돌아 서 있었다.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페기가 한 발짝 다가서자, 인기척을 느낀 여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여뻤던 얼굴이 온통 화상 자국으로 뒤덮인 여자.

알틴이었다.

“…전하.”

알틴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밑바닥 태생답지 않은 우아한 행동거지는 오래전 그녀를 모셨던 시절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았다. 그러니 타국에서 귀부인 행세도 할 수 있었을 테지만.

페기는 얼굴을 가리는 로브 자락을 더욱 깊숙하게 끌어 내렸다.

“지낼 만은 하니?”

“어디든 사람 사는 곳인 것을요. 어쩐 일로 부르셨나요?”

얌전히 고개를 숙인 알틴의 모습에서 채 감추지 못한 초조한 기색이 묻어났다. 하기야 지금 이 광경을 청백회 누구에게라도 들킨다면 당장에 목이 날아갈 테니 두려워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안드레아라 하더라도 야손 같은 덩치를 계속 감당하기는 힘들 터.

어차피 페기도 알틴을 오랫동안 붙잡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힘들게 심은 첩자의 존재를 들킬 위험성을 부담하면서까지 알틴을 밖으로 불러낸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가져가렴.”

페기는 품속에서 서류 더미를 꺼내 내밀었다. 조심스레 서류를 받아 든 알틴이 슬그머니 눈을 들어 올렸다.

“이게 무엇인가요?”

“네가 앞으로 해야 할 일.”

서류를 쥔 알틴의 손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 페기는 무심히 시선을 돌렸다.

“일전에 퀴테리아 추기경의 전속 보좌로 들어갔다고 보고했었지.”

“전속 보좌는 저 한 명이 아닙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말단일 뿐이고….”

“퀴테리아 추기경의 집무실에는 드나들 수 있을 것 아니니?”

페기의 반문에 알틴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페기는 서류를 턱짓했다.

“퀴테리아에게 중죄를 뒤집어씌울 중요한 증거 자료이니, 집무실에 잘 숨겨 놓으렴.”

“…이 일만 잘 해내면 절 이곳에서 꺼내 주실 건가요?”

알틴이 간절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알틴의 시선을 가만히 마주하던 페기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네가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건 오직 청백회가 무너졌을 때 뿐이란다.”

긴장감이 역력하던 알틴의 표정이 순간 절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페기가 미련 없이 돌아서려 하자, 알틴이 다급히 그녀의 소맷자락을 붙들어 왔다.

“제, 제 아들은요. 제 아들은 잘 지내나요?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페기는 매정하게 알틴의 손길을 뿌리치곤 골목을 떠났다.

홀로 남겨진 알틴이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화상 자국이 흉하게 얽힌 얼굴 위를 흘러내린 눈물이 손등을 적시기 시작했다. 그녀는 손에 쥔 서류가 구겨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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