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328)

보나벤투라가 벌건 얼굴로 목에 굵은 핏대를 세웠다. 저택으로 들어가려던 퀴테리아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너, 너희가 날 이렇게 쓰레기처럼 내버릴 순 없어…. 죽어도 혼자선 못 죽지. 내가 법정에서 무슨 망언을 퍼트릴지 무섭지도 않아? 어?!”

“이, 이 늙은이가 미쳤나…!”

눈썹을 파르르 떤 야손이 홧김에 주먹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에게 내지르기도 직전, 불쑥 튀어나온 가느다란 손길에 가로막혔다.

“물러나요, 야손.”

“…예하?”

야손의 주먹을 잡은 퀴테리아가 말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야손은 몹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와 보나벤투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마치 예상 못 한 배신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다.

야손이 보나벤투라의 멱살을 잡은 손을 풀지 않자, 퀴테리아가 다시금 엄숙하게 일렀다.

“물러나요.”

야손은 그제야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무지막지한 힘에서 벗어난 보나벤투라가 힘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혼자서 일어나실 수는 있겠죠.”

퀴테리아가 찬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들어오시죠.”

퀴테리아는 그 말을 끝으로 등을 돌렸다. 열리는 대문을 맥없이 응시하던 보나벤투라가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보나벤투라의 등 뒤로 맹수처럼 시뻘겋게 달아오른 야손의 시선이 꽂혀 들었다.

청백회의 본거지는 오늘도 고요했다.

아직 에페소스 별궁에서의 소식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간간이 복도를 오가는 단원들도 보나벤투라의 더러운 행색에만 슬쩍 눈길을 보낼 뿐 별다른 수군거림이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미로처럼 이어진 복도를 걸어 퀴테리아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가던 퀴테리아가 멈칫했다.

“…게롯타?”

화상 흉터로 얼굴이 죄 망가진 여인이 집무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퀴테리아는 슬며시 눈썹을 찌푸렸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아, 그게… 어제 명하셨던 서류 작업을 좀 하려고….”

게롯타는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아뢰었다. 퀴테리아는 지끈하게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건 야손에게 물어요. 이곳은 함부로 드나들어선 안 되는 곳입니다.”

“죄, 죄송합니다.”

화들짝 놀란 게롯타가 황급히 문가로 뒷걸음질했다. 그러다 막 집무실로 들어서던 보나벤투라와 마주치곤, 멀뚱거리며 퀴테리아를 다시 돌아보았다.

“예하. 따뜻한 차를 올릴까요?”

“괜찮으니 가서 일 봐요.”

“예….”

게롯타가 나가자, 집무실에는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단둘만이 남았다. 느릿하게 소파에 앉은 퀴테리아가 아직도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매만지며 조용히 운을 뗐다.

“방금 나간 게롯타는 올해 입단한 단원들 중에선 단연 돋보이는 수도사입니다. 손이 야무지고 영특해서 어떤 일이든 잘 해내죠. 고행을 비롯한 수련에도 아주 열심이고요.”

자리를 권유받지 못한 보나벤투라는 엉거주춤 서서 불안하게 눈알을 굴릴 뿐이었다. 탁상을 맴돌던 퀴테리아의 시선이 미끄러지듯 흘러가 그에게 닿았다.

“그대도 고행에 참 열심이었다는 것을 압니다.”

“마, 맞소!”

기다렸다는 듯 달려온 보나벤투라가 퀴테리아의 발치에 철퍼덕 엎어졌다.

“내 지금이라도 어젯밤 고행의 흔적을 내보일 수 있소! 나, 난 그저 마녀가 다른 죄 없는 사람들을 홀릴까, 그것이 저어되어 마녀를 감금해 두었던 것뿐이야! 지난 수십 년, 자진하여 마녀를 내 집에 가두고 옥지기 노릇을 했는데, 그것이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마녀를 도맡기만 하신 것이 아니지요. 마녀와 사통하여 아이를 배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그건, 마녀가 사, 사특한 술수를 부려서…!”

퀴테리아가 딱하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찼다.

“지금 그 말이 법정에서 먹히리라 보십니까? 그 사생아의 얼굴이 그대를 아주 빼닮았던데요. 사람들이 알아볼 것이 두려웠다면, 세상의 이목을 피해 멀리 보낼 것이 아니라 아이의 얼굴을 불로 지져 놓으셨어야지요.”

“나… 나의 불찰이오…. 내가 실수하여….”

보나벤투라가 황망히 눈을 떨구었다. 퀴테리아는 들으란 듯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 실수를 탓해 무엇

하겠습니까. 이미 사생아와 마녀는 저들의 손아귀에 있는 것을요. 아무리 교황 성하라 하여도 그대를 구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극형이나 피하면 다행일까요.”

느긋하다 못해 따분하게까지 들리는 어조였다. 멍하니 바닥을 주시하던 보나벤투라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래서 나를 끝내 버리겠다고…?”

“…….”

“아, 아직 두 번째 시험이 끝나지 않았소. 원탁의 투표가 이루어지지 않았으니… 내, 내 한 표가 귀중한 상황이 아니오? 이, 이대로 나를 버렸다간….”

퀴테리아는 그저 빤한 눈길만을 보냈다. 보나벤투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다섯씩으로 양분된 원탁.

그러나 그 중심에는 중립을 지키는 교황이 있었다.

“교황 성하께선 어떻게든 시험을 마지막까지 끌고 가려고 하십니다. 가엾게도 알비야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모두를 살릴 궁리만 하고 계시지요.”

퀴테리아가 우아하게 다리를 꼬았다.

“법정에 고발된 그대의 죄목은 납치 및 강간과 강제 구금. 용납할 수 없는 중죄인 만큼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성직자로서 그대의 모든 직위는 무기한 해제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상관없어요. 알비야 공작 전하와 카타리나 공작 모두 두 번째 시험을 무사히 치렀다는 성하의 의견에 발맞추면 되니까.”

그러면 보나벤투라의 한 표가 빠진 자리를 교황 레오폴트가 채우게 된다. 결과는 5 대 5. 하지만 동률일 시 교황의 표를 우선한다는 천계율에 따라 알비야 공작과 카타리나 공작은 모두 두 번째 시험에서 통과할 것이다.

본디 청백회가 우선하던 목표는 두 번째 시험에서 알비야 공작만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뜻밖의 보나벤투라란 암초에 걸리면서 기존의 목표만을 고집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교황과 일시적으로 손을 잡는 것은 어찌 보면 현실과의 타협이었다.

하지만 그로써 보나벤투라란 치명적인 약점을 버리고 갈 수 있으며 동시에 권능을 둘러싼 시험에서도 실익을 챙길 수 있다. 청백회로선 절대 나쁜 결과가 아니었다.

“내 입이 두렵지도 않으시오…?”

보나벤투라가 절망적인 얼굴로 입술을 달싹였다.

“죽어도 혼자 죽지 않겠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소…. 법정에서 난 내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털어놓을 것이오. 이를테면 내가 어떻게 마가 지방과 페란 지방의 세금을 청백회로 빼돌렸는지….”

“나는 모르는 일이라 잡아뗄 것입니다.”

“증거가 있소!”

“중앙 교회로 들어왔어야 하는 세금을 그대가 빼돌린 증거겠지요. 나는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그대의 기부금을 받았을 뿐입니다.”

퀴테리아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눈만 깜박였다. 바닥을 짚고 있던 보나벤투라의 손등에 시퍼런 혈관이 섰다. 절벽으로 내몰린 보나벤투라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외쳤다.

“그럼 그대가 사용하는 정체 모를 약초는 어떻겠소!”

느른하게 늘어져 있던 퀴테리아가 흠칫하며 허리를 곧추세웠다. 희망을 본 보나벤투라가 열띤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상한 약초를 태워 새들을 졸도시키잖소! 그렇게 염탐했던 전서구만 몇 마린가! 천사가 깃드셨다 하여 새 사냥도 금지하는 성도에서 감히 그런 짓을 용납할 것 같소?”

“증거가 없을 텐데요.”

“증거가 없으면 어떠한가. 그대의 명성에는 충분히 먹칠할 수 있겠지.”

보나벤투라가 온몸을 덜덜 떨며 히죽거렸다.

“세금 문제도 마찬가지요. 그래, 내가 가진 증거로는 오직 세금을 횡령한 나의 죄만을 입증할 수 있겠지. 하지만 난 이미 지금 지목받고 있는 죄목만으로도 중형을 피하지 못할 터. 죄 한두 가지가 더 추가된다 하여 달라지는 것이 있겠소? 가는 길에 그대의 고결한 이름도 데려갈 뿐이지!”

본디 더러운 자에겐 커다란 허물도 아무렇지 않게 보이는 법이다. 하지만 퀴테리아처럼 고결한 이에겐 티끌만 한 허물도 거대하게 보일 수가 있었다.

퀴테리아는 다시금 뻐근하게 아파 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두 눈을 내리감았다.

다른 때라면 무시했겠으나 지금은 말 하나, 행동 하나가 중요한 때였다. 적어도 비올라의 위상이 다시 단단해질 때까진 저 못난 자의 입을 막아 놓아야만 했다.

“…좋습니다. 도와드리죠.”

보나벤투라의 얼굴에 순간 화색이 돌았다. 퀴테리아는 한숨처럼 말을 이었다.

“하지만 조건이 있습니다.”

“마, 말씀하시오!”

보나벤투라가 자세를 바로 했다.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겠다는 기세였다.

“엘피도 공작이 법정에서 내세울 가장 강력한 증거는 피해자들의 증언입니다. 마녀와 그대의 사생아, 그 두 사람 말입니다.”

보나벤투라는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그의 은혜도 모르고 뒤통수를 친 천하의 배은망덕한 연놈들이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두 사람을 빼돌리는 겁니다. 아예 증언을 못 하게 만드는 것이죠. 하지만 엘피도 공작이 현재 머물고 있는 성도 밖 저택은 용들이 밤낮없이 지키고 있습니다. 근위대의 정예 기사들도 그곳으로 숨어들긴 무리에요.”

“그, 그러면…?”

“기회는 단 한 번뿐입니다. 재판이 열리는 날.”

퀴테리아의 찬 눈이 그에게로 흘끗 내려왔다.

그 말인 즉, 증인들이 저택을 벗어나 성도로 들어오는 날.

“용은 성도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성도를 무너트릴 생각이 아니라면요. 당연히 끔찍한 이교도 병사들이 증인들을 호위할 것인데, 그쯤이면 우리가 가진 병력으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습니다.”

“…….”

“증인들은 내가 잡아 오겠습니다. 그대는 직접 증인들을 처단하십시오.”

보나벤투라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퀴테리아의 붉은 입술이 요사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일찍부터 그렇게 해야 했습니다. 사람을 홀리는 마녀와 마녀가 낳은 아이…. 어떤 이들은 존재 자체가 죄가 되는 법입니다. 그런 죄는 당연히 죽음으로 사할 수밖에요.”

“내가 직접…?”

“예, 그대가 직접.”

퀴테리아의 길쭉한 손가락이 보나벤투라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그대가 손수 처단함으로써 내게 입증하십시오. 그대는 마녀에게 홀리지 않았다는 것을.”

“…….”

“그리만 하신다면 내 그대의 안전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퀴테리아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에 쐐기처럼 박혀 들었다. 보나벤투라는 멍하니 눈만 끔벅였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바닥인지, 벽인지도 구분이 되질 않았다. 맥을 못 추리는 고개가 자꾸만 아래위로 흔들거렸다.

“자, 고민은 사가에서 하십시오. 현명한 선택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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