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3화 (243/328)

훗훗할 정도로 장작을 땐 방 안에선 알싸한 약초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페기는 침대로 다가가, 에피파나 수도사를 돌보던 하녀에게 조용히 물었다.

“상태는?”

“온몸에 멍 자국과 찰과상이 심하지만 꾸준히 치료하면 문제는 없을 거라고 해요. 아마 내일쯤엔 정신을 차리실 거라고 합니다.”

페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곤히 잠든 에피파나 수도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광대가 툭 불거질 만큼 여윈 여자였다. 풍성한 갈색 머리채에선 아름다운 윤기가 흘렀으나, 두 눈 감은 얼굴에선 깊이를 알 수 없는 고단함이 묻어났다. 그간의 고초를 생각하면 달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페기는 흐트러진 이불을 고쳐 주곤 다시 방문 쪽으로 다가갔다. 오르코는 여전히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었다.

“곧 깨어나실 거예요.”

애타게 방 안쪽을 들여다보기만 하던 오르코가 어깨를 움찔했다. 페기는 나지막한 속삭임으로 부드럽게 그의 등을 떠밀었다.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밖에 나오신 거니 많이 놀라셨을 거예요.”

“…….”

“깨어나실 때까진 옆을 지켜 드려요. 그대의 얼굴을 봐야 에피파나 수도사도 조금 안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오르코가 이내 마음을 다잡곤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갔다. 페기는 서서히 닫히는 문틈으로 잠든 어머니를 조금 낯설게 바라보는 오르코를 확인했다.

사춘기가 시작될 즈음부터 먼 시골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고 했다. 그 후로는 한 번도 어머니를 보지 못했으니, 아무리 그녀를 걱정하고 위하는 마음이 크다고 한들 막상 태연하게 대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두 사람이 시간을 들여 해결할 문제였다. 페기는 천천히 침대로 다가서는 오르코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곤 시선을 돌렸다.

언제 왔는지, 막시모가 안드레아의 곁에 공손하게 서 있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는 접견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만 가시지요.”

“지가 뭔데 오라 가라야….”

졸지에 오르코와 함께 에페소스 별궁 앞에 덩그러니 남겨졌던 앙금을 잊지 않은 안드레아가 불쾌한 기색을 고스란히 내비쳤다.

그러자 막시모는 본능적으로 몸을 굳혔다. 지금이야 휴전 상태지, 본디 예후르와 안드레아는 사이가 나쁘다 못해 파탄 난 관계였다. 막시모만 해도 두 사람의 싸움에 억울하게 휘말린 전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안드레아도 페기를 당해 낼 수는 없었다.

안드레아의 소맷자락을 꼭 붙잡은 페기가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드레아가 신경질적으로 뿌리치려는 시늉을 하자, 도리어 그녀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기까지 했다.

안드레아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욕지거리를 작게 뇌까렸다. 언제 폭발할지 모를 그녀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막시모가 눈치껏 페기를 말리려 들었다.

“저기, 전하….”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기나긴 한숨을 내쉰 안드레아가 터덜터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페기는 놀랍지도 않다는 기색으로 태연하게 그녀를 뒤따랐다. 오직 막시모만이 벙찐 얼굴로 두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접견실에서 예후르는 수하들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안으로 막 들어서던 페기는 어렴풋이 들려오는 차라의 이름에 귀를 쫑긋 세웠다.

“…차라 도련님께서… 아마도 그 책에….”

잠자코 보고를 듣던 예후르가 문가에 멀뚱히 서 있는 페기를 발견하곤 수하에게 손을 들어 보였다.

“나머지는 다음에 듣도록 하지.”

“예.”

수하들이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우르르 접견실을 빠져나가는 수하들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페기가 예후르에게 물었다.

“차라한테 무슨 일 있어?”

그러고 보니 차라를 못 본 지 오래였다. 그녀는 헤렌잘 마을로 떠나기 직전, 성 나르세스 광장에서 보았던 차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때 차라는 어딘가에 넋을 빼앗긴 듯한 모습이었다.

“혹시 어디 안 좋은 거면….”

“그런 거 아니야. 요새 고서에 빠진 모양이더라고.”

“고서에?”

예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페기는 곧 순순히 수긍했다. 차라는 못 말리게 게으른 것 같다가도 어느 하나에 빠지면 정신없이 몰두하는 경향이 있었다. 책에 빠져 식음이나 전폐하지 않고 있으면 다행이었다.

“내가 잘 돌보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예후르는 페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소파로 이끌었다. 해괴하단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안드레아가 못 볼 것을 봤다는 양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떡할 건데. 이대로 법정에서 보나벤투라 먼저 아작 내게?”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보나벤투라 하나로 만족하겠어.”

페기의 단호한 대답에 안드레아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하지만 페기는 진심이었다.

“마지막 시험이 내 승리로 마무리되면, 청백회로선 정변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다른 방도가 없어. 실제로도 성도에서 군사적인 충돌이 일어나면 초반에는 청백회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거야. 그들에겐 근위대와 치안대가 있지만, 우리에겐 기껏해야 일부 경비대뿐이니까.”

누가 뭐래도 교국의 핵심 병력은 근위대였다. 근위대를 맡고 있는 장미 기사단은 모두가 혀를 내두르는 혹독한 훈련을 통해 내로라하는 정예 기사들을 키워 냈다. 거기에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적인 신앙이 바탕이 되어, 수백 년 가까이 전 대륙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었다.

사막의 전사들인 이스파갈족도 물론 용맹함에서는 밀리지 않았다. 비록 교국의 방비를 위해 경비대장 몬틸로 백작이 이끌고 온 병력은 총 경비대의 삼분지 일밖에 되지 않지만, 지금도 단순한 머릿수로는 근위대와 엇비슷했다.

문제는 장소였다.

성도 오스피나는 근위대와 치안대의 오랜 거점이었다. 비축해 둔 무기와 식량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며, 시가전이 벌어졌을 때의 이점도 분명 그들에게 있었다. 성도의 시민들이 아직 사막의 이민족들에게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도 큰 문제였다.

“용은… 젠장, 못 쓰겠군.”

반박하려던 안드레아가 괜스레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페기는 쓰게 웃었다.

성도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 각오가 아니고서야 용을 투입하기는 어려웠다. 주 무기인 용을 이용해 승리를 쟁취하려면 성도를 봉쇄하여 장기전으로 끌고 가야 하는데, 그러면 교황 레오폴트를 비롯한 성도의 수만 시민들을 버리는 격이 된다. 국내외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비난이 쏟아질 것이었다.

“성도에서 군사를 일으키는 건 우리나 청백회나 큰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어. 그걸 아니까 청백회도 지금까지 얌전하게 있던 거고.”

“…….”

“하지만 알비야 공작이 시험에서 탈락한다면 청백회로선 그 수밖에 없겠지.”

결국에 장기전으로 이어진다면 청백회는 필시 패배할 터. 그러나 페기에게 돌아오는 것 역시 상처뿐인 승리였다.

군사를 일으키고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단시간 내에 청백회를 제압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선 불가능했다. 장소, 물자, 하다못해 불리한 곳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유리하게 이끌어 줄 수 있는 시민들마저 온전히 끌어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제공격을 하면 되잖아.”

“예후르는 이미 사막 출신이라는 문제와 천사의 성상을 베어 넘겼던 일로 규탄을 받고 있어. 훗날 예후르가 교황이 되었을 때를 생각한다면, 선제공격은 최대한 피하는 것이 좋아.”

그러잖아도 성도의 시민들은 과거 라발 용병단에게 짓밟혔던 오스피나 참극을 악몽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만일 누군가 또다시 성도에 피바람을 일으킨다면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진 않을 터. 훗날 교황이 되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헤쳐 나가야 할 예후르에겐 여러모로 부담이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은 어떻게든 청백회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주력해야만 한다. 선제공격은 그 모든 시도가 실패했을 때 마지막으로 꺼내 들 수 있는 카드였다.

“보나벤투라는 오래전부터 퀴테리아와 청백회를 지지했던 인물이야. 퀴테리아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보나벤투라와 선을 긋고 싶어 하겠지만, 그 오랜 시간 청백회에 깊게 관여했던 인물을 한순간에 뿌리 뽑기는 어렵겠지.”

“그래서 보나벤투라를 이용해 청백회에 직접적인 타격을 주겠다?”

페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나벤투라는 청백회가 지닌 수많은 결점을 만천하에 드러낼 수 있는 일종의 화약이었다. 마지막 시험을 목전에 둔 상황인 만큼 어떻게 해서라도 청백회란 화약고를 터트려 치명타를 입혀야만 했다. 보나벤투라는 청백회를 폭발시키기 위한 발화에 불과했다.

“페기의 말이 맞아. 퀴테리아는 버리고 싶고, 보나벤투라는 어떻게든 매달리고 싶겠지.”

나른하게 턱을 괸 예후르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퀴테리아에겐 유감스럽게도 보나벤투라는 야손처럼 단순히 그녀의 오른팔은 아니었어. 그보다는 청백회가 중앙 교회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지원하고 조력했던 뒷배에 가까웠지. 아마 청백회의 민감한 기밀들을 많이 알고 있을 거야.”

“궁지에 몰렸으니 이제 그걸 가지고 협박하겠네.”

안드레아가 신나게 이죽거렸다. 예후르도 비웃듯이 동조했다.

“보나벤투라를 버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겠지만, 글쎄, 쉽지 않을 거야. 약점을 잡힌 퀴테리아는 어쩔 수 없이 보나벤투라를 보호하려 들겠고…. 하지만 그 관계가 예전 같을 수는 없겠지.”

한번 어긋난 신뢰를 접붙이기란 깨진 사기 조각을 붙이는 것보다 어렵다.

더욱이 보나벤투라의 협박으로 재개될 관계가 건강할 리 없었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사이에는 끝없는 의혹과 불만만이 남을 터. 시작부터 오래갈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면 우리가 파고들 여지가 생길 거야.”

벌어질 대로 벌어진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를 채우고 있을 청백회의 비밀들.

세 사람은 호기심에 이끌리는 것처럼 고개를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보이는 순백의 성벽 너머에서 지금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하며.

***

“퀴테리아! 퀴테리아!”

보나벤투라가 울부짖으며 달려들었다. 청백회의 본거지에 다다라 마차에서 내리던 퀴테리아는 난데없이 제게로 돌진하는 보나벤투라를 발견하곤 눈살을 찌푸렸다.

“퀴테리아! 내 말을 좀 들어 보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젠장, 언제 여기까지 쫓아와선…!”

다른 마차에서 내리던 야손이 황급히 달려와 보나벤투라를 붙잡았다. 퀴테리아는 마치 더러운 해충이라도 본 것처럼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라고! 난 아니야! 퀴테리아!”

“뒈지려면 혼자 뒈지랬잖아!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뒈지긴 왜 혼자 뒈져! 내가 나 혼자 뒈질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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