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기다렸다는 듯 몰려온 근위대가 보나벤투라의 사지를 붙들고 레오폴트에게서 강제로 떼어 냈다. 당황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보나벤투라가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멀어지는 레오폴트를 발견하곤 발작하듯 반항하기 시작했다.
“성하! 아닙니다! 전 아닙니다, 가지 마십시오! 성하!”
텅 비어 버린 돔 아래서 째질 듯한 절규만이 쟁쟁하게 울렸다. 무의미한 몸부림, 누구도 받아 주지 않는 눈물….
단상에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던 페기가 이윽고 고개를 돌렸다. 통쾌할 것이라 여겼으나 누구든 추락하는 모습을 보는 건 달갑지 않았다. 그녀는 못내 씁쓸한 기분을 삼키며 뒤돌았다. 오르코는 여전히 바닥에 주저앉은 채 멀거니 보나벤투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오르코.”
조용한 부름에 오르코의 시선이 흠칫 튀었다. 페기가 출구를 눈짓했다.
“이만 가죠.”
“아, 예….”
오르코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출구 쪽으로 걸어가는 페기를 따라 비척비척 일어서던 그는 망설임 끝에 슬며시 뒤를 돌아보았다. 보나벤투라는 지금도 땅바닥을 기며 처절하게 교황을 부르짖고 있었다.
오르코의 말간 얼굴에 쓸쓸한 낯빛이 비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보나벤투라에게서 등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앞서가던 페기가 문을 열어젖히자, 그에게도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려왔다.
오르코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쩐지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만 같았다.
***
“요 예쁜이. 어디서 저런 걸 찾아왔어?”
별궁에서 나오기 무섭게 안드레아가 페기의 뺨을 짓누르며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눈만 동그랗게 뜬 페기가 입술을 작게 오물거렸다.
“저런 거?”
“보나벤투라의 아들내미 말이야. 저기 나오네.”
안드레아가 페기의 등 뒤를 눈짓했다. 훌쩍거리며 나오던 오르코는 느닷없이 안드레아의 사나운 눈빛을 마주하곤 돌처럼 굳었다.
“어, 어….”
“이야. 이렇게 보니 진짜 닮았네? 여기서 살만 뒤룩뒤룩 찌면 딱 보나벤투라 영감탱이겠는데?”
건들거리며 다가온 안드레아가 덥수룩한 오르코의 앞머리를 걷어 내곤,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기 시작했다. 불쌍하리만큼 하얗게 질려 가는 오르코의 안색은 안중에도 없었다.
“얘가 그 역병 도는 마을에 의사로 있었다고 그랬나? 척 보기엔 아주 겁쟁이일 것 같은데 생각보다 깡다구가 있어, 어?”
“예, 예?”
안드레아가 호탕하게 웃으며 오르코의 마른 등을 찰싹찰싹 때렸다. 오르코는 차마 아프다는 말도 못 하고 얼굴로만 비명을 질렀다.
둘을 지켜보며 옅게 웃고만 있던 페기는 불현듯 느껴지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열려 있는 마차의 문 너머로 예후르가 느른하게 앉아 있었다. 예기치 않은 눈 맞춤에 당황한 페기가 소리 없이 입술만 벙긋거렸다.
가만히 턱을 괴고 있던 예후르가 문득 입꼬리를 반듯하게 끌어 올렸다.
“안녕?”
페기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응, 안녕.”
“잘 지냈니?”
페기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묘한 미소를 머금은 예후르가 손을 내밀자, 그녀는 별생각 없이 그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라탔다. 등 뒤로 마차의 문이 닫힐 때까지도 페기는 아무런 의심이 없었다.
그런데 예후르가 마차의 벽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출발해요.”
충실한 마부가 채찍을 내리치며 말을 몰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마차가 움직이자, 놀란 페기가 크게 휘청하며 예후르의 팔을 붙들었다.
“예, 예후르?”
“야, 이 새끼야! 거기 안 서?!”
뒤에서 안드레아의 사나운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황급히 마차의 창문을 열고 밖으로 고개를 내민 페기는 어느새 성냥개비처럼 작아진 안드레아와 오르코를 발견하곤 황당한 얼굴을 했다.
“먼저 출발하면 어떡해? 저 두 사람은 어떻게 오라고?”
“성궁에 널린 게 마차인데, 뭘.”
“하지만….”
반박하려던 페기가 느닷없이 뻗어 오는 그의 손길을 보곤 멈칫했다. 그대로 그녀의 어깨를 넘어간 예후르의 손이 마차의 창문을 탁 닫았다. 윙윙대는 바람 소리로 시끄럽던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히 가라앉았다.
페기는 어쩐지 부쩍 가까워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일까. 굴곡에 따라 음영 지는 얼굴이 무척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홀린 듯이 그를 응시하던 페기는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로 손을 올렸다가 그만 그에게 붙들리고 말았다. 그녀의 작은 손을 넉넉히 감싸는 손바닥이 마치 타오르는 불처럼 뜨거웠다.
잡힌 손을 본능적으로 내려다보았던 페기는 불현듯이 귓가를 감싸 오는 손길을 느끼곤 고개를 들어 올렸다. 생각은 거기서 멈추었다. 부지불식간에 입술부터 잡아먹혔다.
귓가를 감싸던 그의 손이 뒷덜미로 넘어가고, 그녀의 손을 붙들었던 손은 바닥을 기어 그녀의 허리를 빠듯하게 옥죄었다. 지탱할 곳 잃은 그녀의 손이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간신히 그의 어깨로 안착했다. 자꾸만 뒤로 꺾이는 그녀의 목을 받치며 머리카락 사이를 파고드는 그의 다섯 손가락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호흡이 가빠지면서 페기의 눈이 가물가물 감겨 왔다. 그녀의 입 안을 무자비하게 유린하는 그의 숨결마저 못 견디게 격렬했다. 마치 뜨거운 불덩이가 그의 몸속에서 그녀에게로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참을 수 없는 열기가 그와 맞닿은 입술에서부터 시작되어 역병처럼 그녀의 온몸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그러자 그의 어깨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그녀의 손이 맥없이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마저 그를 멈추기엔 너무나도 미약한 힘이었다. 그는 시시각각 맹렬한 파도처럼 부딪혀 왔다. 그의 거대한 체구에 깔려 페기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참다못한 페기가 작은 주먹으로 그의 어깨를 마구 때리기 시작했다. 필사적인 발버둥이었다. 예후르는 그제야 멈칫하며 천천히 떨어져 나갔다. 어느새 시뻘게진 페기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예후르는 좌석 위에 흐트러진 짧은 은발과 눈물 맺힌 보랏빛 눈을 넋 놓고 응시했다.
“…이러려고 나만 태운 거야?”
커다란 보랏빛 눈에 원망이 가득 차올랐다. 예후르는 그녀의 얼굴 옆을 짚고 있던 손을 들어 하얀 뺨을 엄지로 살살 만져 주었다.
“봐줘. 보름 만에 보는 거잖아.”
웃음기 매달린 목소리에 페기의 눈빛도 조금 누그러졌다. 새침해진 그녀가 귀엽다는 듯 예후르는 페기의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간지러워진 페기가 그에게 깔린 채로 몸을 뒤틀었다.
“무거워, 예후르.”
“응.”
“무겁다니까?”
“응, 괜찮아.”
뭐가 괜찮다는 거야….
소심하게 중얼거린 페기가 이내 그에게서 벗어나길 포기하곤 멍하니 마차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불현듯 헤렌잘 마을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이 까마득하게만 느껴졌다. 실로 끔찍하던 역병과 그보다 더욱 끔찍했던 성직자들….
지난 보름간의 기억을 더듬던 페기는 아직 두 번째 시험의 결과가 공표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녀가 불시에 보나벤투라의 죄를 폭로하면서 그럴 경황이 없기도 했거니와, 기실 두 번째 시험은 종목이 정해졌을 때부터 누구나 결과를 예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며칠 뒤에 두 번째 시험의 결론을 내리기 위해 원탁 추기경들이 소집될 것이며, 레오폴트는 본래의 계획대로 양자의 손을 모두 들어 줄 것이다. 페기는 그의 변심을 기대하지 않았다. 청백회를 무너트리고 비올라를 끌어내리는 데 그의 조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아!”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를 책망하듯 갑자기 목덜미에서 알싸한 통증이 올라왔다. 페기는 단숨에 뾰족해진 시선을 내렸다. 그녀의 하얀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은 예후르가 눈을 둥글게 휘어 웃고 있었다.
“집중해야지.”
무얼, 하고 물으려던 페기는 그의 집요해진 눈빛을 느끼곤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얕은 한숨을 내쉰 그녀가 양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다시 달려드는 그에게 반항 없이 입술을 내어 준 페기는 문득 괜히 거추장스러운 정복을 입었다고 생각했다. 옷이 구겨지면 마샤가 슬퍼할 텐데.
언덕을 한참 달려 올라간 마차가 저택 앞에서 멈추었다. 돌풍이 일어나는 언덕에는 마샤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들뜬 기색으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공에서 날갯짓하며 저택을 에워싸고 있던 용들도 주인의 귀환을 환영하듯이 신명 나게 울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 예후르가 가벼운 걸음으로 내려왔다. 그러고는 마차 안으로 손을 뻗는데, 그의 손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나오는 페기의 안색이 이상하도록 파리했다.
“…전하?”
이상함을 감지한 마샤가 얼른 달려갔다. 부축을 마다하며 저택으로 걸어가는 페기의 발걸음은 다행히 멀쩡해 보였으나, 그보다 잔뜩 구겨진 그녀의 옷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저 순백의 정복은 중요한 자리에 가시는 주인을 위해 오늘 새벽 마샤가 열심히 다려 놓은 옷이었다.
마샤의 얼굴에 순간 깨달음의 빛이 스쳤다.
설마….
“혹시 또 알비야 공작 전하를 만나신 거예요?”
이미 단정 짓고 캐묻는 소리에 페기가 피곤이 가득한 얼굴로 마샤를 돌아보았다.
“뭐?”
“알비야 공작 전하께서 또 패악을 부리신 거면, 엘피도 공작 전하께 꼭 말씀드리셔야 해요!”
“…네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페기는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곤 저택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다,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마샤가 다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마샤의 도움을 받아 잔뜩 구겨진 정복을 갈아입고 나오던 페기는 막 저택으로 들어서던 안드레아와 맞닥뜨렸다.
“야! 예후르 그 새끼는 몰라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단단한 장화 밑창으로 쿵쿵 바닥을 때리며 다가오는 안드레아는 제법 성이 난 기색이었다. 그 뒤로 잔뜩 주눅이 든 오르코가 머뭇머뭇 저택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빨리 도착했네.”
“생각보다 빠알리?”
“오르코 수도사.”
갑작스러운 부름에 오르코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페기는 계단을 턱짓했다.
“어머니를 뵈러 가야죠.”
“예…?”
멍하니 반문하던 오르코가 뒤늦게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는 황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페기가 그를 따라가자, 예상치 못한 무시에 어버버하던 안드레아마저 짜증스럽게 뒷머리를 헤집곤 성큼성큼 계단을 올랐다.
오르코의 생모인 에피파나 수도사는 저택 한편에 마련된 손님방에 머물고 있었다. 오르코가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 앞에서 망설이자, 페기가 대신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