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주저하듯 잠시 멎은 발소리.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조차 천둥처럼 울리는 정적 속에서 페기는 그늘진 통로를 가만 들여다보았다. 형체는 보이지 않았지만 오르코의 존재감만은 분명히 느껴졌다. 빼곡히 모여 앉아 있는 참관인들을 보고 겁에 질렸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마지막 한 걸음은 그에게 달려 있다. 하지만 용기를 북돋아 줄 수는 있다.
페기는 어둠 속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제는 그도 세상 밖으로 나올 시간이었다.
곧이어 그림자 속에서 낡은 가죽신이 튀어나왔다.
눈부신 빛 속으로 머뭇머뭇 걸어 나오는 이는 젊은 수도사였다. 검은 곱슬머리는 얼굴의 절반을 가릴 듯이 덥수룩했고, 가련해 보일 만큼 야윈 몸은 발목까지 감싸 내려오는 수도복으로도 감출 수가 없었다.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단상으로 올라온 그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페기의 뒤에 바짝 붙어 섰다.
페기는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오르코는 병자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로 오들오들 떨고만 있었다.
“…오르코 수도사.”
엄숙하게 가라앉은 장내에 그녀의 목소리만이 잠잠하게 울렸다. 다가올 말을 짐작이라도 하듯이 오르코는 질끈 두 눈을 감았다.
페기는 옆으로 한 발짝 비켜서며 만인에게 기꺼이 오르코의 모습을 내보였다.
“지금 이곳에 그대의 생모를 수십 년째 감금하여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자가 있습니까?”
페기라는 가림막마저 사라지자, 모든 이목이 오르코에게로 쏠렸다.
오르코는 가빠 오는 숨을 삼키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여 쏟아지는 형형색색의 빛줄기 아래, 백여 명의 참관인들이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번져 오는 햇살에 잠시 눈살을 찡그리던 참관인들은 차츰 드러나는 그의 이목구비를 확인하곤 저도 모르게 탄식했다.
오르코는 모두가 기억하는 보나벤투라의 젊은 시절을 꼭 빼닮아 있었다.
“…네. 있습니다.”
사방에서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틈을 주지 않고 질문을 이었다.
“그게 누구죠?”
오르코는 있는 힘껏 입술을 사리물었다.
엄숙한 에페소스 별궁의 무게와 웅성거리는 소리들이 그의 전신을 묵직하게 짓눌러 왔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숨통을 꽉 옥죄어 오는 한 사람의 눈총이 있었다. 오르코는 불현듯 아직 낫지 않은 등의 상처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다.
“오르코.”
페기가 대답 없는 그를 채근했다.
“그게 누구냐고 물었어요.”
오르코는 힘겹게 눈을 감았다 떴다. 지그시 사리문 입술에서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는 목울대를 아프게 찔러 오는 숨과 함께 긴장감을 꿀꺽 삼키며, 파들파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지목할 사람은 단 하나.
오르코는 맥없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의 아버지를 마주 보았다.
“보나벤투라… 추기경 예하… 십니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입을 가린 채로 경악스러운 상황을 마주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보나벤투라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죄를 저질렀단 말인가. 다른 사람도 아닌 보나벤투라가 어찌.
쿵!
어디선가 거친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나동그라진 의자를 딛고 일어난 보나벤투라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단상을 손가락질하고 있었다.
“네, 네놈이 감히 은혜도 모르고…!”
오르코가 움찔하며 반 발짝 물러섰다. 보나벤투라는 당장에 단상으로 뛰어 내려올 것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노성을 내질렀다.
“지금껏 못난 네놈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친 것이 누구인데…! 내가 짐승 새끼를 잘못 거두었구나! 네놈이 어떻게 내 뒤통수를 쳐!”
보나벤투라가 앞선 관객석을 넘어오려는 시늉을 하자, 질겁한 오르코가 허둥지둥 뒷걸음질하다가 그만 벌러덩 나자빠졌다. 보다 못한 페기가 단호하게 그의 앞을 막아섰다. 오르코는 황급히 네발로 기어 와 그녀의 등 뒤로 숨었다.
“오냐! 내 오늘 너의 그 못된 버릇을 단단히 고쳐 주마! 감히 주제도 모르는 천것이 주인을 물어?!”
이성을 잃은 보나벤투라가 격노하여 펄펄 날뛰었다. 장내가 점점 난장판이 되어 갔으나, 같은 추기경들조차 선뜻 그를 말리지 못했다. 그나마 말이 통할 듯한 퀴테리아는 조금 전부터 침묵만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솔란지아는 아예 싫증 난 얼굴로 보나벤투라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 틈에 막시모가 조용히 별궁으로 입장했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원탁 추기경의 자리로 내려온 그는 예후르의 귀에 짧은 속삭임을 전했다. 마치 연극을 관람하듯 느긋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예후르가 그제야 산뜻하게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방금 전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사택에서 에피파나 수도사를 구출해 냈습니다.”
“뭐…?”
단상을 향해 욕을 퍼붓던 보나벤투라가 흠칫 고개를 돌렸다. 예후르를 향하는 그의 얼굴이 심상치 않았다.
“본인이 20여 년 전 실종되었던 에피파나 수도사라는 것, 당시 이웃한 수도원의 사제였던 보나벤투라 추기경에게 납치되어 오늘 이날까지 감금되어 있었다는 것, 또한 그동안에 숱한 강간과 폭력이 있었음을 확인받았습니다. 다만 요양이 시급하다는 의사의 판단이 있어,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조속히 법정에 세워 증언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게 무, 무슨… 누구를 구출해?”
“지금까지 그대가 감금하고 있었던 에피파나 수도사 말입니다.”
예후르가 나긋하게 대답해 주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보나벤투라가 갑자기 들소처럼 냅다 달려들었다.
“예, 예하! 그만하십시오!”
기겁한 막시모가 예후르의 앞으로 튀어나와 보나벤투라를 막아 세웠다. 막시모와 격한 몸싸움을 벌이던 보나벤투라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목에 굵은 핏대를 세웠다.
“이보시오, 엘피도 공작! 감히 원탁 추기경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했단 소리요?!”
“사안의 심각성을 고려해 중앙 교회의 법무처로부터 긴급 승인을 받아 냈습니다.”
예후르가 기꺼이 승인장을 넘겨주려 했으나, 보나벤투라는 매섭게 그의 손등을 쳐 냈다.
“이딴 종잇조각으로 면피할 수 있을 줄 아시오?! 어찌 사도 된 자가 이리도 교회법을 무시한단 말인가!”
“그리 통탄스럽다면 나를 고발하든가요.”
예후르의 두 눈이 매끄럽게 휘어졌다.
“그대와 같은 흉악한 범죄자의 손에서 에피파나 수도사를 구출할 수만 있다면야, 그깟 벌금과 자숙쯤은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뭐, 뭐…!”
“지금쯤 그대에 대한 고발장도 정식으로 제출되었을 겁니다.”
예후르는 바닥에 떨어진 승인장을 주워 들었다.
“훗날 법정에서 뵙도록 하지요, 보나벤투라 추기경.”
고개를 까딱한 예후르가 그대로 뒤돌아 에페소스 별궁을 빠져나갔다.
손톱을 매만지는 척 계속 딴청을 부리던 클레멘스도 그쯤에서 일어나 뒷짐 지고 홀홀 보나벤투라를 스쳐 지나갔다. 고소하다는 얼굴로 이죽거리는 안드레아, 경멸하는 얼굴로 몸서리치는 도미시오, 얼음장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는 글리체리아….
그 모두를 망연자실하게 스쳐 보낸 보나벤투라는 기어코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솔란지아를 발견하곤 다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솔란지아! 아닙니다, 아니에요! 전부 모함이란 말입니다!”
“놓으십시오.”
“내 말부터 좀 들어 달란 말이오! 어찌 사람 말을 이리도 귓등으로 들으시오!”
“좀 놓으시라고…. 거기! 당장 이자를 떼어 내지 않고 뭐 하는 게야!”
보나벤투라에게 붙들린 옷자락을 낑낑거리며 끄집어내던 솔란지아가 멀찍이서 구경만 하던 근위대를 향해 노성을 질렀다. 황급히 달려온 근위대원들이 보나벤투라의 사지를 붙들자, 솔란지아는 구겨진 옷자락을 신경질적으로 털곤 발걸음을 종종 옮겼다.
그러자 람베르토 추기경과 콘체사 추기경도 도망치듯 황급히 솔란지아를 뒤따랐다. 그들만이라도 붙잡아 보려 손을 내뻗던 보나벤투라는 별안간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퀴테리아?”
반듯하게 자리에서 일어선 퀴테리아가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었다. 멀거니 그녀를 바라보던 보나벤투라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는 퀴테리아의 모습에 발작하듯 소리를 질렀다.
“퀴테리아!”
불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화들짝 그녀에게로 달려가던 보나벤투라는 곧 야손이란 거대한 벽에 가로막혔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야손을 밀어내려 했으나, 야손의 강철 같은 몸은 꿈쩍도 안 했다.
그사이 퀴테리아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에페소스 별궁을 홀연히 빠져나갔다. 목이 터져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짖던 보나벤투라는 그만 맥이 탁 풀리고 말았다.
그때껏 보나벤투라를 붙잡고 있던 야손이 더러운 쓰레기라도 만진 양 그의 몸에서 손을 떼어 냈다.
“젠장, 뒈지려면 혼자서 뒈지시던가….”
경멸 가득한 어조로 중얼거린 야손이 바삐 퀴테리아를 따라갔다.
넋 놓고 허공만을 응시하던 보나벤투라는 그제야 천천히 주위를 돌아보았다.
원탁 추기경들의 자리는 이미 텅 비었고, 나머지 성직자들도 썰물처럼 별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중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이들을 불러 세우려던 보나벤투라는 온 힘을 다해 저를 피하려는 기색을 읽곤 맥없이 손을 떨어뜨렸다.
완전한 소외.
흡사 발밑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보나벤투라.”
문득, 어디선가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넋 놓고 있던 보나벤투라는 뒤늦게야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레오폴트가 성좌에서 일어나 있었다.
“…성하.”
보나벤투라는 그제야 레오폴트의 존재를 깨달은 기색이었다. 멍하니 레오폴트를 바라보던 그가 헐레벌떡 성좌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거의 엎어질 것처럼 레오폴트의 발치에 주저앉았다.
“성하, 결단코 아닙니다. 모두 저를 음해하고 모함하려는 시도일 뿐입니다. 저를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성하, 제발….”
보나벤투라는 허겁지겁 레오폴트의 옷자락을 붙들고는 하염없이 사정했다.
청백회가 그를 버린다면, 교황 말고는 더 이상 의지할 만한 곳이 없었다.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처지를 절감하자 절로 눈물이 샘솟았다.
“성하께서 오래전 제게 은혜를 주시지 않았습니까. 저의 선한 마음씨를 보아 제게 구원의 손길을 내려 주신 것이겠지요. 부디 성하의 판단을 믿어 주십시오. 저는 아닙니다. 맹세코 아닙니다!”
눈물로 애걸복걸하는 보나벤투라에게로 레오폴트의 서글픈 눈빛이 내려앉았다. 인파가 빠져나가 휑해진 별궁에 보나벤투라의 처절한 울음소리만이 가득 끓어올랐다.
“성하, 제발….”
“그래. 내가 일전에 너를 구해 주었었지.”
가문 땅처럼 갈라진 목소리였다. 보나벤투라는 법관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인처럼 바짝 굳었다. 레오폴트는 지그시 두 눈을 감으며 깊게 탄식했다.
“이제 보니 내 실수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