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0화 (240/328)

갑자기 저를 향하는 화살에 야손은 순간 당황했다. 그 틈으로 페기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행정관이 그러더군요. 초기 봉쇄에 실패했다는 장계를 올리면 본인은 중앙으로 압송될 것이며, 법적 책임을 묻기도 전에 청백회의 손에 사달이 날 것이라고. 그때는 행정관의 지나친 망상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그의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군요.”

야손이 벌게진 얼굴로 그녀를 마구 손가락질했다. 페기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헤렌잘 마을의 문제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역병이 도는 마을이라 알고 갔더니, 가장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더군요.”

페기는 잠시 앞니로 입술을 물었다. 어느 밤에 보았던 산지옥의 광경이 다시금 그녀의 뇌리를 어지럽혔다. 그녀는 눈앞을 맴도는 횃불을 쫓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헤렌잘 마을의 악마는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밤낮없이 마을을 밝히던 횃불. 역병은 천사께서 내리신 시련이며, 역병이 든 병자는 죄인이라 단언하던 미친 사제. 전염되던 광기와 사제의 말에 꼭두각시처럼 휘둘리던 수도사들. 허공으로 치솟던 채찍과 등이 걸레짝이 되도록 맞아야 했던 병자들.

떠올릴수록 이가 갈리는 기억이었다. 그녀는 으스러지도록 주먹을 쥐었다.

“교회는 영적인 공간이며, 성직자는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수도복을 입은 것 자체로 백성들은 우리를 전적으로 믿고 따르지요. 성직자라는 단어에 얹힌 권력이 그다지도 크다는 소립니다.”

헤렌잘 마을의 주민들은 감히 시몬 사제를 거스를 생각을 못 했다. 반년 동안의 끔찍한 경험으로 한없이 무기력해졌다기엔, 병든 가족과 이웃들이 채찍질을 당하는 것조차 막지 못했던 것이 처음에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제이기에 믿었던 것이다.

사제이기에, 거역할 수 없었을 뿐이다.

“멜키오르서(書)에서 이르길, 역병은 천사의 단죄라 하였습니다!”

“그래서요. 그대는 천사의 단죄를 치유할 수 있습니까?”

반론을 내놓았던 성직자가 금세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대차게 그를 쏘아본 페기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성직자는 영적인 인도자일 뿐 사람의 병든 몸은 고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을을 관리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성직자의 몫이 아닙니다. 일평생 경전만을 탐독하며 사는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정작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어찌 안다고요? 중앙 부처에 소속된 성직자들처럼 다른 분야에도 능통한 사람이 이 교회에 얼마나 됩니까?”

불만스럽게 그녀를 쏘아보던 참관인들이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성직자가 만민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세상. 듣기에는 좋은 말입니다만, 그 내용은 공허하기 그지없습니다. 성직자라고 모두가 바른길을 보는 것은 아니며, 이미 지방의 성직자들은 지나친 권력을 누리고 있습니다. 멜린저 행정관이 부패했던 것은 교회의 질서가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마저 눈감아 줄 만큼 치젤 마을의 성직자들 또한 부패했다는 뜻일 겁니다.”

“뭐, 뭐라고!”

“교회의 질서는 이미 지나치게 비대해져 있습니다.”

페기는 쏟아지는 비난을 무시하며 레오폴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일원화된 사회는 제자리에 고일 뿐 흘러가지 않습니다. 이만 교회의 빗장을 열어야 합니다. 폐쇄된 공간에 새 공기를 들여 광기를 물리치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야만 해요. 겉으로는 개혁을 주장하면서 실상 오래된 과거에만 집착하는 청백회는 교회를 녹슬게 만드는 독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헛소리를 당장 그치시오! 청백회는 청빈과 순결을 따르는 단체! 우리의 가르침이야말로 세상을 바른길로 인도할 것이란 말이외다!”

“헛소리?”

페기가 차게 웃었다.

“동료 수도사를 납치 강간하여 아이를 배게 하는 것이 청백회의 그 잘난 가르침입니까?”

장내가 찬물을 맞은 듯이 고요해졌다. 경악감이 역병처럼 번지는 가운데, 페기는 백지처럼 창백해진 보나벤투라를 직시하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24년 전 메리아렐 수도원 소속이었던 에피파나 수도사를 납치 감금하여 지속적으로 강간을 일삼은 자. 강제로 출산한 아이를 고행이란 명목으로 학대하고 방치한 자. 또한 이토록 끔찍한 죄악을 저질러 왔음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추기경 자리를 차지하여 원탁의 이름을 더럽힌 자.”

“…….”

“나는 이 자리를 빌려, 주브에의 대주교 보나벤투라 에스칼로치를 고발합니다.”

***

“예하를 고발하실 거라고요?”

마차 창밖의 너른 들판을 신기하게 구경하던 오르코가 별안간 얼굴을 굳히며 페기를 돌아보았다. 페기는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두 번째 시험이 끝나는 자리에서 바로.”

오르코는 할 말을 잊은 것처럼 벙찐 표정이었다. 그는 얼떨떨한 기분을 애써 추스르며 입술을 뗐다.

“그렇게까지 서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어찌 되었든 그 자리는 두 번째 시험의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이고… 또 저희 어머니! 무턱대고 고발부터 하셨다간, 예하께 잡혀 계신 저희 어머니께서 더한 고초를 당하실지도 모릅니다. 아니, 당하실 거예요!”

오르코가 필사적으로 외쳤다. 난데없이 닥친 현실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야 어찌 모르겠느냐만, 그의 어리광을 달래 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페기는 한숨처럼 말했다.

“두 번째 시험의 통과 여부를 결정하는 중대한 자리이니, 거기서 고발을 해야죠. 교황 성하를 비롯하여 중앙 교회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성직자들이 한데 모이는 자리가 또 언제 마련될 줄 알고요.”

마지막 시험에서 비올라가 패한들, 청백회는 순순히 페기의 승리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그 전에 어떻게든 청백회의 세력을 약화시켜야만 했다. 그것을 위해 일찌감치 표적으로 지목된 사람이 바로 보나벤투라이며, 보나벤투라의 약점인 오르코까지 확보한 상황이었다. 당연히 파급력이 큰 자리에서 그의 죄목을 낱낱이 폭로해야 했다.

“그대의 생모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에페소스 별궁에서 두 번째 시험의 결과가 공표되는 시각, 에피파나 수도사는 무사히 구출될 테니까.”

“…예?”

오르코가 멍청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페기는 천연덕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며칠 전 그대에게 보나벤투라 추기경 사택의 내부 구조와 생모가 감금되어 있는 곳의 위치를 자세하게 알려 달라고 했잖아요. 그걸 바탕으로 에피파나 수도사의 구출 작전이 이루어질 거예요.”

“오, 오늘 어머니를 구출하시겠다고요?!”

“세상의 이목이 에페소스 별궁에 쏠려 있을 때 해치워야죠.”

“그건 무단 침입입니다! 분명 청백회에서 걸고넘어질 거예요!”

“…그건 그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페기가 빤한 눈으로 오르코를 응시했다.

“오르코. 그대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오르코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마차의 창밖,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가을 하늘 아래 성도 오스피나의 백색 성벽이 서서히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

에페소스 별궁에는 무거운 적막만이 감돌았다.

원형으로 둘러앉은 모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고 있었다. 고발, 강간, 납치, 사생아…. 연달아 들이박힌 말들을 천천히 곱씹던 이들이 점차 아연해지는 표정으로 한 사람을 주시했다.

보나벤투라 에스칼로치.

다른 원탁 추기경들과 함께 교황의 성좌 아래를 지키고 있던 그는 백지처럼 새하얘진 안색이었다. 숨조차 멎은 듯이 굳어 버린 모습은 흡사 절명의 순간에 박제된 짐승과도 같았다. 그는 장내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도 모른 채 오롯이 페기만을 응시했다.

보나벤투라에게 사생아가 있다는 것은 중앙 교회에 오래 재직한 성직자들 사이에선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평소 그의 청렴한 인상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긴 하나, 어차피 모두가 결점 두어 개씩은 품고 사는 마당. 들추어 봤자 교회의 이름에 먹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며 쉬쉬해 온 것이 장장 십수 년이었다.

하지만 같은 성직자를 납치하여 강간한 것이 사실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하룻밤 불장난으로 생긴 사생아는 양자란 눈속임으로 넘어갈 수 있어도, 같은 성직자를 강간하여 아이까지 낳게 한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범죄였다. 하물며 그런 자가 십수 년이나 원탁을 지켰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진다면, 어렵사리 재건했던 교회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수가 있었다.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한 어느 주교가 긴장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너무… 뜬금없는 발언이 아닌지요. 일단 오늘 이 자리는 누가 천사 예리엘의 진정한 사도인지를 가르는 시험장입니다. 보나벤투라 추기경께 고발하실 사안이 있으시다면 추후 증거와 함께 법정에 제출하시는 편이….”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이 자리는 제가 다녀온 헤렌잘 마을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자리입니다.”

페기는 장내를 돌아보며 명료하게 대꾸했다.

“저는 역병이 창궐한 마을에서 제 본분을 잊은 교회를 보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썩어 빠진 작금의 교회를 개혁하기보다 과거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는 청백회를 이 자리에서 또 봅니다. 그래서 저들의 더러운 모순을 지적하고자, 청백회의 한 축을 담당하는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숨겨진 죄목을 폭로하는 것인데 무엇이 잘못되었나요?”

의문을 제기했던 주교가 얕은 침음을 흘렸다. 보다 못한 어느 청백회 단원이 씩씩거리며 나섰다.

“모함이오! 어찌 증거도 없이 원탁 추기경을 함부로 모욕할 수 있단 말이오!”

“증거가 왜 없습니까?”

페기가 둥그레진 눈으로 반문했다.

“증인이 있습니다.”

일순 술렁거림이 일어났다.

장내가 혼잡해지는 가운데, 청백회 단원들이 분한 얼굴로 벌떡벌떡 일어서기 시작했다. 물소 떼처럼 당장이라도 우르르 뛰어 내려갈 것만 같은 기세였는데, 그들을 막아 세운 사람은 다름 아닌 야손이었다.

야손은 굵은 팔을 뻗어 단원들의 앞길을 단호하게 가로막았다. 단원들이 거칠게 항의해 왔지만, 그의 시선은 오직 저 아래 미동 없이 앉아 있는 퀴테리아에게 필사적으로 닿아 있었다.

그녀의 신호 없이는 움직일 수 없다.

야손은 행동 강령을 끝없이 되새기며 터져 나올 듯한 노여움을 씹어 삼켰다.

그사이 단상으로 이어지는 통로에서는 나지막한 발소리가 울려 오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페기가 우아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백여 명의 시선이 어두운 통로로 모여드니, 시끌벅적하던 장내가 한층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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