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소녀를 진찰하던 오르코가 다가오는 것이 보이자, 페기는 익숙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어느새 도도해진 얼굴이 그를 맞이했다.
“아이는 좀 어때요?”
“천만다행으로 별 탈은 없습니다. 병세도 많이 좋아졌고요.”
“날이 밝으면 성도에서 의사가 올 거예요. 그때까지만 잘 돌보아 줘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오르코가 물끄러미 페기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페기가 의아하게 물었다.
“용건이 남았나요?”
“아까… 손바닥을 다치신 것 같아서….”
“별거 아니에요. 나보다는 라만을 돌봐 줘요. 불붙은 나무를 맨손으로 만졌으니 진료가 필요할 거예요.”
“일단 전하의 손부터 좀 보고….”
오르코가 집요하게 그녀의 손을 들여다보려 했다. 당황한 페기가 손을 내젓다 그만 멈칫하며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오르코는 이미 그녀의 손바닥을 보고 말았다.
그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긴장감이 감돌던 표정은 어느새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마치 보면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적나라한 경악감이 그의 만면을 집어삼켰다.
“사, 상처가….”
낫고 있어.
차마 뱉지 못한 말은 입 안에서만 맴돌았다. 오르코는 뜨악한 표정으로 뒷걸음질했다. 아리땁다고만 생각했던 눈앞의 사도가 문득 온 마을을 집어삼키려던 불길만큼이나 두려워졌다.
“대체… 당신께선 누구시기에….”
볼품없이 흔들리는 목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미지의 존재를 향한 본능적인 공포심이 그의 뇌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골똘하게 발치를 응시하던 페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말했잖아요. 무덤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
“아무리 놀라운들, 죽었다가 되살아난 것보다 신기할까요?”
오르코의 눈에 한 차례 풍랑이 일었다.
부활.
말로만 들었을 때는 놀랍다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실감은 잘 나지 않았다. 그에게 카타리나 공작이란 지극히 멀게만 느껴지던 존재였으니까. 또한 무덤에서 살아 돌아왔다고 담담히 고하던 사도는 유별나게 아름다운 것을 제하면 그리 특별해 보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알겠다.
오르코는 문득 깊은 속에서부터 차오르는 신앙심을 느꼈다. 자포자기하여 놓았던 신심, 끔찍한 고행 속에 바래지던 경건함. 살면서 단 한 번도 천사의 존재를 느껴 보지 못했던 그는 도리어 오늘의 경험으로 세상이 뒤바뀌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사께서 계실 거라는 생각은 당연히 했지만….”
그는 저도 모르게 속엣말을 털어 냈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인식되지 않았다.
“그저 막연하게만… 늘 그런 말을 듣고 살아서… 그런데 천사께서 존재하심을… 이렇게 확인받을 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당황한 오르코가 얼른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이 자꾸만 눈물을 밖으로 밀어냈다.
“저는…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오르코가 울먹이며 주저앉았다.
마을의 역병은 이제 끝나 가고 있었다. 내일이면 제대로 된 의사가 올 것이며, 마을은 봉쇄를 풀고 예전의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아 갈 것이다.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그 혼자만 갈 곳이 없었다. 죽을 생각으로 마을에 들어왔던 그는 도리어 죽지 못해서 난감해졌다. 차라리 병자를 치료하다가 죽었다면 이토록 괴롭지는 않았을 텐데. 차라리 조금 전 불길 속으로 뛰어들었다면 마음이라도 편했을 텐데.
조용히 눈물만 떨구는 그의 모습을 응시하던 페기가 툭 던지듯 말을 내뱉었다.
“죽어 봐서 알아요. 죽음은 그 자체로 괴롭다는 걸.”
“…….”
“살아서 괴롭지 않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건 무의미한 짓이란 뜻이에요. 죽어 봤자 당신은 여전히 괴로울 것이며, 당신이 증오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죗값도 치르지 않을 테니까.”
흙바닥을 짚은 오르코의 손이 차츰 오므라들었다. 그의 손등이 하얗게 질리는 것을 페기는 가만히 지켜만 보았다.
“더 이상 괴로워지고 싶지 않다면 살아요. 증오하는 사람들에게 벌을 주고 싶다면 당신이 무기를 쥐고 일어나요.”
“…….”
“그렇게 주저앉아서는 아무것도 바꿀 수가 없어요. 어머니가 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면서요.”
오르코는 차오르는 열기를 간신히 목구멍 너머로 쑤셔 넣었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몸이 이상할 정도로 떨려 왔다.
“제가 있으면… 어머니를 구해 주실 수 있나요?”
“나를 이용해서 당신이 어머니를 구해야죠.”
그의 앞에 쪼그려 앉은 페기가 조용히 시선을 맞추었다.
“같이 싸워요, 오르코.”
그가 눈물이 번지는 눈을 부릅떴다. 몰아치는 격정을 따라 쉼 없이 흔들리던 눈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눈물에 닦인 시야가 명료해지고, 흐리멍덩하던 눈빛에 제대로 날이 섰다. 마침내 바로 선 시선이 올곧았다.
페기의 입가에 어렴풋한 미소가 떠올랐다.
하늘에 닿을 듯 치솟던 불길이 잦아들고, 매캐한 연기 속에 죽어 가던 병자들은 생기를 되찾았다. 유난히 어둡던 밤하늘에 별빛이 고개를 드니 이 밤, 비로소 안식이 있었다.
***
앙겔리카 성궁의 문이 열렸다.
조촐한 인원의 호위를 받아 입성한 마차는 에페소스 별궁에 이르러 멈추었다. 말에서 내린 호위대장이 공손하게 마차의 문을 열자, 정복 차림의 페기가 우아하게 마차에서 내렸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페기는 미리 대기하고 있던 수도사들의 안내를 받아 에페소스 별궁으로 들어갔다. 일전에 그녀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찾았던 에페소스 별궁은 인파로 가득했는데, 오늘의 별궁은 제법 한가해 보였다. 페기는 어쩐지 생경하게 느껴지는 별궁을 눈으로 훑으며 제자리에 안착했다.
원형의 거대한 아치 돔을 얹은 별궁에는 이미 두 번째 시험의 참관인들이 속속들이 도착해 있었다. 페기는 안드레아와 클레멘스, 글리체리아 등과 차례로 시선을 맞추었다. 마지막으로 예후르와는 조금 더 길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모두 기립하십시오.”
수도사의 엄숙한 음성을 기점으로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전으로 이어지는 석문이 열리며 교황 레오폴트가 고드릭의 부축을 받고 나타났다. 그는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으로 간신히 성좌에 들어앉았다.
“회의를 개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북소리가 둔중하게 울렸다.
먼저 단상에 선 사람은 비올라였다. 그녀는 저를 둘러싼 참관인들을 올려다보며 긴장 어린 목소리로 운을 뗐다.
“저는 해충의 피해가 막심한 치젤 마을을 다녀왔습니다. 듣던 대로 농작물들의 피해가 크더군요. 특히 추수 직전에 벌어진 일이었기에 주민들은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비올라는 한 해 농사를 모조리 망친 치젤 마을의 현황과, 방만한 농가 운영으로 마을 주민들의 빈축을 산 행정관에 대해 차분히 설명했다.
“이 자리에 압송되어 온 멜린저 행정관은 평소 농민들로부터 부당하게 이득을 착취하였으며, 중앙에 올릴 장계를 대필하는 등 업무에 소홀한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이는 곧 지방에 만연한 규율의 부재를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세상에 어떤 행정관이 담당 마을의 참상을 알면서도 손 놓고 구경이나 한단 말입니까?”
참관인들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정상적인 행정관이라면 본인의 역량을 벗어난 사건임을 깨닫는 즉시 성도로 급보를 보내어 고견을 청해야 했다. 동시에 인근 마을들과 힘을 합쳐 어떻게든 현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마련하는 노력이라도 보여야 했다.
“멜린저 행정관은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참상을 외면한 채 본인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한심한 태도만 보였지요. 실로 나태한 작태입니다. 그런 작자가 교국의 행정관이라는 사실이 저는 너무나도 부끄러웠습니다.”
비올라는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지방에 만연한 규율의 부재는 곧 중앙과 달리 지방에선 교회의 통제력이 약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만일 치젤 마을에서 교회의 질서가 바로 섰다면, 멜린저 행정관이 아무런 거리낌 없이 게으름을 피울 수 있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멜린저 행정관은 벌 받아 마땅한 죄인이나, 그 죄인을 만든 것은 지방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교회의 질서 탓입니다.”
“말씀하시는 교회의 질서가 정확히 무엇입니까?”
누군가 손을 들고 물었다. 비올라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청빈, 정숙, 신실. 교회에서 말하는 미덕이라면 무엇이든 좋습니다. 천 년 전의 사도 로살레다께서 이르셨듯 농민들은 근면하게 땅을 일구고, 백성들은 화목한 가정을 이루며, 성직자는 만민을 바른길로 인도하는 세상.”
“…….”
“교회의 동심원을 모시는 성직자로서 우리는 그런 세상을 목표로 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작금의 교회를 지탱하는 청백회의 숭고한 이념이기도 하고요.”
기다렸다는 듯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야손을 비롯한 청백회의 단원들이었다. 퀴테리아와 보나벤투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내자, 다른 참관인들도 적당히 환호를 보탰다.
비올라는 만족스러운 기색으로 레오폴트에게 고개 숙여 인사한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녀의 퇴장과 함께 박수 소리가 잦아드니, 이제 장내를 맴도는 것은 고요한 침묵뿐이었다.
페기는 수도사의 안내를 받아 단상으로 내려갔다. 원형으로 둘러앉은 참관인들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내리꽂혔다. 가만히 서서 정적을 견디던 그녀가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저는 상반되는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청백회가 모여 있는 쪽에서 불쾌해하는 듯한 헛기침 소리가 났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제가 다녀온 곳은 역병이 창궐한 헤렌잘 마을입니다. 반년 전부터 정체불명의 역병이 번져 중앙 교회로도 장계가 여러 차례 올라왔던 곳이죠.”
“…….”
“하지만 제 눈으로 목격했던 것은 헤렌잘 마을을 비롯한 일곱 마을을 포괄하는 광범위한 봉쇄선이었습니다. 역병이 창궐했던 헤렌잘 마을의 초기 봉쇄가 실패하여 인근 마을들로 역병이 번진 것이지요. 담당 행정관은 지금까지 이 사실을 숨겨 왔고요.”
술렁거림이 번졌다. 그 못돼 먹은 놈이 도대체 누구냐는 고함마저 들려왔다.
“행정관은 어떻게든 제 선에서 역병을 해결해 보려 했으나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초기 봉쇄에 실패했다는 책임이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것이 무서워 사실을 은폐했던 거짓말이 결국은 눈덩이가 되어 돌아온 것이지요.”
“당장 그놈을 찢어 죽여야 합니다!”
분노한 야손이 고함을 치며 벌떡 일어섰다. 다른 청백회 단원들이 격렬하게 그에게 찬동했으나, 페기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행정관은 바로 당신 같은 사람을 두려워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