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8화 (238/328)

“호위대장!”

소리 높여 부르는 소리에 불쑥 옆에서 누군가 튀어나왔다. 흠칫한 페기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라만?”

사막인 특유의 짙은 이목구비는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도 음영을 그려 냈다. 그는 불손하게 느껴질 만큼 관조적인 태도로 대꾸했다.

“대장은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사제를 괜히 자극할 수도 있으니 저는 여기서 전하를 지키라 하더군요.”

시몬 사제가 그를 보자마자 내비쳤던 경계심을 생각하면 달리 틀린 소리도 아니었다. 페기는 초조한 기색으로 창밖을 흘끗 내려다보았다. 틀린 소리는 아니다만, 저 난장판을 해결하려면 사막인이 아니라 마귀의 손이라도 필요했다.

“따라와요.”

페기는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라만이 별말 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엄숙한 교회당을 가로지르는 내내, 바깥에서 들려오는 고함 소리가 두꺼운 석벽을 꽝꽝 울렸다. 거의 뛸 듯이 중앙 통로를 건넌 페기는 문을 열자마자 훅 끼쳐 오는 열기를 느끼곤 멈칫했다.

마을이 온통 불바다였다. 지푸라기를 얹은 민가의 지붕마다 불이 번지고 있었고, 아닌 밤중에 거리로 뛰쳐나온 주민들이 구석에 모여 덜덜 떨고 있었다.

아연실색하며 밖으로 나가려던 페기는 불현듯 팔뚝을 붙잡아 오는 손길에 뒤를 돌아보았다. 라만이 반대편을 가리키고 있었다.

“병자들이 격리된 곳입니다.”

페기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아찔하도록 사나운 불길이 밤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안 돼!”

갑자기 등 뒤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오르코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교회 밖으로 뛰쳐나갔다. 페기도 황급히 그를 뒤따랐다.

“안 돼, 어서, 어서 불부터 꺼요! 어서!”

“오냐, 드디어 왔구나!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

횃불을 들고 거리를 쏘다니던 시몬 사제가 광기 어린 눈을 빛냈다.

“네놈이 내 불을 모조리 꺼트린 것이지! 그 불이야말로 역병을 태우는 약인 줄도 모르고! 네놈이 망친 일을 내가 완수하고 말 것이다! 이 저주받은 마을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야!”

횃불을 이리저리 휘두르던 시몬 사제가 갑자기 허리를 반으로 꺾으며 미친 듯이 웃었다. 오르코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울음만 삼켰다. 벌건 불길이 일어나는 가운데, 역광을 드리운 사제의 여윈 몸이 갈대처럼 흔들거렸다.

망연자실한 페기에게로 호위대장이 달려왔다.

“전하!”

“이게… 도대체 무슨….”

“송구합니다! 감옥을 감시하던 호위병이 잠깐 마을 주민에게 부탁하여 자리를 비운 사이에 그만….”

호위대장은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페기는 할 말을 잊은 표정으로 멀거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길이 번지는 마을. 마을 주민들은 한데 모여 덜덜 떨고만 있고, 얼마 되지 않는 호위병들은 횃불을 들고 날뛰는 수도사들을 막느라 여념 없었다.

“전하. 송구하오나 저희만으로는 수습이 불가능합니다. 외부에서 대기하고 있을 비밀 호위대를 호출하시는 편이….”

“왜 제압을 안 하죠?”

“예?”

페기는 수도사 하나에 호위병 둘이 달라붙어 사지를 동여 묶는 광경을 가리켰다.

“왜 저런 쓸데없는 짓을 하냐고요. 그냥 무기로 제압하면 되지.”

“그, 그것이… 일단은 성직자가 아닙니까.”

“…성직자? 저런 게?”

새파랗게 날 선 눈빛이 호위대장을 향했다. 호위대장은 면목 없다는 듯 눈알만 굴렸다. 성기사가 되어 성직자를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이 부담스러운 일인 줄은 알겠으나, 지금 이런 상황에서까지 몸을 사리는 것은 그저 우유부단하게만 느껴졌다.

꿈쩍할 생각도 않는 호위대장을 묵묵히 쏘아보던 페기가 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생전 들어 본 적 없는 무게에 손목이 뻐근하게 아파 왔으나, 시켜서 아니 한다면 몸소 본이라도 보일 작정이었다. 그녀는 만류하는 호위대장의 손길도 뿌리치고 검을 질질 끌고 나갔다.

그런데 굵은 손마디가 불현듯이 끼어들어 검을 뺏어 갔다. 페기는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라만의 뒷모습을 아연하게 쳐다보았다. 그는 호위병 둘이 달라붙어 힘겹게 손발을 묶던 수도사를 검의 뭉툭한 쪽으로 후려쳤다. 그 무겁던 쇳덩이가 마치 나뭇가지처럼 휘둘렸다.

갖은 애를 쓰던 호위병들은 너무나도 쉽게 기절한 수도사를 보고 잠시 얼이 빠졌다. 라만은 마치 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맹견처럼 가만히 페기를 응시했다. 페기는 깨물고 있던 입술을 놓았다.

“…성도로 돌아가 문책당하고 싶지 않다면, 지금 당장 저 정신 나간 자들을 제압해요.”

“예, 예!”

명령을 들은 호위대가 다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 마을을 뛰어다니며 불을 붙이던 수도사들, 허공에 떠도는 역병을 태우겠답시고 횃불을 들고 춤을 추던 미친 사제까지. 광기로 가득한 이들이 차례차례 얻어맞고 쓰려졌다.

그동안 페기는 격리된 병자들이 있는 건물로 다가갔다. 그나마 용감한 마을 주민 몇이 맨몸으로 뛰어 들어가 다섯 명의 병자들을 구출했으나, 그사이 불길이 건물 전체로 번지고 말았다.

“안에는 몇 명이 남아 있나요?”

“제가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숨이 붙어 있는 병자는 두 명이었습니다. 실베오 영감이랑 엘리가….”

“엘리요?”

오르코가 백지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반문했다. 페기는 엘리란 사람이 일전에 오르코가 말했던 죽은 이장의 어린 딸임을 직감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엘리를 구해야 해요!”

“이보시게, 의사 양반! 들어가면 자네도 죽어! 엘리는 이만 포기해!”

“어떻게 포기합니까! 나중에 이장님 얼굴을 어찌 뵈라고요!”

오르코가 악을 쓰듯 울부짖었다. 튀어 나가려는 그를 마을 주민들이 셋이나 달라붙어 말리는데도, 온몸에 핏대를 세우며 어떻게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힘이 지나치게 들어간 나머지, 핏발 선 안구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도드라졌다.

페기는 형언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을 낳아 준 아버지가 무섭고, 고행을 강요하는 청백회가 두려워 제 발로 사지에 들어온 사람.

심지어 지금도 생판 남을 살리겠답시고 사선을 넘으려 든다. 죽기보다 아버지와 청백회가 더 무서운 걸까? 그들에게 덤벼 봤자 죽기보다 더하겠느냐만, 그럼에도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고 싶은 걸까.

한 번 죽음을 겪어 본 페기는 그런 오르코의 심정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뼛골 에일 듯하던 죽음의 기억은 뇌리에 박힌 가시처럼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오르코는 죽음을 몰라 저럴 수 있는 걸까. 그렇다며 마냥 비웃기엔, 저 악바리 같은 근성에 자꾸만 마음이 기울었다.

페기는 수도사들을 모두 처리하고 돌아오는 라만에게 오르코를 눈짓했다. 눈치껏 명을 알아들은 라만이 힘 빠진 마을 주민들을 대신해 오르코를 깔아뭉갰다. 압도적인 힘에 짓뭉개지면서도 오르코는 필사적으로 손을 내뻗었다. 악에 받쳐 흐르는 눈물이 턱 끝에서 아롱졌다.

“제발 놔주십시오, 제발! 저는 구하러 가야 합니다! 이대로 살 수는 없….”

오르코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속눈썹에 맺혀 있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지며 시야가 맑아졌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전하?”

느긋하게 그의 손발을 묶던 라만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불타 무너지는 건물로 페기가 들어가고 있었다. 기함한 라만이 황급히 그녀에게로 달려갔으나, 불붙은 기둥이 무너져 입구를 가리고 말았다.

“무슨 일인가!”

건물이 무너지는 굉음을 듣고 달려온 호위대장이 자초지종을 듣고는 자지러질 것처럼 놀랐다. 호위병, 마을 주민들 할 것 없이 모두가 물을 길어 불을 진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건물을 집어삼킨 불은 잠깐 주춤했을 뿐 다시 기세를 올리기 시작했다.

“자네! 당장 밖으로 나가 병사들을 불러오게!”

하다못해 목책을 지키던 병사들까지 불려 왔으나 소용없었다. 호위대장은 불길에 하나둘 스러져 가는 건물의 기둥과 외벽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차라리 이 모든 상황이 꿈이길 바라는 얼굴이었다.

그때, 무너진 외벽 사이로 사람 그림자가 얼핏 엿보였다.

“어, 어어! 저기!”

누군가 건물 안을 가리켰다. 주민들이 외벽 사이로 빠져나오려는 불길에 물을 뿌리자, 일순 불길이 잦아들며 건물 안팎을 오갈 수 있는 길이 생겼다. 안쪽에서 옹송그리고 있던 인영이 틈을 보아 나오려는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지붕의 일부가 우지끈 무너져 내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불길 사이를 빠져나오던 페기의 머리 위로 굵다란 나무 잔해가 쏟아졌다. 주민들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양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러나 불붙은 잔해가 페기를 덮치기 직전, 라만이 맨손으로 나무 잔해를 붙들었다. 깜짝 놀라 경직되었던 페기가 그 틈에 황급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라만은 그제야 불붙은 잔해를 멀리 내던졌다.

“전하!”

호위대장이 울부짖으며 달려왔다. 페기는 그를 돌아볼 겨를도 없이, 업고 온 여자아이를 신속히 땅에 눕혔다. 그을음 진 아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네발로 기어 온 오르코가 다급히 아이의 맥을 짚었다.

페기가 초조하게 물었다.

“살아 있어요?”

“…네.”

오르코는 끓어오르는 울음을 삼키며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페기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기색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호위대장이 다 죽어 가는 얼굴로 따라붙었다.

“전하, 어찌 그런 무모한 짓을 하신 겁니까!”

“살아 나올 자신이 있었어요.”

“도대체….”

말문이 막힌 호위대장이 아연하게 입술만 달싹였다. 페기는 뺨에 묻은 검댕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실베오 영감이라고 했나요? 다른 병자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어요. 불이 모두 진화되면 장례를 치르도록 하죠.”

“일단 전하께서 진찰부터 받아 보셔야….”

“내 몸은 내가 제일 잘 알아요. 쓸데없는 걱정 말고 불부터 끄도록 합시다. 이러다간 불이 온 마을을 집어삼키겠어요.”

페기는 불타는 민가를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어떻게든 의사에게 진찰을 받게 하려던 호위대장의 눈물겨운 노력은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결국에 호위대장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민가의 불을 끄기 시작했다.

이제 페기는 홀로 남겨졌다. 그녀는 사람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면밀하게 주위를 살펴보았다. 조금씩 꺼져 드는 불씨, 거멓게 타 버린 민가와 그럼에도 불길 속에 살아남은 병자들을 돌보며 눈물짓는 주민들.

문득 페기는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수만 명의 인파가 보는 앞에서 용을 복종시켰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때는 가슴이 한없이 벅차올랐다면, 지금은 가슴속에 깃털이 날아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오래간 잊고 있었던 기분에 그녀는 어쩐지 뺨이 달아오를 만큼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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