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그대의 생모를 보필하는 하녀가 몰래 글리체리아 추기경을 찾아와 도움을 청했어요. 보나벤투라와 정적이 되는 글리체리아 추기경에게 도움을 요청했을 정도면, 그대의 생모가 당하고 있을 고초가 상당하겠지요.”
“…….”
“그대도 마찬가지예요.”
페기의 눈길이 담요에 가려져 있는 그의 등을 넌지시 향했다.
“고행은 청백회가 강조하는 수련의 일환이죠. 고통으로써 자신의 죄를 덜어 내라…. 보나벤투라가 그러던가요? 그대의 부정한 출생을 고행으로 떨쳐 내라고?”
담요를 틀어쥔 오르코의 손이 하얗게 질렸다. 페기는 그의 모든 반응을 눈여겨보았다.
“말도 안 되는 짓이에요. 그대의 부정한 출생은 보나벤투라의 죄인데, 어째서 그대가 고행을 견뎌야 하나요? 보나벤투라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그대도 잘 알잖아요. 이렇게 역병이 도는 마을로 도망쳐 왔을 정도면 그대도 그만큼 필사적이었다는 뜻….”
“그만하십시오.”
“…….”
“제발, 그만….”
오르코는 담요를 꽉 움켜쥔 채로 고개를 수그렸다. 힘겹게 감정을 삭이는 것처럼 숨소리가 못내 거칠었다.
“저는 고행을 견뎌야 마땅한 죄인입니다. 감히 순결을 맹세한 두 분의 성직자를 부모로 둔 부정의 소치…. 고행으로 저의 죄를 조금이나마 사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인들 더 못하겠습니까.”
“오르코.”
“그리고 제가 도망친 건 어머니를 한결 편하게 해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르코는 잔뜩 억눌린 목소리로 어렵사리 말을 이었다.
“추기경 예하께선 늘 어머니께서 부정의 씨앗을 잉태하셨다며 폭언을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가끔은 폭력도 수반되었고요. 머리가 굵어진 뒤로는 지방 수도원을 전전했던 처지라 어머니를 오래간 뵙지 못했습니다만, 어머니를 보필하는 하녀가 간간이 전해 주는 소식은 예전과 크게 다를 바가 없더군요.”
“…….”
“제가 문제라면, 저만 사라지면 그만입니다. 도피처로 이 마을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일환이에요. 어차피 전 수중에 돈도 얼마 없고 도와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멀리 가지 못하고 잡힐 거라면, 차라리 누구도 감히 들어올 생각을 못 하는 곳으로 들어가야 했어요.”
오르코는 소심하게 담요를 만지작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하던 페기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러니까….”
“…….”
“도망친 게 맞다는 소리군요. 불쌍한 그대의 생모는 지옥에 그대로 버려둔 채.”
“…예?”
흡사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목소리였다. 오르코가 아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는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듯 두 눈을 찡그리고 있었다.
“최근 그대의 생모가 내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요. 그대가 스스로를 이곳에 가두어 자기만족이나 하고 있었을 지난 반년, 그대의 생모는 끔찍한 고초를 겪었다는 겁니다. 그대가 말없이 사라져서 보나벤투라 추기경은 꽤나 골치를 앓았을 텐데, 그 화살이 결국 누구를 향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르코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페기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그냥 솔직하게 그대를 멸시하는 보나벤투라가 밉고, 고행을 강요하는 청백회가 두려웠다고 말해요. 그편이 차라리 인간적으로 보이기라도 하니까. 강제적으로 그대를 낳아 반평생 감금이나 당하고 있는 그대의 생모는 고작 그런 변명거리로 쓰일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는 전하께서도 저와 어머니를 이용하실 생각일 뿐이잖습니까!”
참다못한 오르코가 소리를 내질렀다. 담요를 움켜쥔 양손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전하도 퀴테리아 추기경과 똑같아요! 저와 어머니의 상처를 말로는 이해한다고 하시면서 정작 아무런 도움도 못 주시죠! 저와 어머니가 모진 채찍질을 당할 동안 전하께선 도대체 어디 계셨는데요! 그 잘나셨다는 엘피도 공작 전하께선 무얼 하셨냐고요!”
“알았으니까 이제라도 도와주려는 거잖아요.”
“도와요? 전하께서? 저와 어머니를 이용해 추기경 예하를 무너트리고 청백회를 부수려는 의도를 제가 모를까 봐 이러십니까?!”
“그럼 그대도 날 이용해요.”
페기는 오르코를 직시했다.
“날 이용해 보나벤투라와 청백회를 무너트리라고요.”
“…….”
“당신도 복수를 원하잖아.”
오르코의 말문이 턱 막혔다. 핏발 섰던 눈이 풀리고, 허옇게 부르튼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복수.
마치 그런 단어를 처음 듣는 사람처럼.
“도망친답시고 역병이 창궐한 마을로 들어온 꼴을 보니 잘 알겠어요. 네, 물론 역병에 걸려 죽을 각오로 들어왔겠죠. 보나벤투라와 청백회는 어차피 훗날에 여덟 천사께서 단죄하시리라 믿고.”
죄를 지은 사람은 벌을 받는다. 그러나 죄를 짓고도 운 좋게 처벌을 피하여 떵떵거리며 사는 자들에겐 으레 이런 말이 따라붙는다.
저자는 죽어서 벌을 받을 거야.
하지만 이미 한 번 죽어 본 페기는 그 말이 얼마나 허황되었는지 잘 안다.
죽음은 춥고 또 추운 것.
살아생전에 큰 벌을 받을 만한 잘못이 없었던 그녀마저 말로 다 못할 끔찍한 혹한을 겪어야만 했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토록 춥고 고통스러운 것이라면, 천사의 단죄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죄를 지었든, 짓지 않았든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은 죽음이란 고통을 겪기 위해 살아가는 셈이다.
“복수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에요.”
페기는 죽어 가며 보았던 본시오의 얼굴을 떠올렸다. 본시오와 한패였던 아나클레토를 생각하고, 또한 예후르의 손으로 심판했던 그의 최후를 기억했다.
“천사께선 한낱 인간의 복수 따위를 대신해 주시지 않아요. 복수가 하고 싶다면 당신이 해요. 나는 기꺼이 이용당해 줄 테니까.”
혼란으로 물드는 오르코의 눈이 머뭇머뭇 바닥으로 떨어졌다. 페기는 왜소한 그의 몸집을 딱하게 쳐다보았다.
“부디 불쌍한 그대의 생모도 생각해 주고요.”
“…….”
“누구든 괜찮으니 도와 달라잖아요. 생모를 위해 역병이 도는 사지로 뛰어들었으면서, 정작 생모를 구하러 갈 용기는 없나요?”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담요를 꽉 붙들고 있던 그의 손등 위로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페기는 남몰래 한숨을 지었다. 오르코를 찾는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성도로 사람을 보내서 오르코를 찾았다고 전해요.”
“하지만 전하, 호위대에서 한 명을 더 차출하긴 무립니다. 감옥을 감시하고 병자들을 지키고, 또 전하를 호위하는 데만도 이미 인원이 빠듯합니다.”
이미 호위대 한 명은 의사를 구하기 위해 성도로 올려 보낸 상황이었다. 호위대장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감옥이 워낙에 낡아 잠금장치가 허술합니다. 여태까지는 무기로 겁을 주어 적은 숫자로도 수도사들을 관리할 수 있었지만, 지금보다 호위대 인원이 더 줄어들면 자칫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이야기였다. 감옥에 가둬 둔 수도사들에 비해 호위대의 인원은 지나치게 적었다. 지금은 위험을 감수할 상황이 아니었다.
페기는 지친 눈으로 마을의 전경을 돌아보았다.
“마을 주민들은 어떤가요?”
“다행히 몇몇 주민들이 병자들을 돌보아 주고 있습니다만… 더 이상의 조력을 기대하긴 힘들 것 같습니다. 충격적인 사건들을 연달아 겪어서 그런지 무기력한 주민들이 대다수입니다.”
“가족과 이웃을 잃고, 본인들도 사경을 헤매다 겨우 살아났으니까요.”
페기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호위대에게 주민들을 잘 대우하라 이르세요. 전부 교회가 돌보아야 하는 가여운 사람들이니.”
“명 받들겠습니다.”
호위대장은 순순히 물러났다.
페기는 본디 시몬 사제가 집무실로 이용하던 교회의 곁방으로 들어와 행정관이 제출한 보고서를 받아 읽었다. 그녀의 요청에 따라 헤렌잘 마을을 비롯, 봉쇄된 일곱 마을의 현 상황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보고에 따르자면, 헤렌잘 마을과 다른 네 마을은 이미 역병이 자연적인 진화 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 대다수가 이미 역병에서 자연 치유된 경우이며, 얼마 남지 않은 병자들의 경우 철저한 격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마을이었다. 비교적 역병이 늦게 퍼진 외곽의 두 마을에선 아직도 마을 주민의 절반가량이 역병에 신음하고 있었다. 의사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지역도 바로 그 두 마을이었다.
페기는 양피지를 꺼내 새로운 명령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아직 역병이 진화되지 않은 두 마을로 물자를 집중할 것, 헤렌잘 마을처럼 각 마을에 믿음직한 지도자가 부재한 경우 외부에서 직접 세세한 지시 사항을 내릴 것, 무엇보다도 병자의 격리를 우선시할 것.
붉은 실링으로 봉해진 명령서는 곧장 목책 바깥으로 전해졌다.
이제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남은 것은 내일 즈음해서 도착할 성도의 의사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산마을의 밤은 이르게 찾아왔다.
별빛 저문 하늘에 가느다란 조각달이 떠올랐다. 평소보다 어두운 밤이 음산하게 내리깔리니, 주민들은 일찌감치 잠들어 내일을 맞이하고자 했다.
페기도 이른 시간에 침실로 들었다.
이 소박한 방에서 잠들었던 것이 몇 밤인지 헤아리려던 그녀는 성도로 떠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곤 조금 놀랐다. 요 며칠, 눈앞의 참상에만 집중하여 성도에서의 일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녀는 문득 성도에 남은 사람들이 청백회를 잘 견제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또한 예후르는 잘 지내고 있을지.
말똥말똥한 눈으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던 페기는 슬며시 손을 들어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후르의 손은 이보다 더 크고 따뜻했지만, 눈을 감고 상상을 덧붙이니 그런대로 그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페기는 그리 흐뭇하게 잠들었다. 불과 두어 시간밖에 잠들 줄은 꿈에도 모르고.
“전하!”
단잠을 깨운 것은 마샤의 다급한 외침이었다.
눈을 채 뜨기도 전에 이불을 빼앗긴 페기는 갑자기 엄습하는 추위에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하지만 다시 잠들 새도 없이 몸이 일으켜 세워졌다.
“전하, 일어나셔요! 지금 밖에 큰일이 났어요!”
마샤의 고함 소리가 송곳처럼 귀에 들이박혔다. 페기는 아교를 바른 것처럼 잘 떼어지지 않는 눈을 간신히 떴다. 흐릿한 시야에 붉은 기운만 넘실거리고 있었다.
“뭐야… 저게…?”
페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마샤는 창가로 달려가 커튼을 확 걷었다.
“감옥에서 시몬 사제님과 수도사들이 탈출했어요! 지금 불로 마을을 다 태워야 한다며 난리예요!”
“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났다. 페기는 당장에 신발을 구겨 신고 복도로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