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6화 (236/328)

최근에야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할가로 수도원에서 달아나기 며칠 전, 오르코는 사택으로 비밀리에 서신을 부쳤다. 보낸 것은 확실한데 정작 사택에는 받은 사람이 없었다. 수십 년간 그를 모셨던 사용인들이 그를 속일 리 없으므로 범인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뭐라고 쓰여 있었지?”

여인은 묵묵부답이었다. 꼿꼿하게 세운 등이 마치 그를 격렬하게 거부하는 듯했다. 보나벤투라는 끓어오르는 격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대답해! 오르코가 뭐라고 보냈는지!”

보나벤투라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여인의 머리채를 거칠게 휘어잡았다. 순식간에 침대 아래로 끌어 내려진 여인이 화들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불시에 마주친 시선이 도리어 보나벤투라의 숨통을 꽉 틀어막았다.

하지만 고집스럽던 침묵도 잠시, 여인이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고요하던 방 안에 실성한 듯한 웃음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만해! 젠장, 그만 웃으라고!”

고통에 찬 외침도 소용없었다. 그만하라며 여인과 똑같이 악을 지르던 보나벤투라가 홧김에 그녀의 목을 틀어쥐었다. 그제야 여인의 광적인 웃음소리가 뚝 멈추었다.

겁먹은 듯한 침묵.

여인의 눈빛이 잘게 흔들린다.

보나벤투라는 고뇌하듯 미간에 깊은 골을 내며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열병이라도 끓어오를 것처럼 얼굴에서 식은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이 깊은 충동, 도저히 지워 낼 수 없는 욕망.

굵은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그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

“저, 저를 아십니까…?”

오르코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물었다. 페기가 말없이 쳐다만 보자, 그는 마른 어깨를 흠칫하며 슬그머니 뒤로 물러났다.

“제, 제 이름은 어떻게….”

“…….”

“누구십니까…? 대체 누, 누구시길래 제 이름을 아시는 건지….”

어스름한 그늘 속에서 오르코의 검은 눈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보나벤투라를 꼭 닮은 눈이었다. 그러나 보나벤투라 특유의 강직하다 못해 완고해 보이는 고집은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다.

페기는 한 발짝 그에게로 다가갔다. 오르코가 기겁하며 엉덩이를 더욱 뒤로 물렸으나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그대로 오르코를 스쳐 지나가 빛이 닿지 않는 구석진 음지로 들어갔다.

오르코는 불안하게 떨리는 눈으로 어둠 속을 바라보았다. 나지막이 울리던 발소리가 그치더니, 어둠 속에서 손톱만 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오르코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그대의 아버지가 한 번 죽였던 사람이에요.”

***

불어오는 입바람에 촛불이 꺼졌다.

잿빛 연기가 암흑 속으로 스며드는 밀실.

보나벤투라는 손으로 주위를 더듬거리며 간신히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하지만 추위를 탄다기엔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다.

“하, 하늘에 계신 여덟 천사이시여….”

그는 시퍼렇게 질린 입술을 달싹였다. 수천수만 번을 읊었던 기도문임에도 낭독은 지나치게 더뎠다.

“저, 저의 죄를 사하시옵고… 저의 죄를 용서하시어 새, 새로이 태어나는 저를….”

말을 채 잇지 못하는 그의 눈이 파들거리며 감겼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채찍을 잡았다.

“저를… 기쁘게 맞이해 주시옵소서.”

질끈 감긴 두 눈에 주름이 깊게 패는 순간, 날카로운 채찍이 그의 등을 갈랐다. 보나벤투라는 이를 꽉 깨물며 터져 나오려는 신음을 삼켰다.

짜악!

채찍이 등을 가를 때마다 그의 이가 으드득 갈렸다. 그러잖아도 땀으로 흥건하던 얼굴에서 식은땀이 뚝뚝 떨어져 내리고, 입에선 가쁜 숨이 터져 나왔다. 소리 없이 고통에 신음하는 그의 몸이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사정없이 자신의 등을 채찍질하던 손이 겨우 멈추었다.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만 그의 등에서 뜨거운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검은 옷은 이미 핏물로 축축하게 젖었고, 얼굴은 눈물과 침으로 엉망진창이었다.

보나벤투라는 그 상태로 겨우 바닥을 기어 제단으로 다가갔다. 더듬거리며 제단을 타고 올라가던 그의 손끝에 교회의 상징인 동심원이 닿았다. 보나벤투라는 그제야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제가, 이 부족한 제가 또다시 마녀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점차 목에 핏대가 세워졌다. 그는 제단 앞에 엎드려 힘껏 울부짖었다.

“어찌해 제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저를 더 이상 시험에 빠트리지 마십시오. 어찌 당신의 신실한 종을 이리도 고통스럽게 하신단 말입니까….”

보나벤투라는 답을 구하듯 간절하게 동심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어둠에 잠긴 동심원은 한없이 잠잠했다. 허망하게 뜨인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그는 울음을 삼키며 이마를 땅에 찧었다. 제 머리로 돌바닥을 가를 듯이.

또다시 길고 긴 고행의 시작이었다.

***

“단언하건대 그자는 수도사가 아닙니다.”

시몬 사제는 감옥 속에서도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예, 물론 수도사의 옷을 입고 오긴 했지요. 하지만 세상의 어느 수도사가 소속 수도원과 이름을 밝히지 않는단 말입니까? 게다가 의사를 자처하는 것은 대체 무슨 저의고요? 설령 서원했던 성직자라 하여도, 지금은 성직자의 의무를 저버린 채 세속을 탐닉하는 버러지에 불과합니다.”

“…이름을 모르신다고요.”

“그렇습니다. 마을 주민들에게도 한번 여쭈어 보십시오. 그자는 반년이나 더불어 지내고도 뭐 하나 제대로 밝힌 것이 없습니다.”

사제가 코웃음을 쳤다.

창살 밖에서 잠자코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페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대로 감옥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모습에 시몬 사제가 당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페기는 깊은 생각에 잠긴 채로 걸었다.

시몬 사제는 오르코에 대해 모른다.

오르코의 정체에 대해 알았다면, 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성직자의 사생아라며 비난을 멈추지 않았을 작자였다. 그런데 시몬 사제는 그보다 오르코의 성직자답지 않은 태도를 지적하고 있었다.

헤렌잘 마을의 수도사들에게서 절대적인 복종을 받고 있는 시몬 사제가 그렇다면, 이 마을에 청백회는 오르코 혼자라는 뜻이 된다.

그는 정말 단신으로 움직이는 걸까. 그렇다면 어째서 보나벤투라의 사생아가 역병이 창궐한 마을에 들어와 있는 걸까. 그의 속셈은 무엇인가.

“…마을 바깥의 동태는 어떤가요?”

“조용합니다. 엘피도 공작 전하께서 비밀리에 파견하신 호위대가 삼엄하게 주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의하라 이르세요. 공식적인 수행 인원이 아닌 외부 세력의 존재가 들통난다면, 퀴테리아 추기경에게 괜히 공격할 소지만 주는 격이니까요.”

마지막 시험으로 불을 피우는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시험을 무르고 싶어 하는 것은 비올라와 퀴테리아 쪽이었다.

만일 비공식적인 호위대의 존재가 발각된다면, 퀴테리아는 외부 세력이 불공정하게 시험에 간섭했다는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고 갈 것이 빤했다. 상황이 그리된다면, 비밀 호위대가 페기를 노리는 청백회의 음흉한 손길을 저지하기 위함이었다는 본래의 목적에는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터.

호위대장은 고개를 숙여 복종을 표했다. 페기는 잠시 망설이다가 발길을 돌려 교회로 들어갔다. 목적지는 의사가 있는 방이었다.

“악! 으악!”

문을 열자마자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페기는 조금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약을 바르는 것도 그리 고통스러워할 사람이 쓸데없이 자해는 왜 했어요?”

“자, 자해가 아니라… 악! 그, 그만 좀 하세요, 제발!”

오르코는 웃통을 벗은 채 침대에 묶여 있었다. 채찍질을 당한 등의 상처를 돌보기 위함이었는데, 양손 양발 다 묶이고도 몸부림이 워낙에 심하여 약을 발라 주던 마샤까지 진저리를 칠 지경이었다.

“가만히 좀 계세요!”

참다못한 마샤가 매섭게 팔뚝을 때리자, 오르코는 코를 훌쩍이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페기는 혀를 차며 침대에서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았다.

“상처가 다 나을 때까지 침대에서 내려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요.”

“하, 하지만 환자들을 돌보아야….”

“환자들은 마을 주민들이 잘 돌보고 있어요. 어차피 상처에 약을 발라 주는 것 말고는 당신도 할 줄 아는 게 없잖아요?”

날카로운 지적에 오르코는 시무룩하게 입을 다물었다. 페기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헤렌잘 마을에는 왜 들어왔죠?”

“말씀 드리지 않았습니까. 환자들을 돌보기 위해서라고….”

“보나벤투라의 사생아인 그대가?”

여상한 반문에 오르코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저, 전하의 시험을 방해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절대 아닙니다! 애당초 저는 반년 전 이 마을에 들어온 뒤로 외부의 사정은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살아 돌아오셨다는 것도 저는 전혀….”

“알아요. 청백회도 바보가 아닌 이상, 날 방해하겠답시고 당신처럼 어수룩한 사람을 내보낼 리 없을 테니.”

“예….”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오르코가 또다시 비명을 삼키며 몸부림을 쳤다. 페기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가 궁금한 건 그대가 단독으로 행동하는 이유예요. 보나벤투라 추기경이 설마 친아들을 사지로 내몰았을 리도 없고.”

“…친아들이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 괜한 부정은 하지 마요.”

“부정이 아니라….”

오르코는 무언가 속에 담아 둔 것이 있는 듯한 기색으로 입술만 씹어 댔다. 페기는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의 얼굴이 보나벤투라 추기경을 꼭 빼닮았는데 내가 그 말을 어찌 믿나요?”

“…하지만 추기경 예하께서 저를 친아들로 여기지 않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분께 저는 그저 악행의 소치요, 부덕의 상징이니까요.”

침대에 엎드려서 웅얼거리는 오르코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그를 응시하던 페기가 고개를 돌려 마샤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 명했다. 마샤는 오르코의 손발을 묶어 놓았던 가죽끈을 풀어 주곤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페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오르코.”

지척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오르코가 흠칫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가 어느새 침대맡으로 바짝 다가와 있었다.

“저, 전하.”

황급히 침대 구석으로 물러난 오르코가 담요로 벗은 몸을 꽁꽁 감쌌다. 페기는 침대에 앉으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보나벤투라 추기경이 그대의 생모 되는 분을 억지로 감금하고 있다면서요.”

순간 오르코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말보다 확실한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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