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5화 (235/328)

“의사는.”

“옷이 더러워져서 잠깐 자리를 비우셨어요.”

페기는 병자들을 모아 놓은 집 앞에서 다시 발길을 돌렸다.

의사가 머무는 독채는 마을 외곽에 있었다.

봉쇄되었던 지난 반년간 사람 손길이 닿지 않은 외곽에는 벌써 수풀이 무성해졌다. 금방이라도 날짐승이 튀어나올 것처럼 어두침침한 광경은 사람의 마을이라기엔 흡사 마을과 접한 산자락에 가까웠다.

무기를 꺼내 들고 사방을 경계하는 호위대 사이에서 페기는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내디뎠다.

눈자위까지 내려앉은 나뭇가지를 거두어 내자, 저 멀리로 짙은 고동빛의 통나무집이 보였다. 민가라기 보단 창고에 가까워 보였는데, 벽을 타고 지붕까지 올라온 넝쿨이 금방이라도 집을 무너트릴 것처럼 육중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조차 저문 사위.

그녀와 호위 기사들의 발소리는 바닥을 내리깐 이끼가 삼킨다. 머리 위를 무성하게 뒤덮은 나뭇잎 사이로 오후의 햇살은 사느랗게 내려오고,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자연 그대로의 적막감이 도리어 그들의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었다.

페기는 현관으로 발을 들였다.

썩어 들어가는 나무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 온다. 그녀는 천천히 문으로 손을 뻗었다. 헐거워진 문의 틈새로 엿보이는 시커먼 어둠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미약한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문짝에 닿은 손이 그대로 멈추었다. 그러나 작은 접촉에 나무문이 밀려나며 끼이익, 귀청을 찢는 쇳소리가 길게 울렸다. 영원 같은 찰나, 떠밀려진 문을 따라 어두운 집 안으로 햇살이 둥글게 드리워지며 그녀는 한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저도 모르게 한 발짝 안으로 내딛던 페기가 무언가 밟힌 감촉에 다시 발을 뒤로 물렸다. 그녀는 허리를 숙여 쪼개진 장미 브로치를 집어 들었다.

“그, 그건…!”

휘둥그레진 눈으로 달려 나오려던 의사가 발치의 옷가지를 밟고 미끄러졌다. 웃통을 벗은 맨몸이 오후의 햇살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갈비뼈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나는 마른 몸에 고행의 흔적이 한가득이었다.

불로 지진 오래된 흉터.

성기게 봉합한 자상.

아문 흉터 위로 새롭게 그어진 피투성이 상처.

페기는 부서진 브로치를 꽉 틀어쥐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자, 의사가 눈에 띄게 흠칫하며 덜덜 떨기 시작했다. 밟고 넘어진 옷가지가 지푸라기라도 되는 양 꼭 부여잡고는 가만히 그녀를 올려다본다.

페기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던 덥수룩한 곱슬머리를 거둬 냈다. 집 안으로 드리워진 어슴푸레한 그림자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서서히 드러났다.

“…당신이었군요.”

그녀가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오르코.”

***

보나벤투라가 사택으로 돌아온 것은 느지막한 저녁 시간이었다. 귀가 시간에 맞추어 대문 앞을 서성이던 집사는 마차에서 내리는 그를 충실히 안으로 모시었다. 골목을 따라 번져 오는 잿빛 땅거미가 닫히는 문 틈새로 스며들었다.

집사의 시중을 받아 편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보나벤투라는 저녁 식사를 들기에 앞서 집무실로 향했다.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을 두어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곳에는 일찌감치 그의 수하가 대기하고 있었다.

“예하.”

얼핏 평범해 보이는 수하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상석에 앉은 보나벤투라가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오래간만이로군, 자네.”

“그간 찾아뵙지 못하여 송구합니다.”

“됐네. 그 아이는 찾았나?”

수하가 굳은 얼굴로 다시금 고개를 깊게 조아렸다.

“명하신 대로 할가로 수도원 인근의 마을을 모두 뒤져 보았으나, 오르코 님의 행방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자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보나벤투라의 두꺼운 입술이 일자로 다물렸다. 수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할가로 수도원장의 말에 따르자면, 마지막으로 뵈었던 오르코 님은 산책을 나가시는 것처럼 보였을 만큼 짐이 적으셨다고 합니다. 분명 멀리 가진 못하셨을 테니 너무 염려치 마십시오. 현재 마가 지방과 카타리나 지방으로도 수색 범위를 넓히고 있습니다.”

“…하지만 할가로 수도원을 나간 것이 벌써 반년 전일세. 반년이면 교국을 반 바퀴 돌고도 남을 시간이야. 진정 주위에 오르코의 탈주를 도울 만한 인물은 없었다던가?”

“워낙에 여러 수도원을 전전하셨던지라 깊은 친분을 맺은 사람은 달리 없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 초조한 기색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입가를 감싸 쥐고 책상 앞을 서성이는 그의 안색이 유독 창백했다.

“형세가 좋지 않다. 그러잖아도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형국이야. 허리끈을 매고 옷깃을 접는 것조차 조심해야 하는 때에 이런 변고라니….”

무의식적으로 엄지손톱을 물어뜯던 보나벤투라가 갑자기 수하를 돌아보았다.

“혹 오르코를 쫓는 와중에 수상한 사람은 보지 못했나?”

“수상한 사람이라니요?”

“오르코의 행방을 쫓는 사람이 너희 말고도 또 누가 있었느냐는 말이다.”

잠자코 기억을 더듬던 수하가 고개를 내저었다.

“딱히 의심스러운 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나마 다행이군. 앞으로도 입을 조심해야 한다. 오르코가 사라졌다는 걸 누구도 눈치채서는 안 돼.”

보나벤투라가 초조하게 창밖을 곁눈질했다.

“엘피도 공작뿐만 아니라 퀴테리아 추기경도 마찬가지다. 알아들었느냐?”

“예.”

보나벤투라는 이만 나가 보라는 손짓을 했다. 수하는 기척 없이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겨진 보나벤투라는 쓰러지듯 소파에 파묻혔다. 그는 피로가 가득 묻어나는 얼굴을 느릿하게 문지르며 한숨을 흘렸다.

오르코는 그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우둔한 머리, 심약한 성정, 허약한 의지.

무엇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초라한 녀석이 얼굴만은 그를 쏙 빼닮아 있었다. 오랫동안 중앙 교회에 몸담았던 그의 젊은 시절 얼굴을 아는 사람이 성도에 널리고 널린 마당에 언제까지 곁에 두고 감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지방 수도원으로 빼돌렸다. 행여 그 가벼운 입을 함부로 놀릴까 저어되어 반년에 한 번씩은 꼭 거처하는 수도원을 옮기도록 했으며, 반강제로 묵언 수행을 강요하기도 했다. 그렇게 녀석은 누구와도 연을 맺지 않으며, 아무도 모르는 외진 곳에서 아무도 모르게 파묻혀 살아야만 했다.

그에게 말 붙일 용기조차 없어 불만 한 줄 써 보내지 못하던 녀석이었다. 서원한 수도사 주제에 본인의 원죄를 사해 줄 고행마저 제대로 견디지 못하던 그 한심한 녀석이, 달아났단다. 아무런 전언도 남기지 않고.

평상시였어도 문제가 되었을 상황인데 하물며 낭떠러지를 눈앞에 둔 시국이었다. 사소한 실수 하나가 그를 나락으로 떠밀지도 몰랐다. 오르코는 그야말로 그의 숨통을 끊을 비수나 다름없었다.

“…엘피도 공작에겐 클레멘스가 있어.”

클레멘스, 하필이면 그 교활한 여우 새끼가 엘피도 공작의 오른팔을 자처하고 있었다. 오르코의 존재를 아니, 필시 저의 약점을 엘피도 공작에게 일러바쳤을 것이다. 지금쯤이면 그쪽도 비밀스럽게 움직이고 있을 테니, 오르코의 행방이 알려지는 것은 시간문제.

만일 엘피도 공작 측이 오르코를 먼저 발견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평생토록 쌓아 왔던 그의 명예, 그의 지위. 모두가 땅으로 떨어지게 될 것이며, 누구보다 올곧았던 그의 신앙이 의심받게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청백회가 그를 좌시할 리 없었다.

때로 누구보다 냉혹하게 보이던 퀴테리아를 떠올리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보나벤투라는 주먹을 움켜쥐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남들보다 먼저 오르코를 찾아내야만 했다. 찾아서, 이번에야말로 아무도 모르는 곳에 꽁꽁 숨겨 두어야 했다. 제 손으로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엘피도 공작의 손아귀에 살아 숨 쉬는 오르코가 들어가는 일만큼은 막아야 한다.

그는 집무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중간에 마주친 집사가 저녁 식사를 권하는 것도 물린 채 정신없이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똬리 튼 뱀처럼 둥글게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아래로, 또 아래로.

창문 없는 지하에는 촛불이 간간이 통로를 밝히고 있었다.

사방에 돌을 박아 넣은 통로는 한 사람 겨우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좁다랬다. 아무리 악을 내질러도 지상으로 닿을 수 없는 깊이는 도리어 귀를 먹먹하게 하는 적막감을 선사했다. 보나벤투라는 불현듯이 심해에 들어 있는 것만 같은 갑갑한 느낌을 받았다.

비단 오늘만의 일은 아니었다.

사택의 가장 밑바닥.

수백 년 전엔 핍박받는 성직자들의 퇴로였고, 수십 년 전엔 라발 용병들의 군홧발을 피해 시민들이 숨어들었던 이곳에 지금은 마녀가 연명하고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질질 끄는 듯한 발걸음으로 복도를 걸어 나갔다. 풍랑에 요동치는 선박 위에라도 선 것처럼 발밑이 울렁거리고 시야가 흔들렸다. 복도 끄트머리에 있는 문이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가느다란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새가 지저귀듯 맑고 고운 소리. 보나벤투라는 홀린 듯이 노랫소리를 따라갔다. 그러고는 어느새 문 앞에 다다라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온통 무채색으로 통일된 방이었다. 장식품 하나 없이 단조로운 실내에는 옷장과 침대, 탁자 등 필수적인 가구들만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리고 방 중앙에 놓인 침대에선 한 여인이 고운 미성으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보나벤투라는 넋 놓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꿈을 꾸는 기분으로.

“…에구머니나!”

여인의 탐스러운 머리를 정성껏 빗질하던 하녀가 불현듯이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하녀가 떨어트린 빗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어느새 노랫소리가 멎은 방 안에는 싸늘한 정적이 가득 들어찼다.

보나벤투라는 서서히 잠에서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방 안의 적막이 어느덧 수천 개의 바늘이 되어 그의 온몸을 찔러 오고 있었다. 돌아보지 않는 여인, 겁먹은 듯한 하녀의 눈망울. 방 안의 모든 것이 그를 무례한 불청객으로 낙인찍고 있었다.

순간적인 당혹감은 수치심이 되고, 수치심은 곧 노여움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거친 숨을 씨근덕거리며 당장에 침대로 다가섰다.

“예, 예하….”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말리려던 하녀마저 끝내 단념하곤 조용히 방을 나갔다. 문 닫히는 쇳소리가 그치고 나서야 보나벤투라는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오르코가 너에게 서신을 보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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