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4화 (234/328)

“…….”

“저는 사제님께 밉보여 독채에 갇혀 있었던 터라 어떻게 죽었는지, 시신은 어떻게 되었는지도 잘 모릅니다. 그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지요. 그런데 설마 이 아이까지 역병에 걸릴 줄은….”

의사가 처량하게 눈물을 떨구었다.

페기는 그제야 지금 고약을 발라 주고 있는 병자가 어젯밤 그녀에게 의사의 존재를 알려 주었던 어린 여자아이임을 깨달았다. 가시넝쿨이 할퀴고 지나간 것처럼 상처투성이 등이 유난히 작고 여위었다.

“높으신 분.”

의사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들어 올렸다.

“제가 비록 변변찮은 의사긴 하지만, 시몬 사제님의 이런… 잔인한 방식으로 병을 고칠 수 없다는 건 잘 압니다. 고행으로 씻어야 하는 죄는 역병이 아닙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병자들만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 뿐이에요.”

“…….”

“제발 부탁입니다. 시몬 사제님을 벌하여 주십시오. 벌하실 수 없다면, 적어도 다시는 이 마을에 발붙이실 수 없도록 조치해 주십시오.”

약병을 쥔 의사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기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이 마을에서 역병보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시몬 사제님의 본모습이었습니다.”

“…….”

“염려하지 마세요. 내가 헤렌잘 마을을 떠나는 날, 사제님도 영원히 이 마을을 떠나시게 될 겁니다.”

긴장으로 잔뜩 죄어 있던 의사의 몸이 그제야 스르르 풀렸다. 그는 연거푸 한숨을 내쉬며 까칠하게 마른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페기는 거의 탈진한 듯한 의사를 대신해 병자의 환부에 세심하게 고약을 발라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의 이름을 듣지 못했군요.”

지나가듯 던진 물음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페기는 흘끗 눈만 들어 올렸다.

“내 소개부터 해야 하나요?”

“아, 아니요! 아닙니다!”

이상할 정도로 침잠되어 있었던 의사가 당혹스러운 기색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그저… 귀하신 분께 감히 들려드릴 이름이 아니라 그렇습니다.”

“이름에 경중이 어디 있나요.”

“죄인의 이름에는 있습니다.”

의사의 갈라진 입술에 어렴풋한 쓴웃음이 떠올랐다.

“고행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에게는요.”

***

그날 저녁에 한 명의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병자들에게 수도사들의 모진 채찍질은 쉽게 견딜 수 있을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조차 사경을 헤매기 시작하니, 페기는 호위대 중 일부를 밖으로 내보내 고약을 조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밤낮없이 일했다.

손쓸 수 없는 병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채찍으로 난도질당한 환부에 약을 발라 주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 붙일 새 없이 병자들의 곁을 지켰다. 때로는 신음하는 병자들의 손을 잡고 기도문을 읊어 주었으며, 때로는 함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반복되는 광경을 지켜보던 페기는 문득 교회가 달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교회는 허물어져 가는 민가에도 있었고, 돌림병이 창궐한 마을에도 있었다. 교회라고 이름 붙여진 건물에만 교회가 없다는 사실은 못내 기이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페기는 의사를 도와 병자들을 간호하는 한편, 붙임성 좋은 마샤에게 은밀히 명을 내렸다. 마을 주민들과 접촉하여 정보를 수집하라는 것이었는데, 마을의 정황은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주민들 역시 시몬 사제의 공포스러운 지배에 내심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는 것, 그럼에도 확신이 없어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는 것.

하기야 역병에 걸려 죽어 가는 와중에 모진 채찍질까지 당하던 병자들은 모두 그들의 가족이고 이웃이었을 테니, 혼란이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예상 밖의 반응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의사에 대한 주민들의 경계심이었다.

“아무도 의사 선생님의 이름을 모른대요.”

마샤는 그렇게 이야기했다.

“어디서 왔는지, 가족은 어디 있는지, 나이는 몇인지. 제대로 말해준 것이 아무것도 없대요. 그리고 한 가지 이상한 얘기를 들었는데….”

속삭임이 잦아들었다.

“마을 이장 어르신이 돌아가신 뒤로 의사 선생님은 시몬 사제님의 명령에 따라 독채에 갇혀 지냈다고 하셨잖아요. 밤마다 그 독채에서 이상한 신음 소리가 들렸대요.”

“신음 소리?”

“예. 새미 아저씨는 올란다 아주머니와 의사 선생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아주 확신하던데, 정작 올란다 아주머니는 의사 선생님을 되게 꺼림칙하게 여기는 것 같았어요. 사람이 좀 어두워 보인다나…?”

페기는 고심에 잠겼다.

어차피 성도에서 제대로 된 의사가 오기까지 사나흘이면 되는 마당에 구태여 지금 의사와 각을 세울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대놓고 본인의 정체를 숨기고 있으니 의심이 싹트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고행으로도 용서받지 못할 죄인.”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외부에서 범죄라도 저지르고 도망쳐 온, 말 그대로의 죄인인 줄만 알았다. 하지만 계속해 지켜보건대, 아무리 봐도 의사는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더욱이 고행으로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표현이 영 석연찮았다. 이는 상당히 종교적인 표현이다. 만일 세속의 법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다면, 차라리 어떤 방법으로도 죗값을 치르지 못할 죄인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지 않겠나.

호기심은 호기심일 뿐이다.

데리고 온 호위대만 해도 성도로 보낸 전령과 약초를 구하기 위해 내보낸 한 명을 제하니, 벌써 감옥에 가둬 둔 사제와 수도사들을 감시하는 데도 부족하게 되었다. 조금 의심스럽다고 하여 의사의 뒤까지 파 볼 여력은 없었다.

역병에 죽어가는 병자들이 아니더라도 헤렌잘 마을에는 심각한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전하. 어제 내린 비로 곡물 창고가 모두 침수되었다고 합니다.”

호위대장이 심각하게 전하는 말에 창고로 가 보니, 쌓아 두었던 곡식이 모두 못 먹게 되어 있었다. 침수되지 않은 일부마저 썩어 문드러져 쥐에게 갉아 먹힌 상황. 페기는 하는 수없이 마을을 봉쇄하고 있는 병사들에게 추가적으로 식량을 배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소란스럽기는 시몬 사제와 수도사들이 갇힌 감옥이 제일이었다.

무덤처럼 적막한 마을에 웬 고함 소리가 들려온다 싶으면, 열의 아홉은 감옥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교대로 감옥을 지키는 호위대는 감옥만 다녀오면 죽상이 되었는데, 이유를 물으니 시몬 사제가 끊임없이 그녀를 불러오라 난동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그 의사에 대해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페기는 코웃음을 쳤다. 아무리 궁금하기로서니 미친 사제에게 물을까. 설령 시몬 사제가 무언가 알고 있는 것이 있다 쳐도, 그 입으로 들어선 안 되었다. 말은 아주 간교한 것이라, 사실을 왜곡하여 거짓된 전언으로 둔갑되기 십상이었다.

이렇게 자잘한 문제가 일어나긴 해도, 마을은 종일 고요하고 얼핏 평화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반년의 봉쇄는 마을 주민들에게 뿌리 깊은 포기를 선사한 듯했다. 주민들은 더 이상 울지도, 슬퍼하지도 않았다. 하루하루 죽어 나가는 병자들의 시신을 태울 때마저 그들은 눈물 자국 없이 허망한 낯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곤 했다. 페기는 감히 그들의 눈빛을 읽으려 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마을 밖에서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행정관이 식량을 갖고 왔습니다.”

“행정관이 직접?”

페기는 의아한 기색으로 교회를 걸어 나갔다.

허름한 목책 밖에는 보고대로 식량을 가득 실은 짐마차와 행정관이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제자리를 서성이던 행정관이 문을 열고 나오는 페기를 발견하곤 부리나케 달려왔다.

“저, 전하!”

행정관은 거의 무릎을 꿇은 기세였다. 페기는 혀를 차며 그를 만류했다.

“여기까진 어쩐 일인가요?”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어찌 제가 달려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 마디로 조금이라도 벌을 피하고자 아양을 떨겠다는 뜻이었다. 페기는 눈에 뻔히 보이는 행정관의 수작은 모른 척 짐마차를 보았다.

“저게 식량인가요?”

“예! 일부러 상등품의 곡식만 가득 담아 왔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좋아하겠네요.”

덤덤한 대꾸에 행정관이 조금 당혹한 기색으로 어물거렸다. 페기는 호위대를 시켜 짐마차를 마을 안으로 들여보냈다.

“바깥에 별일은 없나요?”

“예…. 성도로 사람을 보내셨다고 들었습니다.”

행정관이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페기는 선선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된 의사를 불러야 하니까요.”

“다행입니다. 저도 나름대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봉쇄를 했다고는 하나… 의사 한 명 없이 내버려 두는 것도 좀 그렇지 않습니까.”

“의사라면 한 명 있던 것을요.”

지나가듯 흘린 말에 행정관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의사가요?”

“네.”

“헤렌잘 마을에서 의사 노릇 하던 약초꾼은 일찌감치 역병에 걸려 죽었을 텐데요?”

“저어… 약초꾼 할배를 말씀하시는 거라면, 아마 봄인가 여름인가에 죽었을 겁니다.”

목책을 지키던 병사가 은근하게 끼어들었다. 페기는 고개를 저었다.

“내가 말하는 의사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듣기론 외부에서 들어왔다는데….”

“외부에서요? 어떤 미친놈이 역병이 창궐한 마을에 제 발로 들어온단 말입니까?”

놀란 행정관이 펄쩍 뛰었다. 유난스러운 반응에 페기가 의아한 듯이 눈을 깜박였다.

“검은 머리에 여위어 보이는 젊은 남자. 마을 주민들 말로는 봉쇄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마을로 들어왔다고 했어요.”

“검은 머리에 야위어 보이는….”

행정관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저들끼리 한참을 쑥덕거리던 병사들이 갑자기 손을 들며 외쳤다.

“아! 아! 기억납니다! 키는 이만하고, 숫기 없어 보이는 젊은이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이상하다. 그런데 그 젊은이가 의사였나…?”

병사들이 어딘지 모호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부터 발끝까지 시커먼 옷을 입고 있었던 건 기억이 납니다. 꼭 사제님처럼!”

“짐도 별로 없었고… 아! 웬 꽃을 달고 있었어요! 진짜 꽃은 아니고, 파란 장미 모양의 장식을 가슴팍에 매달고 있었습죠!”

페기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행정관이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파란 장미라면 청백회의 상징이 아닙니까?”

페기는 당장에 등을 돌려 마을로 들어갔다. 머리와 손발이 차갑게 식어 가고 있었다.

파란 장미, 청백회.

고행.

왜 몰랐을까.

고행으로 죄를 씻어 내린다는 것은 종교적인 표현이다. 하지만 중죄를 범하지 않은 이상에야 실제로 고행하는 이들은 요즘 시대에 드물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채찍질함으로써 있지도 않은 죄를 씻어 내리고, 고통으로 깨달음을 얻으려는 자들은 청백회가 유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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