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3화 (233/328)

이런 궁벽진 마을에 의사란 놈들이라 봤자 약초꾼 아니면 거짓말쟁이 연금술사라던 사제의 말이 떠올랐다.

페기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래도 저런 사람이나마 없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성도로 사람을 보냈으니 앞으로 닷새면 의사가 도착할 거예요. 그때까지만이라도 병자들을 돌보아 줄 수 있나요?”

“제가… 말입니까?”

어깨를 움츠린 채 바닥만 보던 의사가 그제야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렸다.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얼핏 보이는 눈이 의외로 맑았다.

“자신 없나요?”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시몬 사제님이 반대하실 겁니다. 저를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라… 무, 물론 제 의술이란 것이 변변찮은 것은 맞습니다만….”

의사가 몹시 당혹한 기색으로 횡설수설했다. 저대로면 병자를 돌보기도 전에 졸도할 것만 같았다.

페기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을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의사는 봉쇄령이 내려진 초봄에 제 발로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역병이 도는 마을에 자진하여 들어올 정도니 의사로서의 마음 가짐은 훌륭하리라 여겼건만, 이렇게 무늬만 의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페기가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을 또 한 번 내쉬자, 흘끔흘끔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의사가 아주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저… 여쭙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만….”

“말해요.”

“저를 의사로 삼으시겠다는 건… 높으신 분께서 마을을 완전히 장악하신 건가요?”

멈칫한 페기가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내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개처럼 바닥에 달라붙어 있던 의사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다.

“그렇다면요?”

“만약 시몬 사제님과 수도사님들이 전부 물러나신 거라면… 지금 병자들은 누가 돌보고 있습니까?”

“몇몇 주민들이 자진하여 돌보고 있어요.”

대답을 듣기 무섭게 의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페기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 아니요! 아닙니다! 너무 안심해서 그만….”

의사가 굽었던 등을 도로 꼿꼿하게 폈다.

“앞으로도 병자들은 주민들의 손에 맡기셔야 합니다. 지금 살아 있는 주민들은 대부분 역병에 걸렸으나 자연적으로 회복한 분들이세요. 이런 사람들은 역병에 다시 걸리지 않습니다.”

“어째서죠?”

“그, 그건, 저도 이유는 잘….”

의사가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페기의 표정이 심상치 않자, 의사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저, 정말입니다! 반년 동안 이 마을에 머물면서 비록 치료법은 알아내지 못했지만, 역병의 몇 가지 특징은 파악했습니다! 이유는 몰라도 역병에서 회복된 사람은 다시 역병에 걸리지 않고, 또 이유는 모르겠지만 극소수의 사람들은 역병에 걸리지 않고….”

“…….”

“자, 잘은 몰라도 저 역시 역병에 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병자들을 돌보았는데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걸 보면….”

비록 제대로 아는 건 없지만, 지난 반년이 그에겐 제법 귀중한 경험이 된 모양이었다.

페기는 하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정식으로 성도에서 의사가 올 때까지 그대의 의견을 최우선으로 삼을 테니, 혹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요.”

“저, 정말입니까…?”

그녀가 말없이 쳐다만 보자, 의사는 다급히 입을 틀어막았다.

페기는 고단한 기색으로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미덥지 못한 자인 건 확실하나, 지금은 다른 대안이 없었다.

“어떻게 할까요. 비가 그치는 대로 횃불을 다시 올릴까요, 아니면 다른 일부터 할까요.”

“횃불은 아무런 소용도 없습니다.”

의사가 어쩐 일로 단언했다.

“시몬 사제님께 들으신 이야기지요? 횃불로 허공에 떠도는 역병의 근원을 불태워야 한다고…. 하지만 저는 불로 병을 퇴치한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건 허황된 낭설에 불과해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한심하기 그지없더니, 또박또박 말하는 본새가 꽤나 믿음이 갔다. 페기는 의자 등받이에 늘어져 있던 몸을 일으키며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또 혹시라도 병자들과 접촉하신 분이 있다면 그때 착용하셨던 모든 의복을 태우셔야 합니다. 제 허락 없이는 절대, 절대로 병자들이 있는 집으로 들어오셔선 안 되고요.”

“문 앞에 보초를 세울게요.”

“가장 중요한 건 이겁니다.”

의사가 조금 긴장된 표정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제발… 시몬 사제님을 병자들과 격리해 주십시오.”

페기는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덥수룩한 앞머리 사이로 설핏 보이는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어, 어떻게 들으실진 모르겠지만… 사제님은 지금 병자들에게 역병만큼이나 위험하신 분입니다. 제, 제가 감히 사제님의 자격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고, 그냥 의술을 조금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드리는 말씀이니….”

“알아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페기가 조용히 대꾸했다. 멈칫한 의사가 두 눈을 껌벅였다.

“아신… 다고요?”

“내가 어떻게 당신의 존재를 알았다고 생각해요?”

부릅뜨인 의사의 두 눈에서 초점이 살짝 가셨다. 바닥을 짚고 있던 그의 양손이 경련하기 시작했다.

“서, 설마 병자들에게 또….”

페기는 눈에 띄게 파들거리는 의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저 떨림은 분노에서 기인한 것일까, 아니면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일까.

“사제와 수도사들은 모두 감옥에 가둬 두었어요. 시몬 사제가 또다시 병자들에게 위해를 가할 일은 없을 테니….”

“그걸 왜 이제야 말씀하시는 겁니까!”

버럭 소리를 내지른 의사가 비틀거리며 일어서더니, 말릴 틈도 없이 방을 빠져나갔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올렸던 페기가 치맛자락을 휘어잡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복도로 나오자, 벌써 저만치 멀어진 의사의 발소리가 아득하게 울려 왔다. 페기는 호위대를 이끌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의사가 갈 만한 곳은 빤했다.

비는 여전히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먹구름이 가득 낀 재색 하늘을 잠자코 올려다보던 페기는 마샤가 받쳐 든 우산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어젯밤 병자들의 피가 튀기고 성직자들의 광기가 넘쳐 흐르던 공터에는 흙탕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그녀는 공터를 가로질러 병자들이 기거하는 집 앞에 이르렀다.

“전하. 또 혼자 들어가시려고요?”

마샤가 못내 근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페기는 말없이 집 안에 홀로 발을 들였다.

불을 피워 두었는지 실내에는 훗훗한 온기가 감돌았다. 페기는 눈앞을 가로막는 두꺼운 천들을 들추어 안으로 들어갔다. 시원하게 뚫린 집 안에는 일곱 명의 환자들과 그들을 간호하는 주민들이 있었다.

그중 어느 병자의 환부에 고약을 바르던 의사가 그녀를 발견하곤 벌떡 일어섰다.

“들어오시면 안 된다니까요!”

“괜찮아요.”

페기는 태연하게 다가갔다. 그녀를 말리려는 듯 의사가 황급히 앞을 가로막았다.

“어서 나가십시오, 어서!”

“나는 병 안 걸려요.”

“그걸 어찌 아신다고요!”

“성도의 의사들이 그랬어요.”

천연덕스러운 거짓말에 의사는 순간 할 말을 잊은 듯했다. 페기는 그를 스쳐 병자가 누워 있는 침대로 향했다.

“성도의 자격 있는 의사들이 그랬으니, 변변찮은 그대는 토 달지 말아요.”

“…정말 성도의 의사들이 그랬습니까?”

의사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페기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정말로 실력이 변변찮긴 하구나.

“이 약을 발라 주면 되나요?”

페기가 약통을 들어 올리자, 의사가 시무룩하게 다가와 침대 맞은편에 앉았다.

“귀하신 분께서 어찌 이런 곳에 드십니까. 저와 마을 주민들로 충분하니 교회로 돌아가십시오.”

“나는 교황 성하의 지엄한 명을 받아 역병을 해결하기 위해 왔어요.”

페기는 벌건 생살이 그대로 드러난 병자의 피투성이 환부에 약을 바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 보니 알겠네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해야 악랄한 성직자들을 격리하고, 성도로 연락을 넣어 제대로 된 의사를 부르는 일뿐이란 걸.”

“…….”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 남은 손이나마 그대를 도와야지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의사가 양손을 꽉 맞잡은 채로 고개를 수그렸다.

“저는… 성하께서 이곳을 버리신 줄만 알았습니다.”

“세상사는 복잡한데, 성하의 눈은 단 두 개뿐이죠. 지금껏 의도적으로 외면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반년을 지옥에서 살다 보니 믿음이 약해지더군요. 어쩌면 시몬 사제님의 뜻이 성하의 뜻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고해하듯 드문드문 이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페기는 지난 밤 목격했던 늙은 사제의 모습을 떠올렸다. 의심 많고 조금 까칠하다고만 여겼던 겉가죽 안에는 그토록 소름 끼치는 광기가 숨어 있었다.

“시몬 사제는 원래부터 그런 분이셨나요?”

“아뇨, 절대 아닙니다. 조금 예민하시긴 해도 시골 마을의 평범한 사제님이셨죠. 그런데 역병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나으신 뒤로 갑자기 돌변하셨습니다. 역병은 천사께서 내리신 형벌이니, 역병에 걸린 병자들은 모두 하늘의 죄인이라… 죄인은 마땅히 고행으로 죄를 씻어야 한다고요.”

페기는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그리 얼토당토않은 말에 온 마을이 휘둘렸다는 것이 놀랍네요.”

“뭐어… 시골 사람들이야 사제님의 말씀이 하늘의 뜻이고, 나라님의 뜻이니까요. 그래도 이장 어르신이 살아 계셨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장이 죽고 시몬 사제가 마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고 들었어요.”

“네…. 지난 늦여름의 일입니다.”

의사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미역처럼 늘어진 앞머리 사이로 설핏 보이는 두 눈에 처연한 빛이 감돌았다.

“시몬 사제님이 처음부터 저를 마땅찮아 하셨음에도 지금껏 마을에서 의사 노릇 할 수 있었던 건 전부 이장님 덕분입니다. 비록 사람을 살리지도 못하는… 그런 보잘것없는 의사였지만, 제게 숙식할 곳과 음식을 내어 주시며 병자들을 돌보게끔 하셨지요.”

“…….”

“마을 주민들 한 분, 한 분 떠나실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지만, 이장님께서 돌아가셨을 땐 도무지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좀 더 제대로 된 의사였다면 살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으로 여러 밤을 지새웠어요. 결국에 털고 일어선 것은 이장님이 남기신 어린 남매들 때문이었습니다만.”

“남매요?”

“예. 사랑이 가득한 아이들이에요. 낯선 저를 삼촌처럼 따르며 좋아해 주었지요. 이장님께서 돌아가신 뒤로 독채에 갇혀 지내던 저를 몰래 찾아와 이야기 상대가 되어 주기도 했고요.”

의사가 킁, 하고 코를 들이켰다.

“동생이 되는 사내아이는 지난달에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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