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2화 (232/328)

행방이 묘연했던 과거 1년간 그의 행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며, 이후로도 그가 가끔씩 내비치는 충동적이고 감정적인 면모들 역시 그 기원을 알지 못했다. 카타리나 공작을 되찾은 뒤로는 안정을 찾은 듯 보이나, 오늘의 이런 모습을 보자니 과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지도 않다.

그의 변한 모습이 싫으냐 묻는다면, 막시모는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좋다고 단언하기도 어려웠다.

애당초 호오를 명확하기 가르게 어려운 문제였다. 다만 인정(人情)을 보이는 주인의 모습이 낯설었다. 이전의 그가 석고를 깎아 만든 차가운 동상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기가 느껴졌다.

감히 말해 보건대, 한결 사람다워졌다고 생각한다.

“청백회의 동태는?”

불현듯 들려오는 목소리에 막시모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났다. 예후르는 여전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막시모는 얼떨떨한 기분을 털어 내며 신중하게 대답을 골랐다.

“순례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세를 불리고 있습니다. 첫 번째 시험 이후로 알비야 공작에 대한 의혹이 치솟고 있으나, 청백회의 기세가 워낙 막강하여 겉으로 내비치는 자들은 거의 없습니다.”

“그 많은 순례자들을 거두려면 자금이 만만찮게 필요할 텐데….”

좋게 말해 순례자지, 실상은 비렁뱅이 거지에 불과한 그들은 어림잡아 수백에 다다랐다. 어찌 되었든 정식으로 서원하여 교회의 돈으로 먹고사는 기존의 청백회와는 성격이 달랐다. 가산을 탕진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여비마저 없는 그들을 재우고 입히고 먹이는 것은 오롯이 퀴테리아의 주머니에서 나와야 했다.

“명확하게 확인된 자금줄은 위스누아뿐입니다. 그마저 기부금으로 처리되어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고요. 알비야 공작을 지지하는 탐보프가 의외로 인색하게 굴고 있는데, 혹시라도 동부와의 전쟁이 다시금 발발할까 봐 국고를 아끼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위스누아만으로는 청백회의 지출을 감당 못 해.”

“맞습니다. 저희 상단의 개입으로 탐보프 동부와의 중개 무역은 줄이 끊긴 것이나 다름없고, 요즈음엔 통행세 문제로 라발과의 관계도 삐걱거리고 있으니까요.”

중개 무역이 수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위스누아에서 상단이 흔들린다는 것은 곧 도시의 몰락을 뜻했다. 게다가 세르난도 만포르차가 비명횡사하여 후계자 자리도 공석이 된 마당이니, 혼란스러운 위스누아의 정국으로는 청백회에 모든 힘을 쏟을 수가 없었다.

“간자의 보고로는 근래에 위스누아가 바스토뉴의 용병들을 추가적으로 더 고용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위스누아와 바스토뉴 사이에 물품이 오간 정황이 없다는 것이 영 수상쩍습니다.”

“대금을 치르는 것을 미뤘다는 건가?”

“짐작으로는 그렇습니다.”

예후르는 가만히 턱을 매만졌다.

바스토뉴의 용병들은 의뢰에 목숨을 거는 만큼 대금에 철저했다. 마찬가지로 위스누아 역시 상업으로 부흥한 도시답게 거래에 충실했다. 그럼에도 대금 지불을 미루었다는 것은 바스토뉴와 위스누아의 관계가 생각보다 더욱 긴밀하다는 뜻이며, 동시에 위스누아가 그만큼 위태로운 처지에 처했다는 뜻이었다.

“…청백회의 자금줄을 더 상세하게 파헤쳐 보도록.”

“알겠습니다.”

“이번에는 교회 쪽으로.”

위스누아는 청백회의 지출 규모를 감당할 만한 상황이 못되며, 탐보프 역시 혼란스러운 국내 정세를 다스리기 급급하다.

그렇다면 청백회의 돈줄이 될 만한 구석은 단 하나였다.

“엘피도 공작령과 카타리나 공작령은 내가 늘 보고 받고 있으니 제하고, 나머지, 특히 마가 지방과 페란 쪽을 유심히 살펴. 십중팔구 그쪽에서도 막대한 돈이 청백회 쪽으로 새어 들어가고 있을 테니.”

마가 지방을 관리해야 하는 마가 공작 안드레아는 자신의 의무를 내팽개친 지 오래이며, 조만간 성인이 되어 페란 공작의 작위를 받을 차라는 아직 페란 지방을 다스릴 권한이 없었다. 자연스레 두 지방은 중앙 교회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막시모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다른 지방들이야 주인 없는 곳이라지만, 마가 지방과 페란 지방은 상황이 다르지요. 청백회가 엄연히 남의 땅을 수탈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퀴테리아 추기경도 이번에는 빠져나가지 못할 겁니다.”

“서신을 적어 줄 테니 중앙 행정처의 모드벤나와 협조하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보나벤투라의 사생아는 어떻게 되었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던 막시모가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아직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예후르는 그제야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물끄러미 막시모를 쳐다보았다. 막시모는 더없이 겸손한 마음가짐으로 눈을 살포시 내리깔았다.

“클레멘스 추기경의 말씀대로 베나티오 수도원을 찾아가 보았는데, 이미 수도원을 옮긴 지 오래되었다고 합니다. 일단은 기록대로 차근차근 행적을 밟았지만 할가로 수도원에서 모든 기록이 끊겼더군요. 수도원장도 접견을 거부했고요.”

“…….”

“다만 보나벤투라 추기경의 수하들이 할가로 수도원 근방을 뒤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보나벤투라가?”

“예. 할가로 수도원 근방의 마을을 돌며 한 수도사를 찾고 있다더군요. 혹시 보나벤투라 추기경도 아들의 행방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요?”

공식적으로 보나벤투라의 양자인 오르코는 세간에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다. 추기경의 양자쯤 되면 일찌감치 중앙 교회로 올라올 법도 한데, 오르코는 서원한 지 수년이 지났음에도 지방 수도원만을 전전하고 있었다. 어쩌면 클레멘스의 말대로 워낙에 보나벤투라를 닮아, 세간의 이목을 피하기 위한 수작인지도 몰랐다.

생각에 잠겨 있던 예후르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행방은 계속 쫓되, 그 사생아의 과거를 은밀히 파 보도록. 보나벤투라와의 관계는 어떤지, 생모와의 관계는 어떤지.”

“존명.”

막시모가 고개를 숙였다.

이제 마차는 성문을 넘어 아득하게 뚫린 평야를 달리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언덕 위의 저택을 확인한 막시모가 조금 망설이다가 입술을 뗐다.

“…전하. 차라 도련님에 대해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예후르는 눈을 감고, 마차의 벽에 뒷머리를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시모는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요슈아 페임하른이 엊그제 은밀히 뒷골목 상인을 만나 금서를 찾았다고 합니다.”

“…금서?”

예후르가 눈을 떴다. 막시모는 즉각 고개를 조아렸다.

“오래전에 제게 이르셨던 금서의 목록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중 샤를로망 프리울리의 ‘불꽃’, ‘경계’, 페드라 알칸젤티의 ‘뱀의 시대의 종막에 대하여’, 이렇게 총 세 권을 구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예후르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의 눈치를 살피던 막시모가 슬그머니 입술을 뗐다.

“제가 막을까요?”

“…네가 어떻게.”

“그때 제게 이르시길, 이 금서들은 절대 세상의 빛을 보면 안 된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떻게든 그 책들이 차라 도련님의 손에 들어가는 일 없게 제가 최선을 다해 막아 보겠습니다.”

“그 애가 무엇을 찾는 줄 알고.”

마른 웃음을 터트린 예후르가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틀었다. 막시모는 당혹한 기색으로 그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차라는 그냥 내버려 둬.”

“…….”

“그 길 끝에서 무엇을 찾게 될지… 나도 궁금하네.”

진리는 덮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갈구하는 탐구욕 역시 그 어떤 난관에도 꺾이지 않는 법.

예후르는 먹구름이 모이고 있는 서쪽 하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까마득한 산등성이는 벌써 잿빛 먹구름에 휘감겨 있었다. 온 세상 진리를 꿰뚫는 그의 눈으로도 닿을 수 없는 산등성이 너머가 그는 시급하다.

나의 페기.

저곳에서 너는 평안할까.

***

비가 퍼붓기 시작했다.

아침 해는 뜨기 무섭게 먹구름에 가려졌고, 날은 밝기 무섭게 도로 어두워졌다. 사방은 순식간에 빗소리로 가득 찼으며, 퀴퀴한 냄새를 불러오는 습기가 드러난 살갗마다 덕지덕지 달라붙었다.

페기는 비를 싫어한다.

아니, 실은 좋아했다.

쏟아지는 비는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 좋아했고, 부슬부슬 흩날리는 비는 산뜻한 기분을 일으켜 좋아했다. 누군가의 말처럼 비는 영감의 원천이며 예술의 근원이니, 그녀는 빗소리를 들으며 피아노를 연주하길 참으로 좋아했었다.

그토록 좋아했던 비가 끔찍해진 것은 4년 전의 그날 때문이다.

그날에 그녀는 살갗을 우묵하게 팰 것 같은 빗방울을 맞으며 서서히 죽어 갔다. 부연 빗속에서 손이 부서지고, 심장이 꿰뚫렸다. 비는 그녀를 냉혹한 죽음의 세상으로 이끌어 춥고, 또 춥게 만들었다.

빗방울이 떨어질 때부터 자연스레 그녀의 기분은 진창으로 처박혔다.

예전엔 그토록 좋아했던 빗소리와 허공으로 만개하는 안개가 참으로 진저리 났다. 더구나 비가 올 때면 망가진 오른손이 뻐근하게 아파 오니, 육체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비 내리는 순간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페기는 아픈 오른손을 마샤에게 내어 준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횃불이 죄 꺼져 버린 마을은 너절하기 짝이 없었다. 이렇듯 교회의 꼭대기 방에 앉아 굽어보자니, 거리에 볼품없이 나동그라진 쓰레기 더미 같기도 했다.

비가 올 때면 그녀가 예민해지는 것을 잘 아는 마샤는 바지런히 뜨거운 물을 받아 와 그녀의 오른손을 찜질하고 있었다. 찬 공기 속에 내버려 두는 것보다야 통증이 훨씬 완화되긴 했다.

몽롱한 기분에 잠겨 있던 페기는 문득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전하. 의사를 찾았습니다.”

페기의 눈짓을 읽은 마샤가 얼른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호위대장의 뒤로 한 남자가 힘없이 기사들의 부축을 받고 있었다.

기사들은 남자를 데리고 조심스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부축하는 손길이 가시기 무섭게 남자는 철퍼덕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페기는 호위대장을 바라보았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며칠 굶어서 그렇지, 몸은 멀쩡합니다. 이보게, 성도에서 내려온 높은 분이시니 어서 예를 차리시게.”

호위대장의 채근에 의사는 마른 몸을 흠칫 떨더니 공손하게 양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아, 안녕하십니까….”

사춘기를 건너뛴 것처럼 가느다란 미성이었다.

페기는 작게 떨고 있는 의사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을 가리는 덥수룩한 검은 머리에 야윈 몸. 의사라기보단 병자에 가까워 보였다.

“그대가 의사인가요?”

“아…. 예… 일단은….”

“일단은?”

페기의 눈썹이 좁혀 들었다. 의사가 허둥지둥하며 말을 이었다.

“제, 제가 정식으로 사사한 것이 아니라… 원래 지내던 마을에 의사가 귀해, 가끔 마을에 들르시던 약초꾼 어른의 어깨너머로 조금 배운 것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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