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 제발 그만!”
짜악!
“아파요, 사제님, 사제, 아악!”
잠옷째로 끌려 나온 병자들이 거리에 엎어져 있었다. 수도사들이 사정없이 그들의 몸뚱이를 채찍질할 때마다 피가 튀기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울부짖는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페기는 제 귀를 잘라 내고 싶어졌다.
또다시 채찍이 솟구친다.
페기는 어린 소녀의 등짝을 내려치려던 수도사의 손목을 홱 잡아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도 모르게 씹어 뱉듯 튀어 나간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렸다. 눈을 벌겋게 물들인 수도사가 잡힌 손목을 빼내려 몸부림을 쳤지만, 페기가 먼저 그녀의 손에서 채찍을 가로챘다. 그러고는 이 모든 상황을 유유히 지켜보던 늙은 사제를 향해 노성을 내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묻잖아!”
하나둘 채찍질이 멈추었다.
수도사들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멀거니 그녀를 돌아보았다. 구슬땀을 흘리는 그들의 얼굴은 이토록 끔찍한 짓을 자행하는 사람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말갰다.
페기는 터져 나오려는 욕지기를 삼키며 성큼성큼 사제에게로 다가갔다.
“이런 것이 그대가 말하던 ‘돌봄’입니까?”
“고행으로 시련을 견디는 것이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늙은 사제가 태연하게 눈썹을 추켜올렸다. 페기는 아연하여 두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었다.
“이 사람들은 병자예요!”
“천사께서 내리신 시련을 받은 자들입니다.”
“병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시련은 고통으로 이겨 내야만 합니다.”
사제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페기가 천천히 뒷걸음질했다.
이자는 미친 사람이다.
“…호위대장.”
“예!”
“지금 당장 가까운 도시로 가서 의사를 불러와요.”
“소용없습니다. 한낱 의사 따위가 천벌을 어찌 치료한단 말입니까?”
페기는 죽일 듯이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사제는 어깨를 으쓱이며 헛웃음을 터트릴 뿐이다.
“저기 두 사람은 모레면 열흘째가 됩니다. 가까운 도시를 왕복하는 데만도 이틀이 걸리니, 저 둘은 그냥 죽게 내버려 두실 심산이로군요.”
“당신들 손에 죽게 하는 것보단 차라리 그게 나아요. 적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있으니까.”
셋 중 하나만 살아남는 병이라 했다. 절반도 안 되는 가능성이나, 채찍에 맞아 죽는 것보단 낫지 않겠는가.
“의사는 오지 않을 겁니다.”
“…….”
“늘 그랬지요. 역병에 도는 곳엔 언제나 죽어 가는 사람과 이미 죽은 사람뿐이었습니다. 사람을 살린다는 의사도 결국엔 제 목숨이 가장 중한 것 같더군요.”
사제가 어깨를 들썩이며 웃자, 어리둥절하게 상황을 지켜보던 수도사들도 하나둘씩 웃음을 보태기 시작했다.
페기는 구역질처럼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이기지 못하고 몸을 홱 돌렸다. 더 이상 이 미친 사람들과 한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누군가 살며시 치맛자락을 붙잡아 왔다.
페기는 고개를 숙였다. 온몸이 피투성이인 어린 소녀가 간신히 실눈을 뜨고 있었다.
“…있 …어요.”
“…….”
“의사… 선생님… 있어…요….”
페기는 황급히 무릎 꿇고 소녀를 일으켜 안았다. 곧 죽을 것처럼 숨만 색색대던 소녀가 간신히 입술을 달싹였다.
“의사… 저기에….”
“입 닥쳐!”
사제가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고성을 질렀다. 페기는 찬 눈으로 그를 쏘아보곤 고개를 돌렸다.
“저쪽을 뒤져 보세요.”
“의사 따윈 없어! 그건 의사가 아니라…!”
듣다 못한 페기가 사제에게로 채찍을 내던졌다. 채찍을 피하려다 그만 엉겁결에 뒤로 자빠진 사제가 끙끙거리며 허리를 붙잡았다. 수도사들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페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제와 수도사들을 가리켰다.
“그리고 저 미친놈들은 죄다 감옥에 가둬 버려요.”
호위 기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사제와 수도사들을 끌고 갔다. 안 가겠다며 죽어라 버티던 사제는 라만의 손날에 목덜미를 얻어맞고는 축 늘어졌다. 젊은 수도사들은 여전히 말간 낯으로 어리둥절한 표정만 지을 뿐 반항 없이 순순했다.
이제 공터에는 피투성이 몸을 말고 끙끙거리는 병자들만이 남았다. 채찍이 거침없이 할퀴고 간 자국이 크고 작은 등짝마다 적나라했다. 페기는 고통에 신음하는 병자들에게 섣불리 손도 못 대고 망설였다. 그러잖아도 홧홧한 열기 속에 갇혀선 참담함에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끼익, 하는 쇳소리가 들려왔다.
페기는 시름없이 고개를 돌렸다. 횃불이 눈부시게 밝히는 거리로 민가의 허름한 문들이 하나씩 열리고 있었다. 그러고는 한 걸음, 한 걸음 비척거리며 나오는 주민들의 여윈 얼굴.
페기는 멍하니 그들을 바라보았다.
때아닌 불빛에 멀리 달아난 밤하늘 위로 달이 맥없이 지고 있었다.
***
“이 아저씨가 진짜! 내가 이렇게 길가에서 물건 팔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어?!”
“아이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시장이 열린 성도의 시가지에서 작은 소동이 일어났다. 나무 몽둥이를 들고 험악한 표정을 한 이들은 일명 자경단 행세를 하는 청백회고, 그들의 발치에 엎드려 손이 발이 되게 비는 자는 노점 상인이다.
“사람 말이 말 같지가 않아? 귓구멍 막혔어?”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치울 테니….”
“어어, 손대지 마! 손대지 말라고! 야!”
길가에 늘어진 고깃덩이들을 황급히 치우려는 상인을 보며 눈을 부라리던 청백회가 결국에 몽둥이를 휘둘렀다. 손등을 얻어맞은 상인이 악 소리를 내며 쓰러지자, 청백회 단원들은 목을 좌우로 꺾으며 상인을 둥글게 에워싸기 시작했다.
“하여간에 좋게 말할 때 들을 것이지….”
청백회가 일시에 몽둥이를 치켜들었다.
곧 시가지는 피가 튀도록 얻어맞는 상인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시장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된 상인들도, 장을 보러 온 행인들도 눈을 질끈 감으며 부조리를 외면할 뿐이었다. 명색이 치안대라는 병사들조차 그늘에 늘어져 낄낄대기 바빴다.
그때, 번쩍번쩍한 마차 한 대가 시가지로 사납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행인들이 다급히 몸을 틀어 비켜서고, 한가롭게 육포나 뜯어 먹던 치안대 병사들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신나게 노점 상인을 쥐어패던 청백회는 난데없이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가 눈이 휘둥그레지고 말았다.
“어, 어어!”
청백회 단원들의 몸뚱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삽시간에 엄습한 말 두 마리가 근육 진 앞발을 가파르게 치켜들었다. 기겁할 듯 놀란 청백회 단원들이 새된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개중에는 뒷걸음질하다가 그만 자빠진 이들도 있었다.
능숙하게 고삐를 잡아챈 마부가 정성껏 말을 달래자, 흥분했던 말들은 금세 평온을 되찾았다. 넋이 나간 표정으로 거친 숨을 헐떡이던 청백회 단원들이 그제야 얼굴을 붉게 물들이며 비틀비틀 일어섰다.
“이놈들이 감히…!”
몽둥이를 쥐어 들고 기세등등 마차로 다가가던 청백회 단원들이 순간 멈칫했다. 화려하게 양각된 마차는 누가 보더라도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이대로 순순히 고개 숙이고 물러난다면 명색이 청백회로서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청백회 단원들끼리 치열하게 시선을 주고받는데, 갑자기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정체를 확인한 청백회의 얼굴이 바위처럼 굳었다.
“무기를 버리시오.”
말을 타고 다가온 호위 기사들이 그들의 목에 칼날을 겨누었다. 청백회 단원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몽둥이에서 손을 뗐다. 나무 몽둥이가 요란하게 돌바닥을 굴렀다.
장내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감돌았다.
상인들은 점포 안에서 고개를 길게 빼어 구경하고, 행인들은 공연히 주위를 오가며 기웃거렸다. 순식간에 놀림감으로 전락한 청백회 단원들은 수치심에 부글거릴 틈도 없이 주먹을 틀어쥐기 바빴다. 정수리 위에서 비스듬히 내리치는 시선이 못 견디게 따가웠다.
엘피도 공작.
아주 먼 곳에서 딱 한 번 스쳐본 얼굴이지만, 그 강력했던 인상을 잊을 수 있을 리가.
청백회 단원들은 신음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하여 이를 꽉 깨물었다. 머리 위에서 차갑게 타오르는 노여움이 그들의 사지를 얽어매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두툼한 주머니가 날아왔다. 몇 차례 땅을 굴러간 주머니는 얻어맞은 몸을 추스르던 노점 상인의 눈앞에서 멈추었다.
“전부 내가 사도록 하지.”
상인은 멍하니 눈을 끔벅였다. 말에서 내린 호위 기사들이 청백회의 발길질에 엉망진창으로 거리에 널려 있던 고깃덩이들을 주워 담기 시작하자, 사방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상인이 퍼뜩 주머니를 주워 들었다. 내용물을 확인한 상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예후르가 가늘게 웃었다.
“이 구역에서 노점을 여는 것은 불법이니 벌금은 꼭 내도록.”
“예? 예, 예! 물론입죠!”
노점 상인이 헤벌레하며 몇 번이고 땅바닥에 고개를 조아렸다. 청백회 단원들이 분노를 삼키며 살벌하게 그 모습을 쏘아보는데, 한층 서늘해진 예후르의 목소리가 불시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너희.”
청백회가 어깨를 움찔했다. 턱을 괴고 가만히 그들을 내려다보던 예후르가 고개를 들어 먼 곳에서 어물쩍대는 치안대 병사들을 확인했다.
“시가지를 관리하는 것은 치안대의 몫이다. 너희는 치안대인가?”
“…….”
청백회 단원들은 머뭇거리며 시선을 피했다. 예후르는 더 들을 말도 없다는 듯 손짓으로 치안대를 불렀다.
“끌고 가.”
행여 불똥이라도 튈까, 잔뜩 겁을 집어먹은 치안대가 황급히 청백회 단원들을 끌고 갔다.
예후르는 미련 없이 좌석 안쪽으로 들어와 앉았다. 막시모가 눈치껏 마차의 문을 닫았다.
“저 고기들은 용들한테나 먹여야겠습니다.”
지루하게 창밖을 내다보는 예후르는 고기야 어찌 처리하든 별반 관심이 없는 모습이었다. 막시모는 조금 이상한 기분이 들어 충동적으로 입을 놀렸다.
“왜 그러셨습니까?”
어차피 청백회의 손아귀에 들어간 지 오래인 치안대였다. 잡혀 들어가 봤자 반나절이면 풀려날 것이며, 서너 명 잡아넣는다고 나머지 청백회가 몸을 사릴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청백회가 난동을 부릴수록 그에게로 민심이 쏠릴 것이니, 구태여 민심을 얻기 위해 몸소 행차할 필요도 없었다.
막시모가 알던 그의 주인은 무서우리만치 냉정하게 선을 긋는 사람.
배곯아 죽어 가는 이에게도 학습된 연민만을 내비치던 이가 이제 와 얻어맞는 노점상을 불쌍하게 여겼을 리도 없다. 더구나 우군에게 특별히 이득이 될 만한 일도 아니다. 그가 알던 주인이라면 나서지 않았어야 맞았다.
대답 없는 예후르의 뒷모습을 응시하던 막시모는 곧 얌전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카타리나 공작이 죽은 뒤로 주인은 확실히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