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가 양피지 하나를 뽑아 내밀었다.
“올 초봄부터 역병으로 사망한 주민들의 명부입니다. 어젯밤에 한 명이 더 죽었으니 지금까지 총 쉰하나가 사망했겠군요.”
페기는 말없이 양피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모르는 쉰하나의 무게가 이 가벼운 양피지 한 장에 담겨 있었다.
“어떤 병인가요?”
“…증상을 여쭈시는 거라면 각양각색입니다. 어떤 사람은 온몸에 종기가 나고,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기침을 하다가 각혈까지 하지요. 그 모든 증상이 한꺼번에 나타나는 사람도 있고요.”
“…….”
“확실한 건 죽을 사람은 열흘 안에 죽는다는 겁니다.”
페기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사제의 눈빛이 어쩐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말 그대로입니다. 열흘을 버티지 못하면 죽는 거고, 열흘을 견디면 사는 거죠. 귀하께서 보고 계시는 저 역시 열흘 동안의 죽을 고비를 넘겨 이렇게 살아남은 겁니다.”
흰 수염이 성성한 입술을 비틀어 웃은 사제가 닳아 빠진 양초에 촛불을 붙였다.
“놀라셨습니까?”
“…….”
“생각해 보시면 달리 놀라운 일도 아닐 겁니다. 반년이나 병자들과 갇혀 지냈는데 전염되지 않은 것이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지금 이 마을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주민들 대부분이 저처럼 열흘을 버틴 경우입니다.”
사제의 말이 옳았다. 페기는 착잡한 심정으로 시선을 미끄러트렸다.
“주민들은 얼마나 남아 있나요?”
“사경을 헤매고 있는 병자가 일곱이고, 열흘을 버텨 살아남은 주민들은 총 스물둘입니다. 다행히 외부에서 꾸준히 물자를 반입해 주어서 배곯지 않고 살고는 있지요.”
사제는 여전히 바쁜 손길로 양피지 더미를 뒤적이고 있었다. 페기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병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양피지를 헤집던 사제의 손길이 우뚝 멈추었다. 슬그머니 쏘아보는 시선이 차갑다 못해 아렸다.
“…역병인 줄은 알고 말씀하시는 겝니까?”
“아니까 이곳까지 왔겠죠.”
어서 안내하라는 듯 페기가 방문을 눈짓했다. 지긋이 그녀를 응시하던 사제가 돋보기안경을 벗고 양손으로 눈두덩을 꾹 짓눌렀다.
“괜히 돌림병이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전달해 드렸으니 이만 성도로 돌아가시지요.”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겠습니다.”
“약도 없고 치료법도 없는 병입니다. 걸리면 세 명 중에 둘이 죽어 나가는데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페기는 사제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안 걸려요.”
순간 사제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기가 막힌 듯도 하고, 화가 몹시 치민 듯도 했다. 페기는 계속해 사제를 종용하듯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에 꼬리를 내린 것은 사제였다.
“…나중에 후회하지나 마십시오.”
사제는 노여움이 묻어나는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박차고 나갔다. 페기는 걱정스럽게 방을 기웃거리던 마샤를 데리고 사제를 따라갔다.
사제가 데려간 곳은 교회와 마주 보는 어느 민가였다. 나름대로 민가들 중에는 가장 크고 튼튼해 보이는 건물이었다.
사제는 문고리를 잡고 페기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지금이라도 생각을 달리하라는 눈빛이었으나, 페기는 수행 인원들을 돌아보며 태연하게 말할 뿐이었다.
“혼자 들어갈 테니 다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요.”
“예?”
경악하는 호위대를 남겨 두고 페기는 사제를 따라 민가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안을 돌아보던 페기가 멈칫했다.
길가와 마찬가지로 민가에도 횃불이 밝게 올라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더해 횃불까지 여럿이니, 실내는 환하다 못해 홧홧할 지경이었다.
“형제님. 어째서 온 마을에 불을 밝혀 두신 건가요?”
앞을 가로막는 두꺼운 천들을 들추어 내던 사제가 힐끗 그녀를 보았다.
“역병은 더러운 냄새를 통해 퍼집니다. 마땅히 불로 태워 없애야지요.”
페기는 어쩐지 찜찜한 기분이었지만 공연히 딴죽을 걸진 않았다. 불행히도 그녀는 의학에 문외한이었다.
두꺼운 천을 여럿 들추어 나가자, 곧 휑하니 뚫린 실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간소하게 만든 침대가 일렬로 늘어서 있었고, 일곱 명의 병자들이 하나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얀 천을 얼굴에 두르고 병자들을 돌보던 수도사가 사제를 보곤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사제는 그중 한 침대로 다가갔다.
페기는 그의 어깨 너머로 침상을 확인했다. 열 살이나 먹었을까 싶은 어린 소녀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색색 숨만 내쉬고 있었다.
“보여 드리게.”
사제의 말에 수도사가 바지런히 다가와 소녀의 팔을 걷어 보였다. 순간 페기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뼈만 남은 앙상한 팔 위로 불그스름한 종기가 징그럽게 올라 있었다.
“오늘로 이틀쨉니다.”
사제는 소녀의 팔을 받아 조심스레 이불 속으로 넣어 주었다.
“아비는 여름을 나지 못했고, 어미도 비슷한 시기에 죽었지요. 한 달 전에는 어린 동생마저 죽었는데, 죽은 동생이라도 꼭 한번 보고 싶었는지 태우기 직전의 시체 더미로 숨어들었다가 그만 이 꼴이 되어 버렸습니다.”
“…….”
“내가 그리도 위험하다 일렀건만….”
낮게 읊조리는 사제의 눈에 이슬이 살짝 맺혔다. 페기는 참담한 심정으로 입가를 감싸 쥐었다. 마을을 둘러싼 절망감이 전염되는 듯했다.
“…의사는 어디 있나요? 만나서 얘기를 나눠 보고 싶은데.”
일단은 역병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를 듣고 성도로 보고를 올려야 했다. 성도의 뛰어난 의사들이라면 치료법을 알지도 몰랐다.
그런데 대답 대신 빤한 시선이 느껴졌다. 페기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제와 수도사가 이상할 정도로 또렷하게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는 없습니다.”
“…네?”
“말씀하시는 의사란 것이 들에 난 풀로 죽을 쒀서 약이라 바치는 놈들이라면, 이미 여름이 지나기도 전에 다 죽었습니다.”
페기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다.
이게 무슨 소리지?
“형제님, 의사가 없다면 외부에 도움이라도 청하셨어야죠.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의사 없이 병자들을 돌보신다는 건지….”
“아무것도 몰라서 하실 수 있는 말씀이로군요. 역병이 돌아 봉쇄된 지역에 어떤 의사가 들어오려 하겠으며, 또한 의사 없이 병자를 돌보는 것이 무슨 문제라는 겁니까?”
사제가 태연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역병은 천사께서 내리신 시련입니다.”
“…….”
“마땅히 사제인 제가 병자들을 돌보아야지요.”
페기는 그저 멀거니 사제를 바라보았다. 순식간에 몰아닥친 현기증이 생각의 늪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여길 사용하시면 됩니다.”
수도사는 페기 일행에게 교회의 빈방을 안내하곤 종종거리며 사라졌다. 마샤가 부지런히 방을 살피는 동안, 페기는 어딘지 넋이 나간 것 같은 얼굴로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았다.
“의사가 치료할 수 있는 병이었다면 반년이나 지속되지도 않았습니다.”
역정이 담긴 늙은 사제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자꾸만 메아리쳤다.
“애당초 말이 의사지, 이런 산마을에서 의사라 떠벌리고 다니는 놈들은 대개가 약초꾼이나 머리가 반쯤 돌아 버린 연금술사들뿐입니다. 제 이름조차 적을 줄 모르는 까막눈이 알기는 무얼 안다고 역병을 치료하겠습니까? 제발 뜬구름 잡는 소리는 그만하십시오.”
충분히 밑바닥을 굴렀다고 생각했다.
창녀로 팔릴 뻔하고, 사선을 넘나드는 전장에서 수개월을 보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평생을 온실 속의 화초로 살아온 비올라를 보며 조금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고, 한편으로는 묘한 우월감을 느꼈다. 다르게 살아 본 만큼 눈이 트이고 견식이 넓어졌다고.
하지만 그 모든 것이 착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병자가 있는 곳에 의사가 있고, 모든 마을에 자격 있는 의사가 있으리라 여겼던 것이 어쩌면 지나친 자만이었는지도….
페기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장과 의사가 부재하는 마을을 홀로 짊어진 사제의 부담감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마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왔다. 자의로 들어올 의사가 없다면, 명령으로라도 오게 만들어야 했다.
“마샤. 깃펜을 주렴.”
페기는 양피지와 필기구를 받아 예후르에게 보낼 급보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예후르라면 그녀의 청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었다.
산마을에 밤은 금세 찾아왔다.
순식간에 사방이 어둡게 가라앉고, 멀리서 까마귀 우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페기는 지푸라기를 채워 넘은 침대에 누워 가만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창밖의 거리를 밝히는 불그스름한 빛이 창문을 타고 넘어와 천장까지 들이치고 있었다.
페기는 조심스레 침대 아래로 내려와 창가로 다가갔다. 한낮에도 빛을 발했던 거리의 횃불들은 땅거미가 지자 더욱 존재감을 내고 있었다.
살아남은 주민들은 지금도 집 안에 틀어박혀 오들오들 떨고 있을까.
페기는 미끄러지듯 창가 앞 의자에 앉아 유리창에 이마를 기대었다.
텅 비어 불빛만 휘황찬란한 거리의 광경이 쐐기처럼 그녀의 가슴에 박혀 왔다. 사랑하는 가족과 이웃들이 수없이 죽어 나가는 지옥에서 반년을 버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마음일까. 양친을 잃은 소녀가 죽은 동생의 얼굴을 보겠다고 시체 더미로 기어 들어가야 했을 때의 그 참담함은 대체….
저도 모르는 사이 스르르 잠들었던 페기는 불현듯이 깨어났다.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눈부신 불빛과 계속해 새어 드는 이상한 소리들. 수마에 잠긴 그녀의 감각을 무언가 자꾸만 자극하고 있었다. 페기는 온몸을 짓누르는 피로감을 헤치고 간신히 실눈을 떴다.
이상하리만치 시야가 밝았다.
페기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벌써 날이 밝았나 싶어 화들짝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는 새카만 밤하늘을 보고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달이 중천인 것을 보면 아직 야심한 시각이었다.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개를 터는데, 난데없이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아악!”
페기는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부지불식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확 깼다. 창밖의 어지러운 불빛이 시야를 가득 메우고, 거듭된 비명 소리가 귓전을 울려 왔다.
페기는 비틀거리며 유리창을 짚었다. 달달 떨리는 손끝 너머로 도저히 두고 볼 수 없는 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하!”
마샤가 방문을 벌컥 열고 뛰어 들어왔다.
“전하, 지금 밖에서…!”
페기는 더 듣지 않고 쌩하니 마샤를 스쳐 지나갔다. 간소하게 무장한 호위대가 굳은 얼굴로 그녀의 방 앞에 모여 있었다. 페기는 그들과 결연하게 눈을 맞추곤 앞장서서 계단을 내려갔다.
교회의 문을 열고 나오자, 훗훗한 공기가 피부로 와 닿았다.
타오르는 횃불이 한낮처럼 사방을 밝히고 있었다. 페기는 이글거리는 횃불의 열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어지러운 불빛 너머에서 끔찍한 마찰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짜악!
뱀처럼 유연한 채찍이 하늘로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