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9화 (229/328)

“그, 그것이 실은….”

행정관이 어깨를 파들거리며 간신히 말문을 열었다.

“주, 중앙에서 봉쇄 명령이 내려와서 마을을 전부 봉쇄했는데….”

역병이 도는 마을을 봉쇄하는 것은 당연한 조치였다.

“초기 봉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인근 마을들로 다 번져서….”

“뭐라고요?”

페기의 당혹스러운 반문에 행정관이 표 나게 어깨를 움찔했다.

“며, 명령은 똑바로 하달되었습니다. 한데 물물 교환을 한답시고 마을 사람들끼리 몰래 접선을 가져서 그만….”

“그래서 지금 역병이 어디까지 번졌는데요.”

호위대장이 눈치껏 지도를 펼쳤다. 행정관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치며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산등성이 너머를 뭉뚱그려 가리켰다. 눈대중으로만 보아도 예닐곱 마을은 넉넉히 포함되어 있었다.

“사망자 수는.”

“두어 달 전 헤렌잘 마을에서 죽은 사람들만 적어서 제출했습니다….”

“맙소사.”

페기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건 단순히 사도의 시험장으로 쓰일 만한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에 중앙으로 전령을 보내어 사안의 심각성을 알려야만 했다.

“도대체 왜 사실대로 장계를 올리지 않은 건가요?”

만약 초기 봉쇄에 실패했을 때 제대로 소식이 전해졌다면 사태가 이 정도로 악화되진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행정관의 어설픈 대처가 이 끔찍한 사달을 일으킨 셈이었다.

“저, 저는 두, 두려웠습니다. 초기 봉쇄에 실패했다는 걸 중앙에서 알게 되면 분명 책임을 피하지 못할 것인데….”

“그래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걸 보고만 있었다고요?!”

페기가 참다못해 노성을 질렀다. 뒤로 넘어갈 것처럼 놀란 행정관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며 그녀의 치맛자락을 붙들었다.

“저, 전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청백회가 이 일을 알게 되면 전 주,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제 소임을 다하지 못한 죄는 치를 터이니, 제발 청백회에게만은 절 넘기지 말아 주십시오.”

다급히 그녀의 발치에 엎드린 행정관이 목 놓아 애걸했다. 페기는 그 옹졸한 모습을 앞에 두고 차마 말을 잇지 못하였다.

청백회가 법의 사각지대를 파고들어 제멋대로 규탄하고 다니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사생아를 낳고도 떵떵거리며 잘 사는 주교들을 발가벗겨 광장에 매달아 두는 짓도 그런 일환이었다. 하지만 설마 그런 행동들이 지방 관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줄은….

페기는 싸하게 밀려오는 현기증을 이 악물고 참으며 호위대장을 불렀다.

“당장 호위대 중 한 명을 선발해 성도로 보내세요. 이곳 상황을 상세히 알리라 명하고.”

“알겠습니다.”

“행정관.”

둥글게 엎드린 행정관의 등이 움찔 떨렸다. 페기는 착잡한 심정으로 말을 이었다.

“그대는 거짓으로 장계를 작성하여 수많은 백성들을 위험에 빠트렸습니다. 후일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니 각오하도록 하세요.”

“…예? 그럼….”

최악의 상황을 상상하던 행정관이 퍼뜩 고개를 들어 올렸다. 법에 따라 처벌하겠다는 것은 곧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다는 뜻.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감격을 표하려던 그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를 내려다보는 고압적인 눈빛에 시퍼런 노여움이 서려 있었다.

페기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대의 허술한 대처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미안한 감정이 있다면, 지금 당장 날 헤렌잘 마을로 안내해요.”

***

헤렌잘 마을.

근방의 사투리로 헤렌잘레 마을이라 불리곤 하는 이 마을은 올 초봄 정체불명의 역병이 돌기 시작한 이후로 쭉 봉쇄되어 있었다. 본디 봉쇄선은 헤렌잘 마을에 국한되어 있었으나, 역병이 인근 마을들로 번지면서 현재는 산등성이를 따라 봉쇄선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물론 여건상 모든 봉쇄선을 병사들이 감시할 수는 없었다. 봉쇄가 결정된 마을에는 허술한 방책이 세워졌으며, 각 마을마다 열댓 명의 병사들이 배치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봉쇄 초기에는 무단이탈하려는 마을 주민들을 잡아내느라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반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봉쇄선은 점차 평화를 유지하게 되었다. 그동안 어떻게든 방책을 넘어 도망치려던 주민들은 역병에 걸려 죽거나, 껍데기만 남아 죽지 못해 살아가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마을의 출입을 막는 병사들은 자연히 할 일이 없어졌다. 마을로 들어오려는 사람이야 당연히 없었고, 이제는 마을을 나가려는 사람마저 드물어졌다. 아침저녁으로 전령을 보내 상황을 살피던 행정관도 이제는 연락이 뜸해지니, 병사들은 풀피리를 불거나 낮잠으로 시간을 때우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이 행정관이 나타났으니 참으로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해, 행정관님? 여기까진 어쩐 일이십니까?”

“일단 문부터 열어 보게.”

“예에?”

목책 문을 지키던 병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입을 꾹 다물고 서 있던 행정관이 잠시 마차에 다녀오더니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거기 자네, 마을로 들어가서 이장을 좀 불러오게나.”

“이장님은 넉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요?”

“뭐? 그럼 저 마을은 누가 이끌고 있나?”

“시몬 사제님이 이끌고 계십죠.”

“그럼 얼른 가서 사제님이라도 모셔 오게.”

행정관의 독촉에 한 병사가 황급히 마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나머지 병사들은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이는 행정관과 정체 모를 마차를 힐끔거렸다. 마차를 에워싼 기사 나리들께 다가가 넉살 좋게 상황을 여쭈려다가도, 뾰족한 바늘처럼 날 선 분위기에 좀처럼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오래지 않아 낡은 목책 문을 열고 늙은 사제가 걸어 나왔다. 행정관은 기다렸다는 듯 마차로 달려가 더없이 공손하게 문을 열어 주었다. 먼저 어린 하녀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리고, 아직 앳되어 보이는 여인이 하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땅으로 내려섰다.

사제와 병사들을 돌아보는 여인의 얼굴 위로 따사로운 가을볕이 쏟아져 내렸다.

옅은 색의 은발이 별처럼 반짝이고, 도화지처럼 새하얀 피부에선 윤이 났다. 특히나 보라색 눈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니, 난생처음 접하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에 병사들은 그저 넋 놓고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을 한 차례 돌아본 페기가 발걸음을 뗐다.

그녀는 자박자박 다가와 늙은 사제에게 홀을 내밀었다. 말없이 홀을 받아 든 사제가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몸체와 홀의 윗부분에 박힌 자수정 장식을 만지작거리더니, 흘끗 눈을 들어 올렸다.

“교황 성하의 손님께서 이런 궁벽진 곳까진 어인 일이십니까?”

교황이 언급되자 병사들 사이에선 난리가 났다. 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성하의 명을 받아 역병 사태를 확인하러 왔습니다.”

물끄러미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사제가 곧 고개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났다.

“깨끗한 천으로 코와 입을 가리고 들어오시지요.”

그러고 보니 사제와 병사들도 모두 천으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페기는 마샤에게 천을 받아 얼굴에 둘렀다. 마을로 함께 들어갈 호위대까지 천을 두르는 것을 꼼꼼히 확인하던 사제가 갑자기 인상을 무섭게 구겼다.

“저자는 이교도가 아닙니까?”

사제의 시선은 라만에게 꽂혀 있었다. 정작 라만 본인은 익숙한 상황인지 별다른 내색이 없었지만, 그를 노려보는 사제의 눈총이 대단했다.

“내 호위입니다.”

“어찌 더러운 이교도 따위를 내 교구로 들이란 말입니까!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 사제님, 이분은….”

“그만.”

페기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려는 행정관을 만류했다.

반년이나 봉쇄된 마을에서 지냈다면 그녀의 귀환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을 것이었다. 한눈에도 의심 많아 보이는 사제에게 제 정체를 설명하여 확신까지 주기엔 흘러가는 시간이 아까웠다.

“앞장서십시오, 형제님.”

페기는 태연하게 사제를 보았다. 흉흉하게 핏발 선 눈으로 라만을 쏘아보던 사제가 결국에 내키지 않는 걸음을 옮겼다. 페기는 호위대를 거느리고 사제를 따라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은 고요했다.

산바람을 피하기 위해 벽돌을 두껍게 쌓아 올린 건물이나, 허름하게 짚을 얹은 지붕은 다른 산마을과 크게 다른 점이 없었다. 다만 텅 빈 길가에는 주인 없이 떠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 보이지 않았으며, 낯선 이의 등장에도 나와 구경하는 이가 없었다.

페기는 써늘한 기운이 감도는 흙길을 걸으며, 쓰러져 가는 민가를 넌지시 훑어보았다. 인기척조차 들려오지 않는 정적. 어느 민가의 어둠 속에서 그녀를 훔쳐보던 초췌한 얼굴이 곧 남루한 커튼 뒤로 숨어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어디 있나요?”

“…다들 있어야 할 곳에 있지요.”

늙은 사제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죽은 자는 무덤 속에, 산 자는 병상에.”

으스스한 말에 마샤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페기는 입술을 다물고 길 양옆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횃불을 응시했다. 아직 해가 떨어지지 않은 오후건만, 횃불은 텅 빈 거리를 기이할 정도로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사제는 그들을 교회로 인도했다.

마을의 단 하나뿐인 교회는 지어진 지 오래된 것처럼 낡고 군데군데 무너져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잘 관리되고 있는지 바닥에는 먼지 한 톨 굴러다니지 않았으며, 천사들의 성상에서도 윤이 났다.

페기는 사제를 따라 교회의 중앙 통로를 가로지르며 벽에 걸린 성화들을 스쳐보았다. 색이 바래어 윤곽이 뚜렷하진 않았으나, 그림의 순서와 구도로 미루어 보건대 천 년 전 뱀을 무찔렀던 야누비타 1세의 전설을 형상화한 듯했다.

“이쪽으로 들어오시지요.”

사제가 곁문을 열며 말했다. 페기는 수행 인원들을 물리고 혼자서 문턱을 넘었다. 사제의 개인 집무실인지, 낡은 책걸상과 소파가 놓여 있었다.

사제는 물을 따라 탁상에 올려놓았다.

“찻잎이 모두 떨어져서 대접이 아쉽게 되었군요.”

“괘념치 마세요.”

페기가 우아하게 소파에 앉았다. 사제는 맞은편에 앉는 대신, 책상을 둘러 가 의자에 착석했다.

“일단 상황 보고부터 받으셔야겠군요.”

돋보기안경을 쓴 사제가 책상 가득 쌓인 양피지 더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페기는 물로 입술을 축이며 책장 한가득 꽂힌 경전들을 훑어보았다. 천계율, 로살레다서, 단텔로스 2세의 저서인 여덟의 대화…. 보수적인 학파가 선호하는 경전들이긴 하나, 달리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인근의 일곱 마을들까지 봉쇄선이 확대된 것은 들어 아시겠지요?”

“네. 다른 마을들과는 교류가 있나요?”

“동쪽으로 반나절가량 떨어진 베렌 마을과는 종종 병사들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곤 합니다. 다른 마을들은 상황이 어떤지 잘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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