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328)

그에 비올라의 안색이 핼쑥해졌다. 메아포소 지방은 근래 해충의 급습으로 수확을 앞둔 농작물이 큰 피해를 입은 곳이었다. 벌레라면 딱 질색인 비올라에게 그보다 더 끔찍한 지역은 없었다.

비올라가 비틀거리며 단상을 내려가자, 이번엔 단상의 우측을 지키던 근위대원이 깃발을 들어 올렸다.

페기는 침착하게 단상을 걸어 올랐다. 긴 여정을 대비해 활동성 있는 의복으로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곧장 제 옆얼굴로 꽂히는 레오폴트의 시선을 외면하며 상자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곱게 접힌 종이를 꺼내 고드릭에게 건넸다.

“헤렌잘 마을로 출발하십시오.”

헤렌잘.

페기는 익숙한 이름을 입 안에서 혀로만 굴려 보았다. 돌림병이 도는 지역이었다. 흘끗 시선을 내리자, 단상 아래서 웃고 있는 예후르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가 입 모양으로 말했다.

“기도할게.”

페기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단상에서 내려왔다. 죽음의 문턱에 이른 사람도 되살려 낸다는 그의 기도인데, 어찌 무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돌림병을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것인데….

원탁의 결정에 따라 그녀와 비올라는 지체 없이 성궁을 떠나야 했다. 수도사의 안내를 받아 성 나르세스 광장을 빠져나오던 페기는 불현듯이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차라?”

그녀를 안내하던 수도사가 힐끔거리며 뒤를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페기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차라!”

대성당이 자아내는 그늘 속에서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차라가 그제야 흠칫하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페기?”

“너 대체….”

페기는 아연한 표정으로 말을 잇지 못했다. 행적이 묘연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소식이 없더니만, 정작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페기는 자꾸만 눈총을 주는 수도사를 애써 무시하며 차라에게 거듭 말을 걸었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야?”

“그게….”

“이만 출발하셔야 합니다.”

수도사가 초조한 기색으로 재촉해 왔다. 페기는 입술을 꽉 깨물곤 차라에게 물었다.

“별일 아닌 거지?”

“으응, 그럼.”

차라가 조금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웃는 얼굴조차 어딘지 모르게 그늘이 진 듯하여 페기는 좀처럼 마음을 놓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지못해 발길을 옮기는 수밖에 없었다.

수도사는 마샤를 비롯한 수행 인원들이 준비된 곳까지 그녀를 안내했다.

“받으십시오.”

수도사가 보석이 박힌 화려한 홀을 내밀었다. 엉겁결에 홀을 건네받은 페기가 의아한 표정으로 수도사를 보았다.

“이게 무엇인가요?”

“성하께서 내리신 물건입니다. 아직 공식적으로 작위가 복권되지 않아 여정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니, 그때마다 이 홀을 보이면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홀을 쥔 손에 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페기는 감사하다는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키곤 간신히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수도사가 허리를 깊게 숙이며 물러나자, 기다렸다는 듯 마샤가 달려왔다.

“전하! 성궁 밖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어요!”

페기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으로 스무 일 가까이 그녀를 수행할 열 명의 인원을 훑어보았다. 마샤를 제하고도 제법 낯이 익은 자들이었다. 개중에는 몬틸로 백작의 면을 세워 주기 위해 특별히 수행 인원으로 넣어 둔 구릿빛 피부의 라만도 있었다.

변함없이 불손한 기색을 숨기지 않던 라만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말없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페기는 별다른 반응 없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열 명의 수행 인원들이 그녀를 뒤따라 성궁의 성문 쪽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성문을 앞두고 그녀의 발걸음이 불시에 멈추었다.

그림자처럼 페기를 따르던 마샤가 발꿈치를 들고 슬며시 그녀의 어깨 너머를 훔쳐보았다. 이제 보니 누군가와 맞닥트리고 있었다. 수염이 듬성듬성 난 얼굴에 어딘지 후줄근해 보이는 기사.

마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누구지?

“…마르코스 본시오.”

마샤가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발꿈치를 내렸다. 나지막하게 중얼거린 페기의 옆얼굴이 낯설도록 살벌했다.

그녀를 마주치고 잠시 허둥지둥하는 듯하던 기사 본시오는 제 이름이 불리기 무섭게 평온함을 되찾았다. 심지어는 느긋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먼저 가시라며 옆으로 비켜서기도 했다.

페기가 까득 이를 갈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마르코스 본시오.”

“이것 참, 난감하군요. 아직 복권되신 것은 아니니 전하라 부르면 아니 될 것인데….”

처진 눈꼬리가 주름이 잡히도록 접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할 말이 그것뿐인가요?”

코앞으로 다가온 페기가 눈을 시퍼렇게 빛내며 으르듯 물었다. 본시오는 실실 쪼개며 능구렁이처럼 대꾸했다.

“글쎄요….”

“…….”

“굳이 한마디 더 말씀드리자면 제가 바빠서 이만 가 봐야겠다는 것 정도?”

본시오는 앞을 가로막은 페기를 피해 태연하게 돌아 나가려 했다. 그러나 첫 발걸음을 떼기 무섭게, 기다란 홀이 벼락처럼 그의 발등뼈로 내리꽂혔다.

“윽!”

“어딜 가. 내 말이 아직 안 끝났는데.”

양손으로 홀을 움켜쥔 페기가 손등이 시허예지도록 그의 발등을 짓눌렀다.

“내가 물었잖아. 할 말은 그게 다냐고.”

“더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

“그래요?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똑똑히 새겨들어요.”

한 발짝 더 다가간 페기가 홀에 지그시 체중을 싣기 시작했다.

“듣자 하니 당신 별명이 도마뱀이라면서요. 위험에 빠지면 꼬리 자르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수족들은 다 죽음으로 내몰고 혼자만 살아남는다고.”

마르코스 본시오.

본디 30년 전 오스피나 참극을 일으킨 라발의 용병대 소속으로, 당시 교황이었던 제네로사 5세의 목을 베는 등 수많은 악행을 자행했던 용병대장의 수급을 베어 레오폴트에게 바친 인물이다.

비록 소속은 라발의 용병대였으나 개인적으로 저지른 범죄가 없고, 용병대장을 참살한 공을 인정받아 근위대로 편입되었다. 이후로는 출신으로 말미암아 쏟아지는 눈총을 경계한 것인지 겉도는 생활을 유지하였으나, 4년 전 카타리나 공작의 죽음을 계기로 단숨에 근위대 부단장까지 치고 올라왔다.

이제 그는 모두가 아는 퀴테리아의 수족.

우두머리로 따랐던 라발의 용병대장도, 4년 전 그녀의 죽음을 도모하면서 한배를 탔던 아나클레토도 죽은 마당에 그만은 이렇게나 뻔뻔하게 살아남았다. 페기는 오랜만에 머리 꼭대기까지 끓어오르는 노여움을 느꼈다. 분노가 하도 치미는 나머지 웃음이 다 터져 나올 지경이었다.

“난 한시도 그날을 잊은 적이 없어.”

온몸에 멍을 새길 것처럼 때려 붓던 빗줄기.

조각조각 쪼개지던 나의 음악, 나의 꿈.

“이 우습지도 않은 연극이 다 끝나면 당신부터 잡아 족칠 거야. 그때는 이 목부터 잘라 낼 테니까….”

“크윽!”

페기가 홀을 낚아채 들었다. 본시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주저앉자, 그대로 홀을 한 바퀴 돌려 그의 목을 겨누었다.

“잘 간수하고 있어.”

시퍼런 경고가 칼처럼 내리쳤다.

페기는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큼직한 보폭으로 멀어져 갔다. 수행 인원들이 다급히 그녀를 뒤따르는 가운데, 이 악물고 고통을 견뎌 내던 본시오가 잇새로 흐느끼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끅, 끄윽….

웃는 것 같기도, 우는 것 같기도 한 기이한 소리였다. 페기는 등 뒤에서 슬금슬금 뻗쳐 오는 소리에 진저리 치며 성문을 넘었다. 예나 지금이나 끔찍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다.

***

울긋불긋한 단풍이 길목으로 흐드러졌다.

페기는 마차의 창밖으로 손을 뻗어 떨어지는 단풍잎을 받아 냈다. 아기 손바닥처럼 자그마한 잎이 간지럽게 손바닥 안에서 노닐었다. 가만히 미소를 짓는데, 잘 가던 마차가 갑자기 덜컥 멈추어 섰다.

그 바람에 꾸벅거리며 졸던 마샤가 화들짝 깨어났다.

“다, 당근 파이!”

무슨 꿈을 그리도 대차게 꿨는지 마샤가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눈만 껌벅였다. 페기는 헝클어진 마샤의 머리를 귀 뒤로 넘겨 주곤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호위대장이 누군가와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경, 무슨 일인가요?”

“전하.”

황급히 달려온 호위대장이 고개를 숙이며 아뢰었다.

“행정관이 길을 잘못 들었답니다.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페기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또?

“이번이 몇 번째죠?”

“네 번째입니다.”

페기는 창문을 닫고 마차의 문을 벌컥 열었다.

“행정관을 데려와요.”

신이 난 호위대장이 머리가 반쯤 벗어진 땅딸보를 질질 끌고 왔다. 그는 이 근방을 통솔하는 행정관으로, 지금은 헤렌잘 마을까지 그녀를 안내하는 길잡이 역할을 맡고 있었다.

“행정관.”

“예, 예에….”

페기는 그에게 한마디 하려다가 멈추었다.

첫 번째 길을 잘못 들었을 때는 괜찮다며 넘겼고, 두 번째에도 웃으며 넘어가 주었다. 세 번째에는 조금 더 주의를 기울이라며 조곤조곤 타일렀으나, 반나절도 채 못 가서 또 길을 잘못 들었단다.

실수도 네 번이면 고의다.

페기는 이쯤에서 의심이 확신으로 진화하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확인이다.

“궁금한 것이 있는데.”

“예, 예! 무엇이든 여쭈십시오!”

“우리가 사흘 동안 이 산속의 길이란 길은 다 헤집고 다닌 것 같아요. 그렇지요?”

“아, 그, 그게….”

“그런데 왜 행인을 한 명도 보지 못했을까요?”

행정관이 땀을 뻘뻘 흘리며 입을 우물거렸다. 페기는 턱을 괸 채로 행정관의 반질반질한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다음 질문.”

“…….”

“여기로 내려오기 전에 그대가 제출한 장계를 읽었어요. 초봄부터 지난달까지 약 반년 동안 사망자가 총 마흔일곱 명이던데 확실한가요?”

“화, 확실합니다!”

“고작 마흔일곱이 죽은 일로 치명적인 돌림병이라며 장계를 올렸다고요?”

“예…?”

행정관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페기는 무심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렇지 않나요? 돌림병으로 고작 마흔일곱이 죽은 것이라면 그다지 치명적이지 않은 병일 테고, 정말 치명적인 병으로 마흔일곱이 죽었다면 그건 돌림병이 아니겠죠. 게다가 나는 근래에 역병이 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없어요.”

반년이나 가라앉지 않은 돌림병의 사망자라기엔 수가 너무 적고, 장계에 쓰인 내용대로 치명적인 역병이 번진 것이라기엔 이상할 정도로 소문이 돌지 않았다.

행정관의 태도는 그러잖아도 의심스러운 상황에 불을 붙였다. 그는 누가 봐도 의도적으로 헤렌잘 마을을 기피하고 있었다. 단순히 돌림병 도는 지역으로 들어가기 무서운 것이었다면 다른 길잡이를 붙여 주었으면 그만인데, 구태여 길잡이를 자처하고 나섰다.

결론은 간단하다.

행정관은 숨기고 있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비밀을 들키고 싶지 않아 자꾸만 그녀의 행로를 방해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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