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5화 (225/328)

소문이 퍼지지 않은 것인가, 퍼지지 못한 것인가.

고심하던 찰나에 손끝으로 화끈한 감각이 올라왔다.

페기는 퍼뜩 고개를 숙였다. 거칠게 잘린 양피지 단면에 긁혔는지, 검지 끝에 얇은 실처럼 핏자국이 배어나고 있었다.

멍하니 상처를 응시하던 페기가 느릿하게 좌우를 둘러보았다.

어느새 고요해진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마샤가 조용히 방을 빠져나간 모양이었다. 페기는 탁상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찻잔을 무심코 집어 들었다. 반쯤 식은 찻물이 부드럽게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히이잉!

먼 곳에서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가 닥쳐온다 싶더니, 밖이 소란스러워졌다. 적막하던 한낮의 저택이 단잠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페기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저 아래로 막 귀환하는 행렬이 보였다.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언덕을 올라온 예후르가 근사하게 말에서 내리고 있었다.

페기는 말고삐를 하인에게 넘기고 저택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꽃병에 꽂힌 수선화를 가만히 매만졌다. 먼 곳에서부터 석조 바닥을 내리밟는 단단한 군홧발 소리가 울려 왔다. 하얀 수선화 꽃잎 위로 불그스름한 핏물이 번지기 시작한다.

방문이 덜컥 열렸다.

싸한 가을바람이 확 풍겨 왔다. 페기는 입술을 작게 달싹였다.

“전령이 다녀갔어.”

잠시 고요하던 등 뒤에서 다시금 저벅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느긋하게 방을 가로질러 소파에 걸터앉은 예후르가 볕이 들이치는 창가에 오도카니 서 있는 페기의 뒷등을 바라보았다.

“부담 갖지 마. 어차피 이번 시험에서도 탈락하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페기는 창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수선화 꽃잎을 매만지던 손길이 느릿하게 떨어져 나왔다.

“그때.”

“…….”

“네가 날 활로 쏘았을 때.”

페기는 상처 입은 검지 끝을 엄지로 가만히 문질렀다.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창문 틈으로 바람 한 줄기가 새어 들었다.

페기는 갈라진 검지의 상처를 끈질기게 파고들었다. 문지르고 또 문지른다.

“무슨 짓을 했냐니?”

“날 어떻게 살려 낸 거냐고.”

사위는 고요했다.

“…기도했어.”

지문이 닳아 없어질 것처럼 집착적으로 문대던 검지와 엄지가 멈추었다.

페기는 흘끗 시선을 내리깔았다. 핏물이 붉게 밴 수선화 꽃잎을 스쳐 지나간 눈길이 그저 하얗기만 한 엄지에 가 닿는다.

그녀는 움츠러들어 있던 손가락을 천천히 폈다.

어느새 검지는 상처 없이 매끈했다.

“…기도.”

“그래, 기도.”

그의 목소리에서 상냥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널 살려 달라고 천사님께 기도했어.”

페기는 손을 가만히 말아 쥐었다. 온기 없이 서늘하던 얼굴에 설핏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는 순식간에 만개하는 표정으로 빙그르르 뒤를 돌아보았다.

“나흘 뒤에 위험한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몰라.”

“…….”

“이번에도 날 위해 기도해 줘.”

속내를 가늠하듯 물끄러미 그녀를 들여다보던 예후르가 이내 활짝 웃으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페기는 단걸음에 그의 품으로 안겨 들었다.

이제 진실 같은 건 어찌 되든 상관없다.

상처는 모두 나았고, 그녀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

나흘간의 준비는 철저하게 이루어졌다.

“전하의 시중을 들 하녀로는 저와 애나가 가기로 했어요. 나머지 여덟 명은 막시모 씨가 연륜 깊은 기사들로 호위대를 꾸려 주신다고 했는데….”

마샤가 흘끗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사막인은 어찌하실 건가요?”

무료한 표정으로 턱을 괸 페기가 동상처럼 후원의 출입구를 지키고 있는 라만의 뒷등을 바라보았다.

“이름을 불러야지, 마샤.”

“어차피 여기에 사막인은 저 사람 하나밖에 없는 걸요.”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셋이 될지 누가 아니?”

“네에? 설마 이민족을 더 들이시려고요?”

페기는 주제넘은 질문을 묵살하려는 것처럼 찻잔을 소리 내어 내려놓았다.

“막시모에게 일러 라만을 호위대에 넣도록 하렴.”

“예….”

마샤가 기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클레멘스와 이시도르, 글리체리아까지 저택으로 찾아왔다. 페기가 두 번째 시험을 치르느라 자리를 비울 약 스무 일 동안, 성도에 남은 이들은 갈수록 거세어지는 청백회의 공세를 막아 내야 했기 때문이다.

“순례자들이 다시 기승입니다. 성지를 순례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마차만 보이면 달려들어 돈을 구걸하니, 나 원 참. 이젠 순례자가 아니라 부랑자라고 불러야 할 지경입니다.”

대로에서 순례자 무리에 붙들려 반강제로 돈을 내어 준 이시도르가 한껏 툴툴거렸다.

“한동안 청백회가 좀 관리하나 싶더니만… 치안대는 도대체 무얼 하는 거랍니까? 이런 문제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고.”

“성도의 치안대야 좀도둑 몇 마리 잡는 수준이니까요. 떼로 몰려다니는 순례자들을 제어하기엔 여러모로 역부족이지요. 이럴 때야 말로 근위대가 힘을 보태 주어야 하는데….”

클레멘스가 말끝을 흐렸다. 성궁의 근위대인 장미 기사단이 퀴테리아의 수족으로 자리매김한 부단장 본시오의 손아귀에 들어 있다는 건 모두가 잘 아는 사실이었다.

페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근위대 단장인 왈테르 경은 도대체 무얼 하는 건가요?”

“그 사람은 기대도 하지 마십시오, 전하. 언젠가부터 만사 본시오에게 맡겨 두고 방에만 콕 박혀 있더니, 몇 달 전부턴 청백회를 기웃거린다고 합니다.”

이시도르가 질린 기색으로 대꾸하자, 페기는 고개를 연신 갸웃거렸다.

“왈테르 경이요…? 그럴 사람이 아닌데….”

그녀의 기억 속 우락부락한 인상의 노기사는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 않는 인사였다. 그를 보지 못한 4년의 공백이 있다곤 하나, 오스피나 참극을 겪고도 꺾이지 않았던 사람이 고작 청백회의 횡포에 무릎 꿇었을까.

짤막했던 고민은 예후르가 접견실로 들어오면서 끊겼다.

그는 사람들의 인사를 받으며 상석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 마찬가지로 그곳에 앉으려 했던 페기가 눈을 깜박이며 예후르를 보았다.

예후르가 다정하게 웃으며 상석을 눈짓했다.

페기는 얼떨결에 상석을 차지하고 앉았다. 늘 예후르의 자리였던 곳이나, 지금의 배치를 어색하게 느끼는 건 그녀밖에 없는 것 같았다.

클레멘스가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두 번째 시험이 시작되면 청백회의 공세는 더욱 심해질 겁니다. 알비야 공작은 불을 피울 수 없으니, 마지막 시험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청백회의 입장으로선 어떻게 해서든 마지막 시험을 치르기 전에 이 모든 소동을 끝마쳐야 하니까요.”

“혹시 모르니 내일 성도를 떠나시는 카타리나 공작 전하의 뒤로 비밀스럽게 호위를 더 붙이는 편이 좋겠습니다.”

이시도르의 제안에 예후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페기의 안전에 대해서는 이미 조치해 둔 바가 있습니다.”

“그럼 앞으로 청백회를 어떻게 잡아 눌러야 할지, 그 방법이 문제인데….”

이시도르가 골치 아프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교황 레오폴트는 협력은커녕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인 수준이며, 적어도 성도 내에선 근위대와 치안대, 중앙 부처들을 가릴 것 없이 청백회의 세력이 곳곳으로 뻗어 있었다.

더욱 성가신 것은 양측의 대외적인 인상의 차이였다.

처음부터 급진적인 개혁을 기치로 내건 청백회는 아무리 과격한 짓을 저질러도 비교적 여론의 질타가 덜했다. 망나니가 망나니짓을 한 번 더 한다고 하여 새로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청백회의 대척점에 선 그들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애당초 그들의 지지 세력은 반(反)청백회. 이를테면 오래전부터 교회에 뿌리내렸던 보수적인 신학회와 이윤 추구를 최고의 미덕으로 아는 상인들, 혹은 청백회의 지나치게 높은 윤리적 이상에 학을 떼는 성도의 시민들이었다.

하여 그들의 지지 세력은 청백회보단 광범위하지만 역으로 충성도는 떨어졌다. 퀴테리아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광적으로 충성하는 청백회와 달리, 본인의 기준에 어긋난다 싶으면 바로 돌아설 이들이었다. 워낙에 광범위한 지지 세력들의 요구를 모두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역린만은 건드리면 안 되었다.

그렇다면 반청백회 세력의 역린이 과연 무엇일까.

바로 청백회다.

청백회가 앞뒤 가리지 않고 나온다 하여 그들까지 망나니처럼 대처한다면, 광범위하던 지지 세력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이었다. 수면 아래에선 똑같이 더러운 술수를 부린다 하여도, 수면 위에선 지금껏 그러했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해야 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적이라 하여 무작정 탄핵안을 남발하고 보는 청백회처럼 나가는 것은 애당초 그들에겐 불가능한 일이었다.

“차라리 우리도 청백회의 악행을 정식으로 고발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천계율을 어겼다며 상인들을 때려잡았던 청백회가 어디 한둘입니까? 우리가 나서 준다면 분명 상인들도 기꺼이 협조할 겁니다.”

“하지만 백작, 고작 그런 것으로 어디 퀴테리아 추기경에게 흠집이나 나겠습니까? 그보단 역시 위스누아 쪽을 공략하는 것이….”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으면 됩니다.”

불시에 들려온 예후르의 목소리에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예후르는 느긋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이시도르가 멍하니 되물었다.

“…전하?”

“앞으로 청백회의 공세는 더욱 심해지겠지요. 그것을 견디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저들이 얼마나 발악을 하든 결국에 마지막 시험은 치르게 되어 있어요.”

“하지만… 벌써 도미시오 추기경과 글리체리아 추기경의 탄핵안이 법적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 게다가 들려오는 말로는 청백회가 전하의 뒤를 파고 있다고….”

“듣던 중에 반가운 소리군요.”

“예?”

모두가 경악했다. 클레멘스가 겨우 정신을 다잡고 말했다.

“전하, 물론 카타리나 공작 전하께서 불을 피우시거든, 청백회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개혁이니 쇄신이니 하는 명분들은 일시에 사라지고 말 겁니다. 명분으로 세워진 청백회의 세력은 금세 사그라들겠지요. 하지만 그 이후도 생각하셔야 합니다. 교황이 되실 분께서 어찌 본인을 돌보지 않으려 하십니까?”

비올라가 사라지면 가장 유력한 차기 교황 후보는 단연 예후르다. 하지만 명목상으로 세 명의 사도들이 더 남아 있었다. 만일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예후르의 흠결이 들추어진다면, 다른 사도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후계를 둘러싼 정치 싸움이 또 한 번 벌어질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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