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4화 (224/328)

폭포처럼 쏟아지는 적발을 쓸어 넘긴 안드레아가 갑갑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분풀이 삼아 의자를 세게 걷어차곤 씩씩거리며 회의장을 나가 버렸다.

예후르는 싸늘한 공기만이 감도는 회의장을 넌지시 돌아보았다.

“콘체사 추기경과는 계속 접촉하고 있습니까?”

“간간이 연락이 닿고는 있습니다. 갈수록 청백회의 감시가 심해지는 바람에 콘체사 추기경도 꽤나 겁을 집어먹은 모양이더군요.”

“그러잖아도 비리가 많아 청백회가 늘 예의 주시하는 인물일 겁니다. 본인도 그것을 잘 아니 앞으로도 당분간은 퀴테리아의 거수기 노릇에 충실하겠지요.”

“그럼 콘체사 추기경은 이만 포기할까요?”

클레멘스의 물음에 예후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나클레토의 심복으로 원탁에 들어 솔란지아의 품으로 들어간 콘체사는 사실상 청백회의 그물에 걸린 물고기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그가 확보한 콘체사의 비리 증거만도 여럿이니, 청백회도 필시 수중에 비리 증거를 쥐고 콘체사를 협박하고 있을 터.

“…원탁 추기경이 아니었다면 콘체사는 일찌감치 비리가 발각되어 종교 재판에 섰겠지요.”

천계율에 따라 평생토록 청빈과 순결을 지키는 것을 성직자 제일의 가치로 삼는 청백회였다. 감히 서원을 바친 몸으로 재물을 긁어모은 콘체사를 용납할 리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체사가 지금껏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은 온전히 원탁 추기경이란 직위 덕분이다. 간신히 5대 5로 균형을 맞춘 작금의 원탁에서 콘체사 한 명의 이탈은 치명적이었다. 청백회는 콘체사가 기특해서 봐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비리를 눈감아 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 저희가 먼저 터트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쪽에서 선수를 쳐서 콘체사를 이탈시킨다.

예후르는 손가락으로 빈 잔을 굴렸다. 나쁘지는 않지만….

“원탁에 빈자리가 난다면 퀴테리아는 이번만은 기필코 청백회의 야손을 그 자리에 앉히려 들 겁니다.”

“야손은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라 성도 내 인심이 좋지 않습니다. 원탁 안팎에서 반대가 심할 텐데요.”

“보나벤투라야 퀴테리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솔란지아는 빌헬미나 3세의 꼭두각시나 마찬가집니다. 솔란지아가 찬성하면 람베르토 추기경도 찬성에 표를 던지겠지요.”

“그럼 성하의 표가 당락을 결정하겠군요.”

클레멘스가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원탁의 균형을 맞춘답시고 레오폴트가 퀴테리아의 손을 들어 줄 것이 빤했기 때문이다.

예후르가 양손으로 원탁을 짚으며 일어섰다.

“머릿속에 퀴테리아의 명령밖에 없는 야손보단 욕심 많은 콘체사 추기경이 다루기 한결 편할 겁니다. 일단은 연락의 끈을 놓지 마십시오.”

“알겠습니다.”

클레멘스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예후르는 텅 빈 회의장을 천천히 가로질렀다. 썰물처럼 인파가 빠져나간 회의장 근방은 아득하도록 적요했다. 예후르를 기다리던 몇몇의 호위 기사들만이 그림자처럼 그를 뒤따랐다.

인적 드문 길목으로 접어들던 그는 곧 청백회 단원들에게 둘러싸인 퀴테리아를 발견했다.

그들은 하나같이 심각한 얼굴로 열띤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려니, 빤한 시선을 눈치챈 청백회 단원들이 하나둘 입을 다물었다. 야손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던 퀴테리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복도에는 고요한 적막만이 감돌았다.

오가는 시선 속에 형체 없는 비수가 날아 다녔다.

문득, 예후르가 발걸음을 뗐다.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그를 향해 꽂히는 눈총이 더욱 살벌해졌다. 예후르의 등 뒤에서도 막시모를 비롯한 호위 기사들이 긴장감을 삼키며 슬그머니 무기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예후르는 평온하게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숨죽이고 그의 동태를 주시하던 청백회 단원들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자리를 옮기려는데.

“잎이 작았던가요?”

부산스럽던 청백회의 움직임이 멎었다.

예후르의 목소리가 다시금 감미롭게 울려 왔다.

“내 기억으론 잎사귀 끄트머리가 톱날처럼 날카로웠던 것 같은데….”

퀴테리아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눈을 가늘게 휘어 접은 예후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나는 그것을 악의 씨앗이라 불렀는데 바스토뉴의 산사람들은 그것을 어찌 부르는지 모르겠군요.”

“제게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퀴테리아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여 보였다. 반듯하게 내려가는 등을 물끄러미 응시하던 예후르가 어느새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물었다.

“기록을 확인해 보니 12년 전 그대의 행적이 모호하더군요.”

“…….”

“바스토뉴에는 그때 다녀온 겁니까?”

등을 굽힌 채로 미동 없던 퀴테리아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12년 전이라면 위스누아의 수도원에서 묵언 수행을 하던 때입니다. 전하께서 잘못 전해 들으신 것이겠지요.”

“아무리 묵언 수행 중이라 해도 장장 1년이나 기록에서 배제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유실된 것이겠지요. 전하께선 잘 모르시겠지만, 지방의 외진 수도원에선 그런 일이 왕왕 발생하곤 합니다.”

달걀처럼 미끄러운 퀴테리아의 민낯에 반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예후르는 조금 따분하다는 얼굴을 했다.

“악의 씨앗은 그때 바스토뉴에서 발견했을 거고… 어쩌면 바스토뉴의 족장과 긴밀한 동맹을 맺기 시작한 것도 그 시절이었겠군요. 지난 수백 년 동안 한결같이 외부 세력을 경계해 왔던 바스토뉴가 돌연 품을 열어 성심껏 교회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도 그쯤이니까요.”

“전하.”

“사시사철 굶주려 있던 바스토뉴에겐 나쁜 선택이 아니었을 겁니다. 당시의 그대는 새파란 수도사에 불과했으나 엄연히 위스누아를 다스리는 만포르차 가문의 장녀였으니까요. 언젠가 중앙 교회로 진입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니, 훗날에 권력을 거머쥔 그대가 약속을 지켜 바스토뉴의 용병대를 교국의 경비대로 삼는다면 바스토뉴는 만성적인 굶주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테죠.”

“더는 듣고 있기가 힘들군요.”

퀴테리아가 불쾌감을 표했으나, 예후르는 개의치 않았다.

“바스토뉴에게 대가로 받은 것이 그 씨앗입니까?”

“…….”

“그것이 바스토뉴에 있다는 건 어찌 알았습니까?”

퀴테리아의 얼굴이 싸하게 가라앉았다. 인사도 없이 칼처럼 돌아서는 그녀의 등을 향해 예후르가 또다시 물음을 던졌다.

“왜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자매였는지 생각해 본 적 없습니까?”

퀴테리아의 걸음이 멈추었다.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궁금하더군요. 왜 그대가 아니라 그대의 자매였는지.”

“…천사 예리엘의 선택이십니다. 한낱 인간인 제가 품는다면 지나치게 불경한 생각이겠지요.”

“악의 씨앗을 퍼트리는 사람이 감히 불경을 논하는군요.”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못내 유쾌한 웃음기가 묻어났다. 퀴테리아는 넌지시 그를 돌아보았다. 그늘진 눈가에서 음산한 빛이 감돌았다.

“하고 싶으신 말씀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그대도 흰 비둘기를 보았을 겁니다.”

“…….”

“올라탈 자신이 없다면 이만 포기하십시오. 그대가 감당할 수 있는 판이 아닙니다.”

예후르가 단조롭게 대꾸했다.

물끄러미 그를 응시하던 퀴테리아는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재촉했다. 청백회 단원들이 철통같이 그녀를 에워싸니, 퀴테리아의 호리호리한 뒷모습은 곧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예후르는 곧 등을 돌렸다.

***

페기는 전령으로부터 원탁회의의 결과를 전해 들었다.

“하녀들과 호위 기사들을 비롯한 수행 인원은 열 명 안으로 제한될 것이며, 추기경 예하를 비롯한 고위 성직자들은 수행 인원에 포함하실 수 없습니다.”

“어떤 민생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건가?”

“나흘 뒤 성 나르세스 광장에서 직접 뽑으시게 될 겁니다. 선정 직후 문제 해결을 위해 성도를 떠나셔야 하니, 그때까지 여정의 준비를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페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령이 나가자, 마샤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전하. 저는 꼭 데려가 주셔야 해요?”

“내가 널 안 데려가면 누굴 데려가겠니.”

마샤의 얼굴에 금세 배시시 웃음기가 올라왔다. 그런 마샤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던 페기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하녀에게서 두툼한 양피지 더미를 전해 받았다.

“중앙 행정 부처의 모드벤나 수도사께서 보내셨습니다.”

페기는 슬쩍 양피지 더미를 헤쳐 내용을 확인했다.

“모드벤나 수도사는 어떻게 지내고 계시니?”

“요새 계속 과로 중이십니다만, 건강에는 큰 이상이 없으십니다.”

“다행이구나. 이번 일만 잘 끝나면 더 높은 곳에서 귀히 쓰일 분이니, 네가 옆에서 잘 보필하려무나.”

하녀는 공손히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마샤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하녀의 뒷모습을 기웃거리자, 페기는 양피지를 한 장 넘기며 넌지시 말을 흘렸다.

“모드벤나 수도사는 오랫동안 예후르를 보필했던 보좌관이란다. 훗날에 너도 뵐 기회가 있을 테니 이참에 이름을 외워 두도록 하렴.”

“네, 전하.”

마샤가 씩씩하게 대답했다. 페기는 입가에 슬며시 미소를 띠곤 양피지에 빼곡하게 적힌 필기체를 정독했다.

모드벤나가 보낸 것은 요사이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소문이었다.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기근, 해충의 피해가 막심한 어느 마을, 산속에서 암약하는 도적단과 관리들의 부정부패….

필시 원탁회의의 결과를 듣자마자 도움이 될 자료를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페기는 성도로 귀환하고도 모드벤나를 다시 보좌관으로 불러들이지 않은 예후르의 결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여유롭게 양피지를 넘기던 그녀의 손끝이 불현듯 멈칫했다.

“…마샤. 혹시 요사이 돌림병에 대해 들은 바가 없니?”

“돌림병이요?”

작게 콧노래를 부르며 따뜻한 차를 따라 내던 마샤가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흔들었다. 잠자코 아랫입술을 매만지던 페기가 양피지를 탁상에 내려놓았다.

마가 지방 동북부 헤렌잘 마을에서 장계를 올립니다. 지난 초봄에 발생한 돌림병으로 인해 지금까지 마흔일곱 명이 사망했으며, 스물아홉 명이 또한 중태입니다. 중앙 교회의 조속한 해결을 바라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