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328)

차라의 곁에서 그림을 끼적이고 농땡이만 피우던 요슈아가 그를 도와 책장을 뒤지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며칠 저러다 말겠지 싶었던 차라가 원하는 걸 찾을 때까진 성궁으로 돌아가지 않겠노라 선언했기 때문이다.

요슈아는 정말이지 미칠 지경이었다. 잘되어 가던 하녀 아가씨의 얼굴을 본 지도 2주가 넘어가고 있었다. 분명 그가 바람맞혔다고 생각할 하녀 아가씨는 지금쯤 다른 기사와 시시덕거리고 있을 게 빤했다. 이게 전부 다 쓸데없는 데 집착하는 차라 때문이다.

“이렇게 찾아봤는데도 없잖아! 그냥 돌아가자, 응?”

“돌아가고 싶으면 너나 돌아가.”

“너 혼자 두고 내가 어떻게 돌아가냐?”

한숨처럼 푸념한 요슈아가 다시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방금 전 걷어찼던 책을 펼쳤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본들, 의욕 없는 눈에 무언가 들어올 리가 없었다.

“…뭘 찾아야 하는지도 정확히 모르잖아.”

돕겠다는 말에 차라는 이렇게 말했다.

“단서가 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찾아 줘.”

그놈의 단서, 단서.

요슈아는 차라리 이 낡고 더러운 기록원을 건물째로 불태우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만큼 찾았는데도 단서가 나오지 않는다면 그냥 없는 거였다. 차라만이 그 자명한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친구의 답답한 심정을 알 길 없는 차라는 촛불 하나에 의지한 채 벌써 몇 시간째 먼지 쌓인 책만 탐독하고 있었다. 책장이 팔랑팔랑 넘어갈 때마다 차라의 녹안도 이리저리 바쁘게 오갔다.

힘없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요슈아가 또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뱃가죽이 등에 들러붙게 생겼다. 저 미련한 사도님은 식사 챙길 줄도 몰랐다.

“…어?”

그때, 등 뒤에서 차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슈아는 돌아보지도 않고 시큰둥하게 외투를 챙겨 입었다. 무엇을 먹을까. 삶은 감자? 아니면 고기를 잔뜩 넣은 스튜? 지금도 식당이 열려 있으려나? 술집으로 가야 하나?

상상만으로도 입 안에 침이 고이던 중에 갑자기 뒤로 돌려세워졌다. 요슈아는 눈을 껌벅이며 코앞으로 들이밀어진 책을 응시했다.

“…뭐야?”

“이거.”

차라가 책장 귀퉁이에 적혀 있는 낙서를 가리켰다. 미간을 찌푸린 요슈아가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책을 들고 촛대가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촛불에 비추어 보니 괴발개발로 갈긴 악필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프리올가? 프라볼드?”

“프리울리. 샤를로망 프리울리.”

글씨 좀 제대로 쓰지. 종알거린 요슈아가 다시금 집중하여 낙서를 들여다보았다.

“프리울리는… 이단? 이거, 이거 이단이라고 쓴 거 맞아?”

요슈아가 황당하게 되물었다.

샤를로망 프리울리는 천 년 전 심연의 천사 이슬라의 현신으로, 야누비타 1세와 함께 뱀의 무리를 처단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사도였다. 이단이란 단어와 함께 놓기엔 지나치게 높고 고결한 이름이다.

“이게 단서야.”

“말도 안 돼!”

“다 아는 소리를 지껄이는 책은 필요 없어. 난 감추어진 진실을 파헤쳐야 한단 말이야.”

“하지만 샤를로망 프리울리가 이단이라는 게 감추어진 진실이라니, 영….”

신앙심 옅은 요슈아조차 목을 긁으며 난색을 표했다. 그런데 찝찝한 기분으로 낙서를 힐끗거리던 요슈아가 갑자기 눈을 둥그렇게 떴다.

“나 이 필체 본 적 있어.”

“뭐?!”

“이런 악필은 까먹기가 힘들지. 야, 솔직히 내가 발로 써도 이것보단 나을 것 같지 않냐?”

요슈아가 낄낄거리며 차라의 어깨를 툭툭 쳤다.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차라가 다급히 그의 멱살을 붙들었다.

“어디서 봤어!”

“어, 어?”

“어디서 봤냐고!”

차라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도 모르게 기가 죽은 요슈아가 공손하게 구석을 가리켰다.

“아마도 저기….”

차라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참담하게도 그곳에는 수십 권의 책이 동산처럼 쌓여 있었다.

***

두 번째 시험 종목을 정하기 위한 원탁회의가 열렸다.

양측 모두 각자에게 유리한 종목을 정해 두고 왔으나, 누구도 예상치 못한 기습이 들어왔다.

“사도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성품이오.”

원탁회의가 시작되기 무섭게 입을 연 사람은 다름 아닌 레오폴트였다.

“교회 역사상 수많은 사도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무력으로 칭송받는 분은 오로지 마귀를 처단하고 뱀을 봉인하셨던 야누비타 1세와 그분을 비롯한 천 년 전의 사도들뿐이오. 그 이후로는 배곯는 빈자들을 손수 어루만지셨던 멜비네타 2세처럼 만민을 굽어살피시던 사도들께서 성인으로 추앙받으셨지.”

클레멘스는 슬그머니 눈알을 굴려 좌중을 살폈다. 도대체 어떤 대단한 말씀을 하시려고 사설이 저리도 길까.

“짐승과 소통하고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것. 마땅히 사도라면 지녀야 할 능력이오. 그러나 이 자리에서 묻건대, 만민을 굽어살피는 마음이 어찌 짐승과 소통하는 능력보다 못할 수 있단 말인가?”

“…….”

“하여 제안하겠으니, 두 번째 시험은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보는 것이 어떠하겠소?”

레오폴트가 단호한 목소리로 좌중의 의견을 물었다.

원탁에는 얼마간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각자 아군의 손익을 계산하기 바쁜 와중에 예후르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민생 문제는 다양하며 해결하는 방식도 천차만별입니다. 옳고 그름을 어찌 판별한단 말입니까?”

“원탁의 결정에 맡기도록 하겠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예후르가 작게 실소를 터트렸다.

레오폴트를 제외한 나머지 원탁 추기경들의 세력은 정확히 절반으로 쪼개어져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편을 들 것이 빤하므로, 레오폴트의 제안대로라면 결국에 실질적인 선택권은 오롯이 그에게 주어지는 셈이었다.

@“심성이 바르지 못하다면 제아무리 뛰어난 사도로서의 자질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퀴테리아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저는 기꺼이 성하의 고견에 찬성하겠습니다.”

퀴테리아의 선언을 기점으로 보나벤투라와 솔란지아, 콘체사, 람베르토의 찬성이 줄줄이 잇따랐다. 다른 추기경들이 당황한 기색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가운데, 지긋하게 레오폴트를 노려보던 예후르가 마지못해 입술을 열었다.

“어찌하여 찬성하신 겁니까?”

원탁회의가 파하기 무섭게 클레멘스가 예후르에게로 달려왔다. 예후르는 고드릭의 부축을 받아 비틀비틀 회의장을 빠져나가는 레오폴트의 야윈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어차피 열한 명의 원탁 추기경들 중 여섯이 찬성했던 사안입니다. 우리가 반대해 봤자 성하와의 골을 더 깊게 만들 뿐이겠죠.”

“새끼야, 그래도 설득은 해 봤어야지. 이대로면 두 번째 시험도 결과가 빤한 거 아니야?”

안드레아가 불만스럽게 팔짱을 끼며 낮게 중얼거렸다. 레오폴트의 흰 옷자락이 문턱 너머로 사라지자, 예후르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첫 번째 시험에서 그랬던 것처럼 페기와 비올라, 두 사람 모두의 손을 들어 주겠지.”

“젠장, 그럼 시험을 세 번씩이나 치르는 의미가 뭐야? 어차피 결과는 마지막 시험에서 갈릴 텐데.”

“그 전에 어떻게든 제 손으로 마무리를 짓고 싶을 테니까.”

레오폴트야 인정하려 들지 않겠지만, 마지막 시험 종목은 이미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4년 전에 정체를 의심받던 페기가 그러했듯, 진정한 사도를 가르는 시험에서 맨손으로 불을 피우는 것이 빠질 수는 없었다.

“민생 문제를 해결하라는 시험의 구색을 맞추려면, 카타리나 공작 전하와 알비야 공작 모두 현지로 가서 직접 문제와 맞닥뜨려야 합니다. 사실상 결정권이 성하께 있는 만큼 실제 해결 여부와는 관계없이 두 분 모두 두 번째 시험에 합격하실 테지만, 첫 번째 시험과는 달리 시일이 꽤나 걸리겠지요”

클레멘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여 왔다. 예후르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 어떻게든 비올라를 살릴 방안을 마련하시려는 거겠죠, 성하께선.”

“그런 방법이 있어?”

“…그걸 지금 나한테 묻는 거야?”

예후르가 흘끗 눈을 들어 안드레아를 보았다. 멀거니 그를 응시하던 안드레아가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을 간신히 지탱하며 씩씩거렸다.

“네가 설득해.”

“…….”

“제길, 네 장기 있잖아. 사람 헷갈리게 하는 그 말발로 영감님 좀 어떻게 해 보라고. 청백회 그 새끼들이 밖에서 무슨 깡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제대로 알면 설마 영감님이 저러겠어?”

“충분히 잘 알고 있어, 레오도.”

안드레아의 푸른 눈이 한 차례 일렁였다.

휘하의 성직자들에게 엄하고 정적에겐 한 줌의 용서도 없는 레오폴트지만, 일찍부터 무지렁이 백성들에겐 하해와 같은 자비를 베풀어 왔다. 자의적인 해석이 가능한 율법에 따라 지나치게 잔인한 형벌을 내리던 종교 재판을 성직자들에 한해 축소시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종교 재판이란 미명하에 고통받는 백성들을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었기에.

하지만 청백회로 말할 것 같으면, 그가 평생토록 배척했던 종교 재판소의 광신도들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썩어 빠진 사회를 쇄신한다는 명목하에 온 백성들로 하여금 천계율의 율법에 충실하길 강요하고 있었다. 오죽하면 종교 재판소의 광신적인 이단 심문관들이 청백회의 비밀 감찰단으로 암약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까.

예전의 레오폴트였다면 청백회의 세력이 이다지도 성장할 수는 없었으리라.

애당초 퀴테리아가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다소 늦은 나이에 중앙 교회로 진출했던 것은 그의 외면 탓이 컸다. 위스누아를 거점으로 그녀가 펼치던 청백 운동은 일찍부터 레오폴트의 눈 밖에 나 있었다. 그 때문에 보나벤투라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퀴테리아는 수년간 지방 수도원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어느 날 비올라가 사도로 각성하면서부터였다.

비올라의 눈물 어린 간청이 있었고, 레오폴트에겐 치열한 성도의 정치판에서 그녀를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 비호해 줄 세력이 없어 비참하게 죽었던 페기의 선례를 또다시 밟을 수는 없었다. 고심 끝에 선택된 것은 퀴테리아였다.

따라서 청백회를 만든 것은 퀴테리아일지 몰라도, 지금의 세력으로 성장시킨 것은 레오폴트의 침묵이다.

작금의 청백회가 성도에서 벌이는 파렴치한 행위를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럼에도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은 그들이 비올라를 지킬 방패이기 때문이다. 늙은 교황은 이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 손수 방패를 들 힘조차 없었다.

안드레아는 단숨에 그 모든 정황을 파악했다. 심해처럼 푸른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만약 영감님이 끝까지 비올라를 포기 못 한다면, 그땐 어쩔 건데.”

예후르는 말없이 시선만 보냈다. 온기 없는 표정에서 그의 대답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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