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오늘은 실망하기보단 그저 기뻐하고 싶어. 내 자리로 돌아왔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났거든.”
페기가 배시시 웃었다. 둥글게 솟아오르는 광대를 따라 두 눈이 매끄럽게 접혔다. 내리 어둡던 예후르의 낯빛이 그제야 조금 밝아지며 페기도 안심할 수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기 무섭게 클레멘스에게서 연락이 왔다.
“지금 여기로 온다는데?”
페기는 슬쩍 예후르의 눈치를 살피며 소심하게 말을 덧붙였다. 안드레아도 같이.
저택은 오랜만의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해졌다. 페기는 몰래 하녀를 불러 접견실의 꽃병을 모두 치우도록 명했다. 요새는 조금 잠잠하다만, 언제든지 폭발하여 주변을 초토화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후르와 안드레아의 관계였다.
클레멘스의 마차는 해 질 녘에 도착했다.
마차에서 내린 안드레아는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적발을 쓸어 넘기곤 페기의 머리를 거칠게 흩트려 놓았다. 페기는 엉킨 머리를 익숙하게 손으로 빗으며 두 사람을 접견실로 안내했다. 붉은 석양으로 잠식된 접견실에선 미리 도착해 있던 예후르가 막시모의 보고를 받고 있었다.
“혹시 오늘 경기장에서 차라를 본 사람 없습니까?”
막 접견실로 들어오던 세 사람은 그저 의아한 표정만 지었다.
“차라?”
“그러고 보니 오늘 그 꼬맹이가 안 보였네.”
내내 경기장 이곳저곳을 쏘다녔던 안드레아가 머리를 긁적였다. 페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차라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
“어젯밤부터 연락이 안 된다네.”
예후르는 일단 더 찾아보라는 말로 막시모를 내보냈다. 그러곤 소파에 앉아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근위대의 말론 한 달쯤 전부터 차라가 성궁 밖을 쏘다녔다고 해. 간혹 오늘처럼 외박을 하는 날도 있었는데, 요슈아 페임하른이 늘 곁을 지켜서 크게 걱정하진 않았고.”
차라는 유일하게 얼굴이 알려져 있지 않은 사도였다. 정치적으로 얽힌 사안이 전무하여 납치에 얽힐 가능성도 적었기에 비교적 자유로운 운신이 가능했다.
“그래도 오늘 경기장에는 나타날 줄 알았는데….”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거 아닐까?”
페기가 초조하게 되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던 예후르가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수색대를 풀었으니 곧 찾을 수 있을 거야. 걱정으로 앞서 나가지는 말자.”
“…….
“그보다 두 사람은 어쩐 일로?”
물음은 두 사람을 향한 것이었으나, 클레멘스 또한 궁금하다는 눈으로 안드레아를 쳐다보았다. 나름대로 격식을 갖춰 입은 옷이 불편한지, 안드레아는 목을 죄는 단추를 두엇 푸르곤 방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구린내가 나.”
클레멘스가 코를 킁킁거렸다.
“향기가 좋기만 한대요?”
“아, 진짜…. 여기 말고. 성도에서 구린내가 난다고.”
“오. 청백회의 구린내 나는 행적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 리가요.”
“아저씨. 나랑 한 판 뜰까?”
클레멘스는 그제야 얌전해졌다. 팔짱을 낀 안드레아가 사납게 인상을 구겼다.
“내가 한 4년 정도 성도를 비우긴 했는데, 분명 옛날에는 이러지 않았단 말이야. 하도 구린내가 풀풀 풍겨서 나름의 조사를 해 봤지.”
안드레아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쳤다. 도로와 건물들이 세세하게 그려진 성도 오스피나의 지도였다.
“여기.”
안드레아가 성도 중심부의 제법 커다란 건물을 가리켰다.
“이게 무슨 건물인지 알아?”
“어디 보자…. 페르나 학술원과 토미네 야채 가게 사이에 있으니….”
곰곰이 기억을 되짚던 클레멘스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퀴테리아 추기경의 저택이 아닙니까?”
“맞아. 청백회의 소굴이지.”
안드레아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등을 당당하게 폈다. 예후르는 물끄러미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여기가 구린내의 시발점이야.”
페기와 예후르, 클레멘스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랑스럽게 떠벌리던 안드레아는 맥 빠지는 그들의 반응을 발견하곤 도리어 아연해졌다.
“구린내가 여기서 나는 거라니까?”
“그래서?”
“아니, 내가 전에 그랬잖아. 퀴테리아랑 보나벤투라한테서 구린내가 풀풀 풍긴다고. 그런데 여기저기 싸돌아다니는 청백회는 물론이요, 그놈들 소굴에서도 구린내가 난다고!”
“…안드레아.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거야?”
페기가 어리둥절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차마 말을 잇지 못하던 안드레아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곤 목소리를 한층 낮추었다.
“좋아. 그럼 오늘 비올라한테서도 똑같은 구린내가 났다면 어때?”
시큰둥하던 세 사람의 표정이 일변했다. 안드레아가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이제야 좀 들을 마음이 생기나?”
“자세히 얘기해 봐.”
예후르가 심각한 얼굴로 재촉했다. 안드레아는 떨떠름하게 헛기침하며 괜스레 시선을 피했다.
“거, 오늘 내가 경기장을 좀 돌아다녀 봤거든. 청백회 근처는 구린내가 너무 심해서 반대편 1층에 있었는데, 비올라 고게 나타나니까 구린내가 다시 확 풍기는 거야.”
“확실해?”
“내 개코 못 믿냐?”
안드레아가 사납게 인상을 썼다.
페기가 청각, 예후르가 시각이 발달했다면 안드레아는 후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느끼지 못하는 악취에 그녀만 이토록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잠자코 그녀의 말을 경청하던 클레멘스가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일전에 도미시오 추기경의 사택에서 보았던 황제 폐하의 전서응에서도 구린내가 난다고 하셨지요.”
“맞아, 그것도 있었지.”
“조작된 폐하의 친서를 배달한 전서응과 청백회… 거기다 오늘의 알비야 공작까지.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입니다. 심지어 용은 알비야 공작을 핥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혼절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전서응과 용….”
멍하니 중얼거리던 예후르가 문득 아래턱을 매만지던 손길을 멈추었다. 음산한 빛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예후르?”
페기가 붙잡을 틈도 없이 예후르는 접견실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고는 마침 저택으로 귀환하던 하인에게서 말고삐를 건네받아 훌쩍 안장에 올라탔다. 등 뒤에서 호위 기사들이 다급하게 그를 부르짖었으나, 그를 태운 말은 쌩하니 언덕을 달려 내려갈 뿐이었다.
부쩍 서늘해진 밤바람이 몰아닥쳤다.
갈색빛으로 변색되어 가는 들풀이 길 양옆으로 몸을 누이고, 익어 가는 곡식 냄새가 멀리서 풍겨 왔다. 시시각각 가까워지는 성도 오스피나의 백색 성벽 위로 불그스름한 노을과 검푸른 밤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는 순식간에 성문을 넘었다. 대로를 활보하던 시민들이 그의 얼굴을 알아보곤 수군덕거렸으나, 그의 신경은 오직 하나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성도에서 가장 높은 탑.
“에, 엘피도 공작 전하?”
앙겔리카 성궁의 문지기들은 난데없이 나타난 그의 모습에 놀라면서도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예후르는 말을 타고 그대로 직진했다. 마침내 도달한 곳은 여덟 개의 대성당이 자리한 성 나르세스 광장이었다.
“전하. 이곳은 해가 지면 출입이 금지….”
“이봐. 조용히 해.”
그를 막아 세우려던 근위대원은 동료의 만류에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예후르는 그들에게 시선 한 줌 주지 않으며 말에서 내려섰다.
바글거리는 인파가 빠져나간 순백의 광장.
그 복판에서 여덟 천사의 이름을 딴 여덟 대성당을 차분히 돌아본 그가 발걸음을 떼었다. 저벅거리며 향하는 곳은 다름 아닌 광명의 천사를 섬기는 성 미할리나 대성당이었다.
성당은 텅 비어 있었다.
그는 티끌 한 점 용납하지 않는 순백의 벽면과 아무런 장식 없이 밋밋한 윤곽만을 내보이는 기둥, 그저 하얗기만 한 돔을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그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밤낮없이 타오를 성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고요히 타오르는 불꽃은 그의 등 뒤로 길고 긴 그림자를 남겼다. 모든 것의 최초이자 시작을 상징하는 대성당에선 오직 타오르는 성화만이 벽을 장식하는 조각이 되고, 돔을 채우는 그림이 될 것이었다.
예후르는 곁문으로 들어가 성당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사이 해가 완전히 지고 좁다란 창밖으론 밤이 내려앉았다. 한 치 앞도 가릴 수 없는 어둠이었지만 그에게는 별반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수천의 계단을 올라 마침내 대성당의 종탑 위에 섰다.
달은 가늘고 별빛은 잘게 부서지는 밤이었다.
거칠 것 없는 밤바람이 몰려와 종탑을 에워싸니, 그의 까만 머리칼이 흩날리고 두꺼운 망토 자락이 나부꼈다.
그럼에도 예후르의 시야는 분명했다. 밤의 시커먼 어둠도, 거센 밤바람도 흔들지 못하는 그의 눈은 종탑 아래 까마득히 펼쳐진 성도의 전경을 담아냈다.
“여기가 구린내의 시발점이야.”
그렇다면.
예후르가 천천히 팔을 뻗자, 창공을 가로지르던 독수리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내려와 그의 팔뚝에 안착했다.
그는 목표물의 방향을 가늠했다.
청백회의 소굴은 그가 선 방향에서 북서쪽.
“북쪽으로 날아가.”
입술을 달싹거리기 무섭게 독수리가 퍼드덕거리며 날아올랐다. 예후르의 눈이 집요하게 독수리를 쫓았다. 거센 밤바람이 몰아치는 와중에도 수평으로 펼쳐진 독수리의 날개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독수리의 몸체가 흔들리더니 날개가 서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고개를 가누어 올바른 방향을 찾는 것 같았지만 소용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에 속수무책으로 끌어당겨지던 독수리는 청백회의 소굴에 근접하기 무섭게 몸을 뒤틀더니, 이내 그 아래로 추락하고 말았다.
“…하.”
시커먼 어둠 속에서 예후르의 얼굴이 아연하게 일그러졌다. 틀어쥔 주먹에 순간적으로 힘이 가득 들어가고, 어금니가 절로 맞물렸다. 실낱같은 자제력으로 남은 정신이나마 붙들고 있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나의 형제.
기어코 네가 나를 노엽게 하는구나.
당장이라도 죄 무너트려 버릴 것처럼 청백회의 소굴을 노려보던 그가 망토를 펄럭이며 휙 돌아섰다.
주모자만 잡아들이려던 계획이 바뀌었다.
그는 저것들의 뿌리를 뽑아 버릴 작정이었다.
***
천장의 창밖으로 조각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우울하게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요슈아가 투정 부리듯 물었다.
“진짜 오늘도 여기서 안 나갈 거야?”
차라는 대답 없이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요슈아는 입술을 툭 내밀며 괜스레 발치를 뒹굴던 책을 걷어찼다.
“너 그러다 나중에 네 누나한테 혼날지도 몰라. 너 경기장에 안 갔다는 거 지금쯤 다 퍼졌을걸?”
“잘 끝났다며. 그럼 됐지.”
요슈아는 여전히 책에 코를 박고 있는 차라를 불만스럽게 째려보았다.
헤르고미 문서 기록원에 처박힌 지 벌써 한 달째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해 뜰 때 와서 해 질 때는 돌아갔는데, 어째 갈수록 해를 보기가 요원해졌다. 심지어 최근에는 여기서 밤을 새울 때도 있었다.